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62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623)
벼락 비가 멎었고, 허공에서 몇 가닥의 번개가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광경만이 흐릿하게 남겨졌다. 알드바인을 노리며 성벽을 넘기 위해 나타났던 몬스터의 잔해는 가득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없는 듯했다.
덕분에 성벽 위에서는 잡담을 할 여유를 누릴 수 있는데…….
“활대 앞으로 툭 튀어 나갔다고! 활대랑 수평으로 화살이 누운 채 얌전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툭 튀어 나가는 거였어! 그걸 잡아서 시위에 거느니 등에 멘 화살통에서 꺼내는 게 정상이지! 갖고 다니는 게 편하면 뭐 해, 막상 쏠 때 불편하기 짝이 없구먼! 그걸 완성품이라고 들이밀고 있으니까, 이 영감이 멀쩡해 보였겠냐? 그랬잖아, 이 미친 영감아!”
이렇게 타크는 하클을 보면서, 예전에 자신이 들렀을 때 보였던 활과 투란이 가진 활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열변(熱辯)을 토하고 있었다. 그 볼 한구석에 벤슨이 선물하고 간 푸르딩딩한 멍이 박혀 있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물론 하클 또한 타크의 이런 태도에 못지않게 무관심한 표정과 태도로, 회오리살을 만들고 있었다. 타크가 하는 말 따위는 저 먼 하이랜드의 티끌이랑 노는 바람에 불과하다는 듯!
둘이 그러는 모습을 흘깃거리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투란은 산돌프와 함께 진지하게 멀리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타크가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춰 주면 왠지 하클이 성낼 낌새였으니까, 처음 설계한 대로 만들지 않은 활에 대해서 언급한 것만 해도 이미 잔뜩 노려보는 눈길을 받은 탓에 투란은 한발 늦게라도 발을 뺀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멀리 관측하는 산돌프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조금 더 낫기도 했다.
“산돌프, 뭐 보여요?”
“아니.”
투란의 물음에 나온 대답은 짧았다.
그래도 투란이 슬슬 목을 돌리며 피로한 척, 안심하는 척하기에는 충분했다.
“조금 쉴 수 있겠네요.”
“아니.”
앞선 대답과 똑같았다.
때문에 투란은 당황해서 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에, 산돌프?”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법사를 부르니, 거친 대답이 나온다.
“긴장해라. 보기에도 센 놈들을 구워 버렸다고! 구운 고기가 성벽 앞에 잔뜩 진열된 상황이다. 저것들이 파닥거리며 날 때에는 무서워 숨었던 것이라도, 저렇게 벼락불에 구워진 채라면 기어 나와서 맛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잔뜩 올 수 있어!”
“아, 네. 그래도 아직 보이는 거는 없죠?”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투란이 툴툴거리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다시 짧은 대답이 나온다.
“그래.”
벅벅, 머리를 긁고 목덜미를 잡아 기지개 켜는 시늉을 하면서 투란은 흉벽 너머로 성벅 아래를 주욱 둘러봤다.
넓게 펼쳐진 마법의 흔적, 시커멓게 탄 것부터 갈기갈기 찢어진 것…… 그 잔해를 보고 있으면 산돌프의 말처럼 방심할 기분 대신에 오싹한 긴장감이 먼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보고 있냐?
‘어, 안 보이는 게 보이네. 아니, 안 보이지만 알 수 있다고 해야 하나?’
투란은 산돌프를 흘깃하며 드라고니아에게 소리 없이 대꾸했다.
아직 산돌프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산돌프 스스로 말한 것처럼 뭔가가 구워진 몬스터의 잔해…… 사체(死體)를 야금야금 뜯어 먹고 있는 상황을!
부주의해서는 아니었다.
‘엄청 야금야금 뜯어 먹네? 뭐지?’
―구운 냄새에 이끌려 왔지만 몬스터 고기보다는 살아서 성벽을 배회하는 인간 쪽에 더 침을 흘리는 녀석들이지.
‘그런 거라면?’
―곧, 닿는다.
경고는 간단했다.
그 말대로 투란은 금방 볼 수 있었다.
멀리, 마법의 시야를 이용해 두리번거리는 산돌프가 기댄 흉벽에 어른거리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뭔가였고, 그저 보이는 저쪽 풍경에 기묘한 왜곡…… 투명한 물거품 너머를 보는 듯한 굴절(屈折)된 시야를 일으키는 것이 불쑥 튀어오르는 광경이었다.
머뭇거림 없이 투란은 한 손으로 산돌프의 목덜미를 잡고 당기면서, 다른 한 손은 너클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그 굴절을 찌르고 쨌다.
“뭐? 왜…… 흐엇!”
산돌프의 다채로운 외침이 터졌다.
