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58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582)
“암막이 걷히고 있었군.”
조금 뒤늦게 주변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말이었다.
이자닌은 이에 바로 표정을 왕창 구기면서 고개를 까닥하며 한쪽을 가리키고는 벨라딘 쪽으로 돌아보면서 방긋…… 사실 억지란 것을 보는 쪽에서 바로 알 수 있는 웃음을 띤 다음에 말한다.
“잠깐, 저쪽에서 얘기 좀 하고 올게. 멀리 안 가. 금방 올 테니까, 잠시만!”
바로 벨라딘 곁에서 쟌이 속삭이는 소리가 낮게 대꾸처럼 울리는데…….
“멀리 가도 돼. 가서 오지 않…….”
쿡, 벨라딘의 손마디가 쟌의 머리를 쑤시듯이 짓눌렀다. 때문에 쟌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무는 사이, 벨라딘이 일부러 좀 키운 목소리가 쟌의 말을 지우듯이 흐른다.
“다녀와. 할 얘기는 충분히 하고 와. 어디 안 갈 테니까.”
이자닌이 손을 흔들면서, 한 손으로는 쿨란의 소매를 잡아 질질 끌듯이 성벽 난간을 따라 저쪽으로 갔다. 그래서 그 모습이 걷혀 가는 어둠 속에 흐릿해진 다음, 벨라딘이 본격적으로 쟌의 머리를 손으로 꽉 쥐고 흔들면서 말한다.
“의뢰인이라고, 의뢰인! 가서 오지 않으면, 보수는 네가 낼 거냐! 상황 보고 떠들라고! 앙!”
“우이잇! 그니까! 왜 이자닌의 의뢰를 받냐고! 분명히 이상한 일 생길 거라고 그랬잖아! 돈 쪼오오금 더 준다고 해도 저 언니 의뢰는 받지 말자고 했잖아!”
쟌이 징징대는 소리로 반발했다.
그런 쟌을 향해 루비가 한숨을 쉬고, 테리와 테루는 합창하듯이 혀를 차는 소리를 흘린다.
“아이구, 돈 좋아하는 쟌이면서!”
“조금만 위험하면 돈 버리고 튀자네!”
쟌은 둘을 향해 바로 으르렁대는 대꾸를 한다.
“돈을 버는 까닭은 살아서 쓰려는 거잖아! 수상한 패거리에 섞이면 안 되지!”
벨라딘이 그 머리를 살짝 세게 두드리며 쟌의 귓가에 대고 말한다.
“대체 누가 이런 좋은 얘기를 하실까! 어째서 꼭 자기 기분 나쁠 때만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말을 하는지 진짜 알고 싶거든!”
“아야— 아파, 그만 때려!”
따다닥!
“카티야다.”
“뭐요?”
불쑥 쿨란이 꺼낸 말에 이자닌은 저쪽의 소란에 대해 기울이던 귀를 돌리면서 되물었다. 쿨란은 쓴웃음과 함께 다시 몇 마디 더 보태 말한다.
“이 마법, 상아탑의 대마도사 카티야의 마법이란 말이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그게 뭔 상관인데요?”
이자닌이 미간을 좁히면서 다시 묻고 있었다.
쿨란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이자닌이 모른다는 점을 느낀 듯, 이마에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목소리를 낮춰 설명한다.
“카티야가 활약할 당시, 카티야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흔히 로그메이지라고 알려진 마법사…… 블랙메이지 바라크.”
“블랙메이지? 그게 아저씨랑 관계있어요?”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내가 바로 블랙메이지잖아.”
눈빛이 번뜩이는 쿨란, 블랙메이지 파쿠란의 변장을 보면서 이자닌은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사납게 따지는 소리가 이자닌의 입술 사이에서 아주 낮고 빠르게 흘러나온다.
“파아아…… 쿠란, 아저씨 이름도 바꾸고 가는 길에 그렇게 티 낼 정도로 중요한 일이에요? 갑자기 정신 줄 놓은 것처럼 그렇게 실실거릴 일이에요? 우리 지금 놀러 가는 길 아닌 거 알죠?”
파쿠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단둘만의 이야기였고, 혹시나 해서 단검 자루에 새겨진 방음(防音) 각인까지 활성화한 채인데도 이자닌은 함부로 파쿠란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말투까지 가능한 한 뒤틀어서 숨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든 파쿠란의 위장, 쿨란이 단순한 스펠캐스터가 아닌 블랙메이지란 사실을 잘 감추는 자세였다. 정작 파쿠란 본인은 부주의하게 나불거리는 중이고!
진지한 이자닌의 자세를 보며 파쿠란은 조금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자닌, 알드바인을 거쳐 가야겠어.”
“저기요, 아저씨?”
