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6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62)
길고 굵은 꼬리처럼, 한편으로는 온몸에서 풀풀 보랏빛 연기를 휘날리는 괴상한 몰골로 투란은 눈깔꽃의 줄기가 깔린 영역을 지났다. 그리고 우뚝 선 그랑츄가 머무는 곳에 마침내 다다랐다.
‘우와, 이렇게 컸어?’
가까이서 보자, 웨어울프와 거의 홀로 싸웠던 그랑츄의 크기는 멀리서 본 것보다 더 대단해 보였다.
키는 2미터 70센티 언저리인데, 그 키가 작달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통이 두껍고 굵었다. 어디 가서 오우거라고 들이대도 괜찮을 정도의 체격이었고, 팔다리와 목덜미의 굵기는 정말 이 그랑츄가 그만한 괴력을 지녔을 거라 증명하는 듯했다.
‘아직도 노려보는 것 같잖아?’
게다가 투란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숨이 멎은 그랑츄의 눈동자는 생생하고 강렬한 투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났고, 밤이 다 지나 아침도 그럭저럭 스쳐 간 다음의 햇살이 꽤나 밝게 내리쪼이는 상황인데도, 여전히 그랑츄의 망령이 스산하게 맴돌며 그 눈동자를 통해 드러나는 듯했다.
조금 위축되고, 조금 움찔한 모습으로 투란은 속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배를 긁적거렸다. 늑대의 손이 그랑츄의 배를 긁는 꼴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곧 깨닫자, 투란의 입가에 쓴웃음이 저절로 매달렸다.
몬스터 로드인 투란은 그랑츄의 편도, 웨어울프의 편도 아니다.
가슴 아래 허리부터는 완연히 그랑츄의 형상이고 왼팔은 어깨 아래로 슬그머니 붉은 털이 돋아나는 웨어울프의 형상이며 오른쪽 가슴과 고스란히 이어진 오른팔은 ‘이상한 심장’을 지닌, 투란 스스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것이다.
긁적긁적.
새삼 자신의 처지를 느끼면서, 투란은 뾰족한 타원의 손톱이 바싹 돋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어 댔다. 바위 같은 살결이 머리 위에 자리 잡고 손톱의 날카로움을 버텨 줬다. 목덜미와 머리 가죽까지 그랑츄의 것을 빌린 채이므로.
‘음, 대체 뭘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사실 그냥 호기심이었다.
굳이 이쪽으로 오지 않고 저편에서 호수의 물길이 늘어져 가는 쪽을 향해 가면 되었다. 한데 굳이 이편으로 와서, 우뚝 선 큰 그랑츄와 바닥에 질펀하게 깔린 웨어울프의 핏자국을 보고 있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야말로 보고 싶은 현장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엉뚱한 호기심에 투란은 가슴속에서 웃고 놀리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랑츄는 이미 삼켰…… 응? 가만!’
투란의 눈길이 섬세하게 우뚝 선 큰 그랑츄를 훑었다.
“한 번에 에센스를 완전히 습득할 수 없다면 두 번, 세 번 도전하는 수밖에!”
호기롭게, 패기 있게 그딴 소리를 하던 몬스터 로드가 있지 않았나?
샤오콴 마을을 들락이는 몬스터 헌터 중에서는 한번 놓쳤다고 사냥감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근성 있는 작자가 많았다. 그리고 목적이 전혀 다른 몬스터 로드 중에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자가 있었다.
‘내가 삼킨 녀석은…….’
머리가 아래턱만 남기고 뜯겨 나간, 2미터 40센티 정도의 체격이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죽어서도 눈동자에서 투지가 흘러나오는 듯한 그랑츄에 비하면 작고 약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지금 투란의 속을 부르르 떨게 하는 이 느낌, 자신보다 강한 동족에 대한 아련한 동경, 갈망 같은 이 감각은 분명히 그랑츄 무리가 느끼던 것과 같을 것이다.
놈들이 죽은 동족 앞에서 꽥꽥대면서 자신들을 과시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이 큰 그랑츄는 압도적으로 강하며 포악하고 잔혹하게 적을 대했다. 제 심장을 내주는 척하면서 적을 으깨려 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기도 했다.
‘결국 뚫렸지만.’
그러나 머리통이 뜯겨 나가지는 않았다.
저 도도한 눈빛으로 투란을 내려다보는 낯짝은 무슨 바위조각처럼 멀쩡하다!
이 녀석의 가슴을 뚫기 위해서, 웨어울프 또한 전력을 다했잖던가!
투란은 천천히 늑대의 손을 내밀어서, 흘러내리다가 뭉클대는 꼴로 굳어진 핏덩이를 눌렀다. 가볍게, 걸쭉한 핏덩이가 그래도 붉은 털을 적시며 끈적끈적한 느낌 그대로 쥐어졌다.
그 손의 감촉을 느끼고 보다가 투란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랑츄와 눈을 마주치니, 돌연 온몸이 오싹해졌다.