동시에 흉벽과 맞닿은 허공에서 붉은 피와 살의 줄기가 뻗었다.
캬아아!
머리통이 찢어진 채로 목젖을 울리며 혀를 내미는 모습을 드러내며, 그 가죽은 온갖 색채로 변화하는 큰 도마뱀이 느릿하니 추락했다.
투란은 산돌프를 뒤로 밀며 그 앞을 막아선 채로 양손의 너클 블레이드를 모두 꺼내 휘둘러 댔다. 주먹질을 하고, 옆으로 긋는 동작에 따라 손등 위로 뻗어 나간 너클 블레이드가 다시 허공을 찢으며 핏줄기를 뿜어내게 했다.
몸통이 베이고, 허리가 잘린 짙고 검은 무늬의 갈색 도마뱀 두 머리가 흉벽을 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가 밀려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카멜 리저드다아! 카멜 리저드으!”
산돌프의 고함은 마법에 의해 확대된 채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산돌프는 그대로 마력을 모아 거칠게 뿜어냈다.
제대로 된 마법을 완성시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순수한 마력에 살짝 불의 속성만을 덧씌운 정도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제대로 드러났다.
흉벽을 넘어 성벽 아래로 불티가 먼지 티끌처럼 번졌고,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인 것이다. 불붙어 타오른 것도, 그저 엷고 붉은 불씨가 덧씌워져 형체가 드러난 것도 있었다.
풍경의 굴절을 찾으며 후려치려던 투란에게는 더욱 선명한 대상이 확보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야, 이 썩을!”
“씨! 뭐야, 이거!”
“칼 들어!”
“방패!”
“기름! 불붙여!”
욕설을 시작으로 곧 다양한 대응이 이어졌다.
도검을 들고, 창을 휘두르고, 성벽에 불붙은 기름을 넓게 펼쳐 붓고…….
그 와중에 이미 흉벽을 넘어선 몬스터, 카멜 리저드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고…… 입을 열고 이와 혀를 드러내며 바로 포식(捕食)을 시작하려 했다.
투란은 그 드러난 모습을 착실하게 기억했다.
사람만 한 크기, 짧은 네 발과 가늘고 긴 꼬리, 둥글고 넓적한 머리에 온갖 색으로 변하는 기묘한 형체…… 그러나 찌르면 찔리고, 베면 베인다. 머리를 찢고 몸통을 동강 내면 허우적거리다가 금방 죽는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칼과 방패로 맞설 수 있고, 미리 발견했다면 활로 쏴서 해결 볼 수도 있었다. 분명히 알드바인의 성벽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였다.
―너무 많아. 수로 밀릴 거다.
그러나 드라고니아가 냉정하게 판정하고 있었다.
미리 발견하지 못했고, 이미 성벽 위에서 난투를 벌인 상황이었다.
거기에 성벽에 들러붙어 올라오는 몬스터의 수는…… 성벽을 알록달록하게, 온갖 색채로 칠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두 곳도 아니고 길고 높은 알드바인의 성벽 전체가 새로운 색채를 시험 삼아 칠하기라도 한 것 같으니…….
산돌프의 지원을 받으며 주변을 정리한 투란은 멀리 둘러봤다.
장대한 난투가 가득한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새로 기어올라 오는 몬스터의 수에 밀릴 거라는 드라고니아의 말대로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야, 이대로 둘 수는…….’
뭔가 해야 한다고 투란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물러서. 상아탑의…… 홀시딘의 마법이다.
‘뭐?’
한 걸음 물러서면서 투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흉벽이 붉게 변한 채 치솟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석재(石材)로 이뤄진 흉벽은 치솟지 않았다.
그저 붉게 달아올랐고, 그렇게 달군 불길이 흉벽에 덧씌워진 채로 치솟았을 뿐이었다. 알드바인의 성벽에 불로 이뤄진 성벽이 덧씌워진 광경이었다.
북벽부에서, 남쪽의 방치해 둔 듯했던 성벽까지 모조리!
느릿했던 불길은 사나웠고, 장대(壯大)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채로 성벽을 가득 메우며 올라오던 카멜 리저드의 대군(大軍)이 불의 성벽에 갇힌 채로 타올랐고 재만 남긴 채 사라지고 있었다.
“쿨럭! 파나틱 플레임…… 진짜로 성벽에 이딴 마법을…… 정말로, 진짜로 미친 거 아냐…….”
산돌프가 내는 목소리에는 경외(敬畏)보다 공포(恐怖)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투란은 그 공포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거 헬플레임, 그거지?’
―나름대로 화력을 줄인 거기는 하다만…… 맞아, 처음 만나자마자 너한테 퍼붓던 그거다.
