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63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635)
산돌프가 일단 자리를 비웠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해도 출발 전에 필요한 준비가 있을 테니, 각자 준비한 다음에 남쪽 성벽 아래…… 보통 쓰이지 않아서 꽉 닫힌 문 아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다음이었다.
시알라가 산돌프가 비운 의자를 바라보며, 탁자 위에 차분하게 싸인 금전을 흘깃하며 투란에게 묻는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서 당장 금전 내놓으라고 한 거야?”
“반쯤은…….”
투란이 입술을 삐죽하며 대답했다.
길드의 중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고집부린다면 ‘날 못 믿어? 못 믿는구나!’라고 외치면서 몰라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금전을 남긴 채로 준비하러 간다고 훌쩍 나가버리면 그냥 모르는 척하기는 조금 어렵잖은가.
“그래서 정말로 저 마법사의 이상한 일에 나설 거야?”
이번에는 멜란드가 물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는 했지만 뭔가 수상한 낌새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결국 알게 된 것이라고는 전부 마법사가 떠든 이야기 말고는 전혀 없으니 매우 이상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는 말투이기도 했다.
투란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말한다.
“뭐, 어떻게든 될 거야. 게다가…… 여기서 반나절밖에 안 되는 거리에 악마가 남긴 뭔가가 있다는 거, 그냥 놔둘 수도 없잖아. 고블린이 땅속에서 와글거리기도 하는데 그걸 건드려서 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바로 마스터 홀시딘에게 떠넘길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악마의 유산을 지키는 몬스터가 궁금하잖아!”
말끝에 초롱초롱하니 투란의 눈이 빛났다.
시알라과 멜란드는 그 반짝거림에 눈살을 찌푸렸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다음에 시알라가 말한다.
“확실히 조금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 성벽 밖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가까운 곳에 마법사가 탐내는 뭔가가 있다는 거,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하지만 투란, 그대로 일단 홀시딘에게 연락은 해두는 게 좋지 않아?”
멜란드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보탠다.
“달랑 마법사랑 둘이 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내가 몰래 따라갈…….”
시알라의 눈길이 바로 사납게 멜란드를 향했고, 멜란드는 움찔하며 말을 흐렸다.
투란이 그런 둘의 모습에 히힛거리는데 시알라가 말한다.
“멜란드 말고, 제란드가 몰래 붙는 거는 어때?”
“어? 제란드? 왜 멜란드 말고?”
투란의 의아함에 멜란드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왜 나 말고, 제란드 형?’이라고 웅얼거렸다. 이에 시알라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제란드라면 몰래 따라가면서 들키지 않을 테니까. 여차하며 마법물품으로 위장해서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도 있으니까. 멜란드는 이래저래 크게 일 저지르기 쉽고 몰래 따라간다는 걸 잊기 쉽잖아.”
멜란드가 항의하고픈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뭐라 말은 못 했다.
투란이 그런 멜란드를 보고 다시 킥킥 웃으며 말한다.
“그렇기도 하네. 제란드라면 아주 은밀하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산돌프, 마력이 빈약하다고 놀림받기는 하지만 그저 마법을 쓸 수 있어서 마법사인 사람이 아니거든. 굉장히 영리한 마법사야. 그러니까…… 음, 그렇지! 열흘로 하자. 열흘 동안은 가만히 기다려줘. 열흘이 지나도록 내가 돌아오지 않거나 연락을 못 하면, 그 때 마스터 홀시딘에게 이야기하는 걸로 하자. 알드바인 가까이에 그런 이상한 것이 있다는 거, 알면 꽤 짜증 내려나? 암튼, 일단은 기다려줘.”
어느새 중얼중얼, 생각을 하는 것인지 말을 하는 건인지 모호해진 투란의 모습을 보며 시알라는 다시 한숨을 쉬었고 멜란드는 히죽이 웃었다. 이럴까 저럴까 생각을 망설일 때의 모습이었고, 저렇게 말을 하며 생각을 정한 다음에는 바로 움직이는 투란이었다. 그러니 말이 끝났을 때 결심도 끝난 것이다.
하루 안에 끝날 수 있다는 일을 열흘간의 여유를 두자고 한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말이니, 어설픈 결정이라 할 수도 없다.
시알라가 조용히 확인하겠다는 듯이 말한다.
“좋아. 열흘. 그래서, 이제 바로 갈 거야? 준비는?”
“어, 하클 영감님한테 가서 비품 보충 좀 하고…… 간이식량도 좀 구해야 하나?”
투란이 갸웃하며 대꾸했다.
멜란드가 말한다.
“간이식량이라면 누나가 잔뜩 쟁여놓은 거 있잖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보존(保存)용으로 만든 거, 그거 좀 챙겨가. 기한 지나면 새거 만들고 헌거 먹어야 한다며? 이럴 때 조금씩 쌓아둔 거 치우자고, 누나.”
