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68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685)
도적 길드의 회합.
그 모임에는 일단 의제가 깃발처럼 내걸린다.
그 의제에 따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진행 중인 일과 진행되었던 일들에 대해 평가를 하고 논의를 한다.
깃발로 내걸린 의제는 그 평가와 논의의 척도로서 활용하는 것이 기본.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의제가 중요할 수도 있고, 그냥 무시될 수도 있었다.
막상 회합이 시작되고 나서 의제는 홀랑 잊은 채로 길드의 실무(實務)를 놓고 치고받고 싸우며 다투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도적들이 모여서 제대로 된 논의를 한다는 것이 무리라서 그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회합 이야기가 새나갈 경우를 대비해서 의제라는 위장을 내건 것뿐이라는 말도 있었다.
결국 때에 따라서 의제는 중요한 토론의 주제일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이 팔랑거리는 깃발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아무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투란으로서는 멀뚱거리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 설명했던 파쿠란이 ‘어?’ 하며 투란을 멀뚱거리며 잠시 바라본 것은 아무래도 허를 찔린 탓인 듯했다. 덕분에 투란과 파쿠란은 탁자에 마주 앉은 채로 서로 잠시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꼴이었다.
그 틈새로 끼어들며 벡커드가 탁자 위에 잔을 올린 큰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자, 내 방에 왔으니 내가 아끼는 술 한 잔씩 해야지! 걱정 마, 취하지 않는 술이니까 마음 놓고 마셔도 돼! 이자닌, 여긴 내 거처라고 아까 그 방이랑 달라! 파쿠란이 마법으로 잠그기까지 했잖아, 갑자기 문 열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이자닌은 문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벡커드를 돌아보면서 혀를 차는 소리부터 냈다.
“조금 살 만한가 보네? 아예 뼈를 분질러줄 걸 그랬나.”
아까와 다른 이 방은 벡커드의 거처였고, 더 크고 넓었으며 여러 가지가 준비된 곳이었다. 침대라든가, 한쪽의 선반 가득한 술병이라든가…… 벽 한쪽을 장식한 것처럼 꾸며진 부엌이라든가!
벡커드는 납치하든 빈방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갔던 일을 접어두며 일단 이자닌과 나머지가 머물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했다. 빈방은 언제라도 퍼브를 찾은 손님에게 내줘야 하고, 들락거리는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가장 안전하고 들락이는 문이 따로 있기도 한 벡커드의 방으로 오게 된 것인데, 오자마자 벡커드가 시작한 일이 요리였다.
재료를 썰고 불을 피우고 물을 올리고 볶고 굽고 튀기고…….
요란하게 저질러놓은 그 요리가 익어가는 사이에 이렇게 술잔과 술병을 내놓은 것이다.
이를 이자닌이 거칠게 구박한 셈인데, 벡커드는 넉살 좋게 대꾸한다.
“분지르지 말라고 뇌물 쓰는 거잖아. 자자, 어서 한 잔씩 하고! 즐겁게 이야기해잖겠어? 모처럼 만났잖아! 정말 오랜만이잖아.”
잠깐 투란이 눈을 가늘게 가고 벡커드를 쳐다봤다.
파쿠란도 투란과 비슷한 눈초리를 한 채로 백커드를 보는 중이었다.
이자닌은 주먹을 쥐어 올리면서 빠득 이를 가는 소리부터 내고 말한다.
“오랜만에 옛날 기분 내서 좀 패도 되겠어?”
반쯤 일어서기도 하는 이자닌에게 파쿠란이 한숨부터 쉬고 말한다.
“이자닌, 그럴 때가 아니잖아. 여기서 머물 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길…….”
“여기가 어때서! 아무도 이자닌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할 것인데 어때서! 여기 있어, 이자닌! 내가 필요한 거는 뭐든……!”
벡커드는 재빨리 나서며 파쿠라의 말을 자른 채로 급히 외쳤다.
빠각, 이자닌의 발길질이 바로 벡커드의 정강이에 꽂혔다.
“닥치라고! 그딴 소리를 하니까 머물려다가도 딴 데로 가고 싶잖아!”
“닥치고 있을게, 여기 있어!”
눈물을 짜내는 표정으로 벡커드가 웅얼거렸다.
보고 있던 투란이 조금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슬그머니 파쿠란에게 묻는다.
“저 아저씨, 저렇게 맞으면서도 저러네요?”
“흠집도 안 나는 몸이니까. 저 정도로는 말이야.”
파쿠란도 낯을 조금 구긴 채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투란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리 기묘한 회복력을 지닌 몸을 지녔다 해도 이자닌에게 저런 구박을 받으면 기분 나빠서 뭐라 반발할 만도 한데…… 벡커드에게는 그런 반발을 할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회복력, 저 성격을 보고 이자닌도 가차 없이 밟고 패고 차고…….
“아, 저기 이자닌! 요리하는 중인데 그렇게 패면……!”
“앙? 요리? 이 미친놈이 한 걸 먹으려고, 투란?”