드라고니아가 조금 당황스러운 듯, 살짝 민망한 듯이 대답했다.
투란이 그 반응에 어이없어하면서 불길을 따라서, 남쪽 성벽 쪽을 봤다.
그쪽은 약간 색다른 풍경이 섞여 있었다.
성벽 위에서 불타는 나무토막이 몬스터를 찢고 있는 광경.
다른 구역에는 없는 그 풍경 속에 얼핏 제란드와 멜란드도 보인다?
‘아, 방어전에 참가했네…….’
시알라 남매도 나름대로 이 상황에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이런 불타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저리 티끌 같은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기에 투란은 이제 겨우 안 것이다.
‘돌아왔다고 연락도 못 했구나.’
문득 한가한 상념이 투란의 마음을 스쳐 갔다.
활활 타오르는 성벽, 불로 이뤄진 성벽을 보며 훈훈(薰薰)하게 훈제(燻製)되는 몬스터…… 낯선 카멜 리저드를 보며 투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을 느낀 드라고니아가 바로 으르렁거릴 정도로, 투란은 한가한 기분이었다.
―야, 불구경할 때냐!
‘그럼, 뭐 해?’
불에 의해 수가 늘지 못한 카멜 리저드는 성벽 곳곳에서 능숙한 베테랑의 손길에 제압당하고 있었다. 여유가 생긴 덕분에 온전하게 잡아 가죽을 벗기겠다는 큰소리까지 나올 지경이니, 딱히 도우러 갈 필요가 없다!
애초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짐승 수준의 몬스터일 뿐이니까. 완전히 드러난 채로, 수가 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알드바인을 지키는 헌터들에게 아주 적당한 사냥감일 뿐이었다.
그러니 투란에게 남은 일은 손을 툭툭 털며, 성벽에 걸린 홀시딘의 헬플레임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 아니겠는가?
가까이에서 하클이 뭔 일이든 알 바 아니라고 공구 통을 쏟아 놓고 화살을 만들며, 타크가 활대를 들고 뒤늦게 끝난 난투에 낄 자리를 찾고, 산돌프가 상위 마법의 위엄에 떨면서도 이를 가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화르르!
불꽃 속에 일그러진 채로 나타난 홀시딘의 얼굴이 투란의 한가함을 부정했다.
‘으허?’
금빛이 찰랑거리는 형체였고, 투란은 저 얼굴이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확신했다. 로열가든의 징표를 통해 저절로 알 수 있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홀시딘이 하는 말은 뭔 뜻인가 잠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되새겨 봐야 했다.
“투란, 빠져나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얼른 화장실로 가라! 똥간 말이야, 똥간! 빨리 가!”
화장실이란 한마디를 낯설어하는 투란을 꾸짖기도 하는 소리.
불 속에서 홀시딘이 왜 갑자기 저리 남몰래 말하는가?
투란은 잠시 ‘내가 헛것을 보나?’라는 생각을 했고…….
―뭐가 헛것이야! 메시지잖아, 메시지! 얼른 가 봐!
드라고니아가 성벽에 어울리지 않는 과감하고 섬뜩한 마법을 건 상아탑의 마도사 편을 들기라도 하듯이 재촉했다.
슬쩍 투란의 눈길이 주변을 훑었다.
뭔가 지금 여기서 자리를 비워도 위험은 없을 듯한데, 이런 불타는 성벽을 놔두고 어디 간다고 하기에는 많이 민망한 상황 아닌가!
―상아탑의 마스터가, 알드바이의 마스터가 멀리서 괜한 소리 하려고 저러겠냐?
드라고니아가 우물쭈물하는 투란의 태도에 다시 한번 재촉했다.
미묘한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투란은 슬쩍 중얼거림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아, 뜨거우니까 속이 뒤집히네…… 저,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산돌프는 ‘지금?’이라고 묻는 듯한 눈길을 살짝 흘렸지만 불타는 성벽이 주는 감정에 더 충실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하클은 슬슬 꾸물꾸물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투란을 보며 혀를 찼다.
“뱃속 참 편안하구나. 이럴 때 볼일이라니.”
타크가 이 소리에 투란 대신 대답한다.
“시간 날 때 빨리빨리 봐 둬야지! 아무 데서 좔좔 흘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영감처럼 잘못 만든 이상한 걸 보여 주는 것도 볼일을 제대로 안 보니까…….”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성벽의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둘러보면서 투란은 일단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다. 그렇게 성벽에서 방어전이 시작되기 전, 홀시딘에게 묻기 위해 잠깐 숨었던 곳으로 가는 투란의 의문은 느리게 커졌다.
‘불 질러 놓은 것도 홀시딘이지? 왜 갑자기…….’
멀리 떠나 있는 그랜드 마스터가 나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