뭔가 놀리는 듯한 낌새였지만 투란은 시알라에게 조금 놀란 소리로 묻는다.
“간이식량도 만들었어? 우와, 그거 묵었다가 길 떠나는 사람에게 팔 수 있겠네? 정말로 제대로 된 모험가의 쉼터네!”
시알라는 웃었다.
여관을 갖고 싶다고,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어떤 여관인가에 대해서 가끔 했던 몇 마디를 투란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모험가가 찾아와서 모험담을 늘어놓고, 준비된 요리를 가져가는 곳…… 모험가를 위해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는 먹을 것이 있는 풍요로운 쉼터 이야기를.
멜란드가 불쑥 보탠다.
“그런데 모험가가 안 와…….”
투란이 웃고 말았다.
시알라가 발끈한 표정과 눈길을 멜란드에게 뿜어냈지만, 이번에는 멜란드도 고집스럽게 ‘안 오잖아!’라고 웅얼거리며 반항하는 표정이었다.
투란은 남매가 아옹다옹하는 광경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럼, 하클 영감네 다녀올게. 마법사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하클의 난해한 표정을 보고 투란은 타크를 봤다.
타클란의 궁수, 타크가 왜 하클의 공방에 와 있을까?
“활 내놔! 제대로 만든 걸로 내놔! 그 화살도!”
문턱에 발을 딛자마자 투란의 의문에 대해 타크의 외침이 답하는 듯했다.
투란이 하클을 다시 보니, 난해했던 표정이 울긋불긋하니 엄청난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쪽으로 확실하게 바뀌었다. 그 표정에서 나오는 말은 한층 더 발끈한 말투였는데…….
“돈 내놔.”
그래도 타크를 공방에 난입한 도적이라기보다는 못된 손님으로 여기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돈 없어! 나중에 갚을…….”
타크가 목소리를 슬그머니 낮추면서 말하는 순간이었다.
“외상 안 받아! 돈 가져와! 돈! 은전 팔십 닢! 활과 화살! 없으면 가서 벌어와! 뭐? 활이 없어서 돈을 못 벌어? 내 알 바 아니지! 돈 없는 놈한테 넘길 물건 없어! 꺼져어어!”
하클의 우렁찬 외침이 터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투란은 잠시 갸웃했다.
‘팔십 닢?’
―너한테는 분명히 육십 닢이라 한 것 같다만?
‘미워서 더 받으려는 건가?’
문득 투란은 기억해냈다.
똑같은 물건을 놓고 사람에 따라 다른 값을 부르던 샤오 할배…… 미운 놈이랑 아닌 놈을 전혀 다르게 대하던 그 모습이랑 지금의 하클이 묘하게 겹쳐지잖는가!
물론 타크는 그런 사정 따위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너무하잖아! 나 능력 있다고, 내가 바로 타클란의…….”
“능력 있으면 가서 벌어와! 위대한 궁수가 은전 팔십 닢도 못 버나? 가서 고블린을 잡든 오우거를 잡든 트롤 콧구멍을 쑤시든! 알아서 벌어와! 내가 활 한 자루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랑 시간이 얼만데 돈 없는 놈한테 그냥 맡기란 거야! 가서 벌어와! 헛소리할 시간에 얼른 가서 벌어!”
하클의 목소리가 한층 더 우렁차게 울렸다.
타크가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투란과 살짝 부딪혔다. 하클만 보며 소리지르던 탓에 몰랐던 듯, 타크는 ‘응?’ 하며 돌아봤고 투란이 누군가 잠시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돈 좀 꿔줄래?”
“없어요.”
바로 묻는 소리에 투란은 단칼에 후려치듯 대답했다.
타크의 어깨 너머에서 하클이 눈을 부라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크에게 꿔줄 만큼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닌 데다가…… 처음 봤던 타크는 성벽에 술 취해 실려 오지 않았던가!
“다들 왜 이래! 타클란의 궁수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으면서 징징거리는 타크였다.
투란이 하클을 보니 이럴 줄은 몰랐던 듯, 그냥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투란은 대신 물었다.
“사냥 갈 생각은 없어요?”
“몬스터 사냥에 활잡이가 필요 없다잖아!”
타크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문득 투란은 눈치챘다.
타크의 활솜씨가 대단하기는 한데, 활잡이가 꼭 필요한 파티는 생각보다 드물다. 타크처럼 활솜씨가 대단한 경우보다는 대충 마구 쏴댈 상황이 대부분일 테니까, 활 쏘는 것 말고 다른 면에서 적절하게 쓸 만한가부터 따질 터였다. 즉 활솜씨는 순전히 덤으로 여길 것이 빤하다! 그러니 자신을 궁수라고 외치는 타크는 자신을 받아들일 파티를 쉽게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수 사냥이라도 해봐요. 북쪽 성벽 너머로 가면 마수 사냥의뢰도 꽤 되던데……. 뭐 굳이 마수가 아니더라고 사냥해서 고기라든가 가죽을 얻어 팔 수도 있고…….”