어느 틈엔가 벡커드를 다리 걸어 넘어뜨리고 과격하게 구타하던 이자닌이 눈을 부라리는 채로 투란의 말에 반발했다.
그 눈초리가 왠지 심상치 않아 투란이 움찔하는데, 파쿠란이 돕는 말을 한다.
“요리에 무슨 죄가 있나. 그냥 두면 식재료만 엄청나게 낭비되는 거잖아. 뭐, 여기는 풍요로운 페브라니까 그래도 되는 거라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이자닌은 으득 이를 갈면서도 다시 물러서서 의자에 앉았다.
파쿠란의 이야기가 이자닌에게 라비엔을 되새기게 했기 때문이었다.
요새도시 라비엔, 식량이 언제나 모자라서 늘 사람 잡아먹는 얘기가 맴도는 곳…… 쇳조각을 섞은 요리를 들이대는 루비가 당당하게 요리사 노릇 하는 곳! 그런 곳에서 식량의 귀하고 소중함을 뼛속까지 새겼으니 이자닌은 벡커드의 요리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
“요리 마무리 지어!”
사나운 이자닌의 목소리에 벡커드가 주섬주섬 일어나는데, 낯짝에 발자국이 찍힌 채로 코피를 주르륵 흘리는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가는 소리는 잘 들었다는 듯, 왜 이자닌이 물러서는지 안다는 듯이 재빨리 다시 요리를 마무리하러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벡커드는 몇 마디 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는데…….
“이자닌, 기대해도 좋아! 진짜 맛있는 요리라니까! 아하핫!”
누가 들어도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듬뿍 배어 있는, 신나고 즐거워서 좋아 죽는 목소리였다.
그 꼴을 보면서도 투란은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파쿠란에게 눈짓만 했다.
‘저거 저대로 둬도 괜찮은가요?’
파쿠란도 그 눈짓의 의미를 바로 간파했다는 듯이 살짝 눈짓으로 대답한다.
‘그냥 두는 게 더 낫다!’
그러면서 투란과 파쿠란이 이자닌을 보니, 이미 이자닌은 뭔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벡커드에게는 털끝만큼도 관심없는 모습!
그 와중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벡커드의 요리는 완성되었고…….
“자아, 마음껏 먹어! 아하핫, 이자닌 어서 먹어! 영양과 맛이 완벽한 이 벡커드의 요리를 어서 맛봐!”
탁자 위에 즐비하게 진열되듯이 놓였다.
한데 이 탁자의 상황이 매우 괴상했다.
투란과 파쿠란 앞에는 콩이 한 톨 달랑 담긴 스프 접시가 하나씩 놓였을 뿐이었고, 이자닌 앞으로 요리가 담기고 화려하게 꾸며진 그릇들이 올망졸망 뭉쳐 있는 것이다!
파쿠란은 ‘역시…….’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고, 투란은 콩 한 톨 말고 스프 속에 다른 것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관되게 미친놈이로군. 미녀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건가? 아니, 그래도 접시 하나 내놨으니 다른 인간을 인지(認知)는 하는 것 같은데…….
드라고니아가 어이없어 웃지도 못하겠다는 듯, 진지하게 벡커드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감정(鑑定)하고 분석(分析)하겠다며 중얼거리기까지 할 지경이었으니 투란도 가차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이자닌, 이곳은 오래 머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여기 있다가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이자닌 혼자 남는 위험한 상황이 예상돼요! 고용된 호위로서 말하겠어요! 딴 데 가죠! 조금 위험하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는 곳으로 옮겨요!”
“응?”
이자닌이 눈을 깜박이며 투란을 봤다.
매우 진지한 투란의 표정, 접시의 콩을 쿡쿡 쑤시는 포크질과 함께 진심을 가득 담아 권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농담을 하는 태도가 아니잖은가!
파쿠란이 그런 투란을 보며 ‘엥?’ 하는 소리를 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였으니 이자닌도 자신이 착각하거나 투란이 장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로 마음 한편으로 치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투란은 정말로 콩 한 톨 담긴 스프 접시를 놓고 아사(餓死)할 위기를 느낀 채로 말하고 있다! 결코 이자닌과 차별받는 이 상황을 어이없어하며 농담하는 모습이 아니다!
물론 벡커드는 투란의 말에 바로 당당하게 반박하니…….
“무슨 소리야! 콩 한 톨과 영양이 가득한 스프다! 그 정도면 일곱 낮, 일곱 밤을 거뜬히 버틸 수 있다고! 사내라면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이 또한 농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투란은 곧바로 벡커드를 향해 포크질하며 다시 반박한다.
“뭔가 음흉한 속셈이 있어요! 이 넓은 왕도에 이자닌을 혼자 떠돌게 하려는 음모에요! 나랑 파쿠란을 굶겨서 중상을 입히고 이자닌을 혼자 남겨두려는 계획일 거예요! 이자닌, 배불리 먹고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이자닌은 ‘어? 어…….’ 하며, 살짝 넋이 새나간 표정으로 투란을 봤다.