‘어, 화내는 건가?’
저절로 투란은 이런 생각을 해야 했다.
늑대의 손, 웨어울프의 팔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꼴을 보며 투지를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고, 감히 어디다 그 손을 대느냐고 화를 내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숨이 멎고 심장이 찢겨 나간 녀석인데도!
때문에 투란은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음, 안녕? 나는 투란인데…….”
입을 열고 나자 자신이 하는 짓거리가 엄청나게 바보스럽다는 것이 순식간에 뼛속 깊이 느껴진다! 그런 한심함 탓인가, 왠지 그랑츄의 눈동자 속에서 투지가 줄고 ‘이 바보는 뭐야?’라고 황당해하는 낌새라도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투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나랑 함께 가자. 넌 이미 죽었……어도 나랑 함께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나랑 함께…… 음, 내 힘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살아…… 아, 사는 건 아니고 암튼, 그 힘을 또 발휘해 보자고!”
일단 떠들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말한다는 오기를 부려 본 것이었다.
때문에 투란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한심하고 바보스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잘 말해 보고 싶은데, 영 안 되잖은가!
그래도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에 투란의 왼손은 가슴팍에 그랑츄의 핏덩이를 바르고 있었다. 핏덩이 속에서 검은 톱니바퀴가 돌출되어 돌기 시작했고, 곧 핏빛 톱니 고리가 늑대의 손에 자리 잡았다.
잠깐 그 톱니 고리를 느끼고 내려다보다가 투란은 다시 그랑츄와 눈을 마주치면서 늑대의 손을 내밀었다. 지난밤에 웨어울프의 손이 관통했던 구멍 속으로 투란이 내미는 늑대의 손이 파고들었다.
“부탁해.”
이치에 닿지 않는 한마디가 투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휘이잉!
가벼운 바람 소리가 들린 듯했고, 뭔가 우뚝 선 큰 그랑츄가 어이없어 웃는 듯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음 순간, 그랑츄의 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 우왓!”
한 손을 그 몸에 꿰어 넣은 채였던 투란은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내야 했다.
2미터 70센티 언저리의 키, 두껍고 굵은 몸, 잿빛의 바위 같은 살갗, 이 모든 형상이 한순간에 빛을 뿜듯이 투명해졌다. 그 투명함 속에서 그랑츄의 투지 넘치는 눈동자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거 진짜 죽은 채로 날 보고 있었나?’
눈동자의 윤곽이 흐릿하게 번져 가는 그랑츄의 눈알이 번뜩거리며 이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다. 그다음에 투명한 몸의 안쪽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광채가 보였다 싶은 순간, 그랑츄의 몸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투명한 광채가 되어 사라지는 그랑츄에게서 남은 잔해는 그 내장의 조각으로 얇고 빛바랜 가죽처럼 바람에 휩슬려 멀리 날아갈 뿐이었다.
투란은 멍하니 내밀었던 손을 내려다봤고, 핏빛의 고리 속에서 일렁이며 타오르는 듯한 그랑츄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경외가 투란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마치 사라져 간 그랑츄가 그의 부탁한다는 한마디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았다. 비록 어이없어 웃고 기막혀하는 듯도 했지만, 결국 그의 요청에 응해서 자신을 물려준 듯하기도 했다.
“그래, 잘 받을게.”
투란은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다가 아예 심호흡을 했고, 그사이 손이 움직여 가슴에 핏빛 고리가 닿았다.
핏빛이 은은하게 투란의 온몸을 쓸어 가고 가슴팍에서 맴돌던 검은 톱니바퀴 무늬가 사라졌다.
그다음 바로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그랑츄의 정수가 엉기면서, 몸이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을.
뚜득, 우드득!
발이 좀 더 커졌고, 척추가 더 굵어지며 온몸의 뼈대가 확장되어 갔다.
어깨와 목덜미, 머리 위로 회색의 살결이 좀 더 세차게 조여들었다.
두개골이 더 커지고 강도가 더 억세지면서 살결의 바위 같은 힘을 너끈히 버텨 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온몸을 질주하던 변화가 왼쪽 가슴으로 몰리면서, 투란은 악마의 심장이 곤혹스러워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보다 강한 그랑츄의 심장이 형성되려는 곳에 떡 하니 자리 잡고 버텨야 하는 당혹감인 듯했다.
투란은 마음을 다잡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고, 금방 결정했다.
악마의 심장이 심장에서 잠시 물러나며 주변의 넝쿨과 줄기에 자그마한 여러 개의 구근을 형성하고, 큰 그랑츄의 심장을 온전히 왼쪽 가슴 깊이 갖춰지게 했다. 그다음 다시 악마의 심장이 큰 그랑츄의 심장을 덮쳤다!
‘몸의 씨앗을 얻어내! 그리고 강하게 합쳐지라고!’
투란은 염원했고, ‘천칭의 문장’이 그의 의지를 실어 조율했다.