불쑥 투란이 한 말은 하클의 표정을 조금 색다른 방향으로 구겨지게 했다. 마치 뭐하러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물론 타크는 ‘엥?’ 하며 눈을 끔벅이는데, 전혀 생각 못 해 본 모양이었다.
“마수……? 잠깐, 짐승을 사냥해서 팔 수 있어?”
이리 묻는 모습에 투란이 오히려 맹한 표정으로 되물어야 했다.
“당연히 팔 수 있죠. 짐승가죽이라든가 고기라든가…… 아니, 왜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사냥은 영주 허락 없이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젠장, 알드바인에서는 그런 거 없었구나! 제엔장!”
타크가 머리를 쥐어 잡는 꼴을 보고 하클이 너무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너 대체 알드바인에 온 지 얼마나 된 거냐? 영주 허락이라니…….”
“삼 년 정도 되었어요. 젠장, 어쩐지 이상하더라! 사냥에 허락이 필요 없었다니! 젠장, 젠장!”
타크는 누군가를 향해 격노하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투란은 그런 타크를 보다가 하클을 흘깃했고, 하클은 혀를 차며 말한다.
“삼 년씩이나 있으면서 몰랐단 말이냐? 어느 구석 골방에 처박혀서 맨날 술만 처마시고 있기라도 했냐? 알드바인의 아무 퍼브에나 가서 귀만 기울이고 있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하하…… 하하, 그랬네요. 정말로…… 골방에 처박혀서 술만 마셨네…….”
타크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클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고, 투란은 슬쩍 한편으로 비켜서면서 지켜봤다. 이렇게 둘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겨우 느낀 듯, 타크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눈을 번뜩이는 채로 말한다.
“은전 팔십 닢, 가져오면 되는 거죠? 그 활, 화살!”
“돈 가져온 다음에 말해.”
하클이 조금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란은 그 낌새가 조금 귀찮아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았다.
타크는 가슴을 엄지로 쿡 찍으면서 외친다.
“가져올 테니 꼭 팔아요! 타클란의 궁수가 사냥에 나서면 어떤가, 제대로 알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훌렁 나가버렸다.
뭔가 휭하니 바람이 스쳐간 듯한 느낌에 투란이 맹하니 중얼거린다.
“타클란이 대체 어디야…….”
하클도 쓴웃음과 함께 대꾸한다.
“알 게 뭐냐. 한데, 넌 웬일이야?”
“음? 아, 비품이요! 성벽에서 소모한 거…… 다시 채워야 하잖아요.”
“아, 그거라면…… 여기 있다.”
투란의 말에 하클은 바로 한쪽에서 보따리 하나를 내주고 있었다.
“어라? 나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어, 이건?”
보따리를 풀며, 화살통이 하나 툭하니 먼저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보며 투란이 물었다. 한데 묻고 나서 보니 새로 준비한 화살통 여럿이랑 낯익은 칼자루, 하클의 인힐트 블레이드까지 있잖은가.
“네가 성벽에서 몬스터한테 박아놓은 거라더라. 공방 녀석들이 몬스터 해체해서 찾아다 준 거야. 나한테 정비해 너 주라고 하더군. 화살은 멀리 쏴서 회수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쨌든 천천히라도 다 찾아낼 거래. 뭐, 그 사이에 나더러 새거 보급해주라기도 했지. 성벽에서 소모한 거는 공방이랑 상아탑에서 책임지는 거니까…… 암튼 비품은 그걸로 넉넉하지?”
“예, 넉넉해요. 자, 그럼…….”
쾌활하게 대답하며 보따리를 들고 투란이 돌아서니, 하클이 갸웃하며 묻는다.
“너, 어디 가냐?”
“음? 비밀이에요!”
“그러냐…….”
하클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보름 정도면 대강 기초작업이 끝날 것 같으니까, 보름 뒤에 한번 들러봐.”
투란이 살짝 잊고 있던 것을 깨우쳐주듯 나온 말이었다.
하펠이 남겨둔 마법도구들, 그것을 이용한 하클의 작품이 슬슬 형태를 갖춘다는 말이었다. 투란이 투자를 한 덕분에!
“열흘 정도면 한번 들를 수 있을…….”
“보름 뒤에 와, 보름 넘어서!”
하클이 더 일찍 온다는 말에 바로 으르렁거렸다.
투란은 혀를 날름하며 하클의 공방을 떠났다.
이제는 마법사와 모험을 떠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