파쿠란도 묘하게 핏기 없는 낯빛으로 투란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벡커드는 강적(强敵)을 만났다는 듯이 보다 진지하게 투란에게 으르렁거린다.
“음흉하다니! 누가! 혼자라니, 이자닌이 왜 혼자야! 내가 있는데! 아니, 그 전에 먹을 것을 접시에 고이 올려 줬구만 왜 자꾸 굶주린다는 거야! 사내가 그런 근성 없는 소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 거 아냐! 이자닌 같은 미녀 앞에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다니! 너 정말 호위 맞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힘이 넘치지 않아?”
투란 또한 바로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벡커드가 아닌 이자닌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말투로 떠든다.
“들었죠?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굶기겠다잖아요. 이자닌을 혼자가 되게 해서…… 아, 어쩌면 이자닌만 잘 먹여서 어디가 팔아치울지도 몰라요! 듣자 하니 이런 왕도에서는 미녀도 사고파는 경우가 있다면서요? 미녀만 보면 눈 돌아가서 덮치는 미친놈도 있고 말이에요! 이자닌, 여기 위험해요! 안전한 곳으로 가요!”
벡커드는 이 말에 한층 더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이자닌이 손짓해서 그 입을 다물라 하는 채로 먼저 말한다.
“일리가 있네, 투란이 하는 말. 벡커드, 정말로 나를 지켜주는 마법사와 호위를 힘 못 쓰게 할 참이야? 그 되먹지 못한 근성 얘기 한번 더 하면, 모가지 잘라놓고 갈 수도 있어! 도대체, 여기가 라비엔이야? 콩 한 톨 먹으면서 근성으로 몬스터랑 싸우는 라비엔이냐고! 여기까지 와서 이딴…… 나 혼자 처먹고 나 혼자 미쳐서 싸우는 곳이 아니잖아! 이건 정말로 투란이 일리가 있잖아! 우리 편 다 굶기고 혼자 처먹는 년이라고 날 비웃는 거야? 그런 거였나? 아하, 그런 거였군! 딴 데 가는 게 좋겠어!”
나오는 이야기가 살금살금 가지를 치는가 싶더니, 이자닌은 점점 더 성난 모습이 되어 갔다.
벡커드는 반대로 점점 기죽고 처량하게 변해가는데, 그 와중에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내며 묻는다.
“이자닌, 내 편이 아니라 저 녀석 편을 드는 거야? 우리 사이에 어떻…….”
이자닌이 접시를 들어 냅다 낯짝을 후려치려 했기에 순간적으로 움찔한 벡커드의 말이 끊겼다.
하지만 접시는 어느 틈엔가 이자닌의 손에서 흘러나왔고 얌전히 다시 탁자 위에 놓였다. 덕분에 이자닌은 허공에 손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한 모습이 되었다.
파쿠란이 가만히 손을 내리는 채로 말한다.
“요리는 죄가 없어. 팰 거면 그냥 패라고. 아니, 지금 패란 소리가 아니야!”
말하는 와중에 이자닌이 주먹 쥐는 광경에 파쿠란의 말이 바뀌었다.
한숨과 함께 파쿠란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시간이 점점 아까워지고 있잖아. 그만 좀 하라고, 벡커드. 이자닌을 계속 그런 식으로 자극하면 나도…… 투란의 말대로 여기가 안전하다고 할 수가 없어. 그러면 이자닌이 여길 고른 판단이 의심받겠지. 그런 걸 원하나, 벡커드?”
“이자닌이 여길 골랐어?”
조금 전까지의 일은 홀랑 잊은 듯, 뭔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벡커드가 묻고 있었다. 핏대 세운 표정과 함께 이자닌이 곧바로 대답한다.
“후회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 되는 중이지! 벡커드 덕분에 사람 굶겨 죽이려는 미친놈 있는 곳으로 안내한 미친년이 돼 가고 있으니까.”
벡커드가 ‘그럴 리가!’ 하는 사이에 투란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한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다며요? 그러니까, 이건 이자닌의 단순한 실수! 자, 그러니까 파쿠란, 갈 수 있는 다른 곳이 어디에요? 도로 지하실로 가서 옮겨가야 해요? 아니면 그냥 여길 나가서 옮겨가요?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디죠?”
―투란, 음식에 미친놈 같다.
드라고니아가 벡커드에게 비교하듯이 중얼거렸다.
이를 깔끔하게 모르는 척하며 투란은 진지하게 파쿠란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반짝일 뿐이었다.
파쿠란은 그 눈빛에 찬성한다는 듯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자닌은 팔짱을 끼며 그 대답을 기다린다는 태도를 꾸몄다.
이럴 둘러본 벡커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툴툴거리는데…….
“겨우 사내자식들 먹을 것 때문에 이자닌이 고민하다니! 알았어! 이 근성 없는 녀석들의 배를 꽉꽉 채워줄 빵이라도 내올…….”
“제대로 된 요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여기 왕도라며! 왕도에 온 첫날이잖아! 배불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오오!”
투란이 바로 그 말을 자르면서 번뜩대는 눈빛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