오른쪽 가슴속에서 ‘이상한 심장’이 잠시 헝클어진 듯이 뛰다가 새로운 고동에 맞춰 좀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악마의 심장이 큰 그랑츄의 심장과 결합하며 더 강해진 것에 박자를 맞추는 듯했다.
‘음, 그래도 원래보다는 꽤나 여리구나.’
새삼 투란은 느끼고 알 수 있었다.
순수한 ‘이상한 심장’ 둘이 뛸 때랑 비교하면, 여전히 약한 고동인 것을.
하지만 두 팔과 새롭게 강화되고 커진 그랑츄의 형상을 움직이는 데는 아주 남아도는 맥동이기도 했다.
잠시 투란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햇살 아래에서 주변이 살짝 낮아진 것을 느꼈다. 그이 키와 체격이 커진 때문이었다.
‘어, 손은?’
왼쪽, 오른쪽 모두 그랑츄의 손이 아니었다.
연한 새싹빛 손바닥과 짙은 녹색이 검게 보이는 손목은 여전했고, 붉은 털이 살랑이는 웨어울프의 팔도 당당하게 자리를 지켰다. 단지 그 굵기와 크기가 미묘하게 몸과 비율이 맞춰진 채로 커졌을 뿐!
이 모습에 투란은 만족했다.
‘천칭의 문장’, 몬스터 엠블럼이 자연스럽게 성공적으로 형상의 조율을 이뤄 냈다는 것이니!
‘아, 목마르다!’
물론 덩치가 커진 만큼, 투란은 갈증과 허기도 좀 더 세진 것을 바로 가늠할 수 있었다. 악마의 심장이 거세게 요구하고 있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작은 늪’이 슬그머니 다시 자기 자리를 찾듯이 새로운 포식과 융합을 마친 악마의 심장 속에 톡 튀어나온 것이고, 한편으로는 바로 곁에 큰 물웅덩이, 호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투란은 바로 물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촤아아!
호수의 얕은 물가를 첨벙거리며 걷다 보니, 바람결에 세차게 흔들리는 물결이 바로 발목을 적시며 몰려오기도 했다. 그 물결 사이로 흐느적거리는 줄기도 보였고, 그때마다 투란은 이게 뭔 넝쿨의 가닥인가 주의했다. 버틸 수 있다고는 해도 눈깔꽃이 펑펑 터지는 광경은 그다지 좋은 느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호수를 걷다가 마주친 줄기 가닥은 눈깔꽃의 것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네, 이거 분명히 악마의 심장 같은데…… 왜 뿌리가 안 보여?’
투란은 궁금해하고 있었다.
호수에 몸을 담근 채로 얼마 동안 쉬다 보니, 이상한 넝쿨의 줄기랑 만나게 되었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알 수 없는데, 구근 덩어리가 없는 악마의 심장 줄기였다. 마침 호수의 물길이 흘러 나가는 쪽인 듯했고, 투란에게는 그 방향이 이곳에서 벗어나는 길로 보이기도 했다. 그랑츄 무리가 가지 않은 방향이었으니까!
이미 강력한 악마의 심장을 지닌 상태에서 뿌리도 없는 녀석에게 거리낄 이유가 없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며 갈 길을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걸어 나오는데, 작은 가닥이었던 이상한 줄기가 점차 많이 보였다.
‘뿌리도 없는 게 왜 이리 억세지?’
갸웃하며 투란은 물이 흘러가는 저편, 악마의 심장 줄기 가닥이 간간이 흐느적대며 나타나는 곳을 쳐다봤다.
큰 그랑츄와 웨어울프의 힘줄, 핏줄이랑 두 개의 심장을 당연히 여기는 ‘이상한 심장’까지 챙겨 먹은 투란의 악마의 심장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어떤 악마의 심장과 겨뤄도 질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이 새로운 넝쿨의 줄기가 담고 있는 억센 탄력은 투란의 덩굴줄기 못지않았다.
‘분명히 뭔가의 시체를 뜯어 먹고 있는 것 같은데…… 뿌리도 못 만들면서 물은 계속 마시는 것 같고……. 대체 어디 들러붙은 놈인데 이런 줄기를 흘리는 거지?’
여차하면 물에서 튀어 나가 숲 쪽으로 도망칠 준비도 하면서, 투란은 굽이치고 좁아지는 물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슬슬 강줄기처럼 보이는 물길이었고, 헤엄 못 치면 빠져 죽기 알맞을 만큼 폭이 넓은 지점도 있었다. 그 깊이는 간혹 투란의 목까지 잠길 정도가 되기도 했다.
갑자기 푹 빠지는 깊이에 놀라 투란은 몇 번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간혹 그 물속에서 눈깔꽃이 두어 송이 발딱 서는 것도 보였지만, 투란에게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보라색 안개만 뿌리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 투란은 슬그머니 해가 저물어 가는 광경을 봤고, 물에서 나와야 했다.
달이 뜰 때에는 가능한 한 그늘이 좋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