이자닌의 미간부터 이맛살까지 주름이 잡히는 광경은 파쿠란에게 설명을 서두르게 했다. 여기서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니 어쩌니 했다가는 ‘이런 미친놈이 지금 장난하냐!’라는 이자닌의 말버릇 아닌 말버릇이 격렬하게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이 마법, 알드바인의 마법사가 주도했다고 했다. 즉, 알드바인의 마스터가 카티야의 마법을 계승했다는 말이지. 그리고 그 말은…… 아, 내가 말했던가? 블랙메이지 바라크가 길드에 올려놓은 이름이 라바크, 검은 연금술사 라바크라고 들은 적 있지?”
“바라크, 라바크? 이 뭔— 장난하나!”
이자닌의 이마에 핏줄과 힘줄이 탱탱하게 돋아났다.
음절 하나 바꿔서 다른 신분의 이름을 만들었다는 것, 그야말로 무성의한 그 감각에 격분한 탓이 컸다. 특히나 그 이름의 주인이 남긴 바에 대해서 고려한다면 그건…….
“진정하고,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그래, 그 검은 연금술사 라바크의 비전이 바로 블랙메이지 바라크의 비전이야. 그 비전은 카티야의 비전 마법과 함께 감춰졌다. 그러니까 알드바인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도박하자는 거네? 할 만한 가치는 넘쳐나고.”
어느새 이자닌의 말투는 평소 파쿠란을 대할 때로 돌아가 있었다.
파쿠란은 그 모습에 살짝 안도하면서 나직하게, 이번에는 자신이 말투를 고쳐서 말한다.
“그렇지, 그러니까 아가씨. 칠왕국의 사정은 한 달 정도 늦춰서 들어도 상관없잖아요? 라바크의 유산이라면 길드에서 오히려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말이지요. 라비엔이 털린 정도는 먼지 털듯이 싹 잊을 수 있을 겁니다.”
“칫. 알았—어요, 아저씨! 그렇게 하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이자닌은 슬쩍 벨라딘 일행을 보며 나직하니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파쿠란은 슬쩍 헛기침을 하면서 위로하듯이 말하는데…….
“벨은 말이 통하잖습니까, 아가씨가 고운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두 손 모아 금전 모양을 만드는 것이 이자닌의 핏대를 더욱 치솟게 하잖나!
“닥쳐—요!”
“넵.”
파쿠란은 고용된 스펠캐스터 쿨란으로서, 짧고 빠르게 대답했다.
이자닌이 그 모습을 더욱 얄미워했지만, 그래도 벨라딘 일행을 설득하는 일은 이자닌의 몫이었다. 여행 경로를 바꾸려 하는 이상, 파쿠란이 장난처럼 표현한 그대로 돈이 팍팍 더 깨질 터였다.
* * *
투란은 느슨하게 눈꺼풀 위로 비치는 빛을 느꼈다.
새벽과는 다른 밝은 햇살이 주변을 밝히고 있으니 당연한데…… 옆으로 몸을 뒤척이면서 살그머니 뜬 눈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천장 사이에서 새들어 오는 빛을 확인하고서야 투란은 알아차렸다.
‘엄청 오래 잤나?’
동틀 무렵에 투덜거리다가 잠들었는데 깨 보니 성채 정상에 해가 뜬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못해도 반나절 정도는 생각 없이 잤던 모양이다.
―그래, 꽤 깊이 오래 잤다. 꽤 많은 일이 있었지.
‘뭐?’
눈을 찔끔 감으면서, 숨을 깊이 들이쉬는 채로 투란은 일단 부스스하니 더 자려는 시늉부터 했다. 대체 자는 동안에 뭔 일이 있었기에 드라고니아가 저리 겁주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있는가?
―눈 뜨고 그냥 앞에 뭐가 보이는가부터 확인해 봐.
피식 웃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깊이 들이쉰 숨을 길게 내쉬면서 투란은 가만히 눈을 떴다.
뒤척인 탓에 보이는 옆의 풍경…….
콧물을 훌쩍대는 꼬맹이 둘이 쪼그리고 앉아서 투란을 구경하고 있잖은가?
“어, 음?”
맹한 소리를 내면서 투란이 눈을 깜박였다.
이 꼬맹이 둘, 켈타 마을의 꼬맹이들이었다.
분명히 어른들 졸졸 따라가서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누운 채로 봐서 얼굴을 잘못 봤는가 하는 표정인 채로 투란은 고개를 어깨에 붙이면서 얼굴만 바로 세워 봤다.
역시나 켈타 마을의 꼬맹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어깨 너머로 서성이듯이 서 있는 한 명, 역시 켈타 마을에서 함께 왔던 가룬……인데 어째서 그 낯짝이 푸르딩딩한가!
“음…… 꿈인가.”
투란은 눈을 감고 그대로 다시 고개를 떨구면서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 순간, 누가 투란의 발바닥을 쿡 찌르듯이 차면서 외친다.
“어이구! 그만 좀 일어나! 해가 머리 꼭대기인데 더 잘 거냐!”
한숨과 함께 투란은 부스스하니 몸을 일으켰고, 불만이 가득한 채로 서 있는 라펜을 바라봤다. 꽤 언짢은 일이 많았다고 표정과 태도로 아낌없이 드러내는데, 그 곁의 마켈 또한 입을 꽉 다물고 비슷한 기분을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둘을 잠깐 바라보다가 투란은 턱짓으로 가룬과 꼬맹이들을 가리키며 묻는다.
“에, 얘네 꿈 아니에요?”
“뭔 소리야. 갑자기 있는 사람을 헛것으로 만들지 마!”
라펜이 더 짜증 났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그래서 투란은 살짝 고개를 돌린 채로, 가룬을 바라보며 물었다.
“음, 마을 사람들이랑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이 셋만 남겨 둔 채로 켈타 마을의 어른들은 어디 간 것인가?
왜 이 셋만 여기 덜렁 남아 있고, 베즐 팀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직하니 격한 말을 주고받는 중인가?
이모저모로 잠에서 깨자마자 이상한 꼴을 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투란이 더듬어 짚는 셈이었다. 자고 있는 투란, 자신의 곁에 쪼그린 모습이 마치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함께 한다는 듯한 태도이니…… 몬스터 헌터 일행에게 이 셋은 미끼로 쓸 작정이 아니라면 상당히 부담을 주는 짐이 될 낌새가 역력했다.
아마 라펜이나 마켈이 불만 가득한 모습인 것도 그 때문일 듯했다.
하지만 가룬은 투란의 눈길을 외면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마켈이 혀를 찼고, 라펜은 ‘어우!’ 하고 더 성질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더 물어도 당장 대답이 나올 분위기는 아닌 광경에 투란은 일단 일어나서 자신의 차림새부터 점검했다. 자다가 느슨해진 부분을 다시 조이고, 먼지를 털고…… 다시 가룬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면서 투란은 물었다.
“어디서 맞고 왔어요?”
가룬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꼬맹이 둘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꼴이 조금 괴상했다.
갸웃하며 투란이 마켈과 라펜을 바라보니, 둘은 거의 동시에 베즐 팀 쪽을 턱짓하며 ‘아, 난 몰라!’ 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뭔가 알면서 대답을 거부하는 이 태도에 투란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둘을 흘겨보고 저쪽 베즐 팀도 흘깃했다. 저쪽은 저쪽대로 자기네끼리 으르렁거리는 분위기가 역력한데 열심히 목소리를 낮춰서 그냥 듣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문제가 가룬과 두 꼬맹이 때문인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흘깃대는 눈짓, 몸짓 덕분에.
그런데 대체 뭔 일인가, 투란으로서는 짐작 가는 일이 전혀 없었다.
왜 갑자기 이 부담스러운 셋이 켈타 마을 일행과 떨어진 채 여기 있는지…… 왜 몬스터 헌터 파티가 이를 두고 아옹다옹하는 꼴인지.
‘뭔 일이야, 대체!’
어쩔 수 없이 투란은 드라고니아에게 자는 동안 엿들은 바를 묻고 말았다.
―그건…….
인내하지 않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가 약 올리겠다는 듯이 아주 느릿하게 말을 꺼내려 했다. 한데 바로 저쪽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베즐 일행을 향해 울려 나오니…….
“야아, 그냥 좋은 성격인 줄 알았더니 아주 착하기도 하다며? 쾌락의 전당 앞에서 신나게 한바탕 했다는 소리 들었어! 하하핫, 베즐 팀이 누군가 했는데 말이야.”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투란에게는.
하지만 라펜과 마켈이 한숨을 푸욱 내쉬고, 떠들던 베즐 팀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면서 말한 이를 바라보는 꼴로 봐서는 지금 이 상황이 바로 그 때문인 듯했다.
투란은 재빨리 라펜을 향해 묻는다.
“쾌락의……? 거기 창관(娼館)이라는 곳 아니에요? 무슨 기사처럼 여자들 모아 놓고 결투라도 했던 거예요?”
“야! 정신 줄 놓는 소리 하지 마!”
라펜이 잠깐 혹한 표정을 짓다가 마켈의 사나운 눈길에 나오려던 헛소리를 자제한 듯이 투란에게 타이르는 말을 했다. 물론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쾌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이는 거침없이 낄낄대며 말하고 있었다.
“팔려가는 애들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철없는 애송이 편을 들었다면서? 와아, 나 그런 용사가 실제로 있는 줄 몰랐어! 그것도 내가 아는 얼굴들이 그랬다니, 하하핫! 정말 성격 좋아!”
떠드는 사내, 묘하게 높고 뾰족한 고깔모자를 썼는데 정작 웃통을 홀랑 벗어젖힌 채로 무릎 위까지만 덮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맨발인 채로 풀잎을 꼬아 엮은 샌들을 덜렁거리며 발바닥에 대충 붙여 놓은 꼴이지만 그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장신구 여럿은 굉장히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투란은 문득 그 장신구에서 풍겨 나오는 기척을 느꼈고, 바로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베즐은 아직 그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듯, 남의 일을 놓고 떠드는 사내를 못마땅히 여기겠다는 말투로 물었다.
“누구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