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69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686)
Chapter 138. 페브라 왕도에서 Ⅲ
덜컹, 창문이 열렸다.
처음 바로 눈에 띈 풍경은 멀리 보이는 성이었다.
높고 하얀 첨탑이 성벽 너머로 몇 개씩 솟은 채로 장식된 성이었다.
그 성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즐비한 건물이 꾸미고 있는 넓은 거리, 그 미로를 통과해야 할 듯했다.
“우와, 여기가 왕도! 복잡하다!”
투란이 페브라 왕도의 풍경을 본 소감을 짧게 쏟아냈다.
“복잡……? 그렇군.”
파쿠란이 투란이 열어젖힌 창가에 살짝 몸을 기대면서, 4층의 창문 아래로 보이는 거리에 주목하다가 살짝 어이없어하는 말투로 대꾸했다.
녹색과 적색, 청색의 지붕이 뒤엉킨 물감처럼 깔린 왕도의 풍경이었고 4층보다 더 높은 건물도 자주 보이는 도시였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본 처지라면 인간의 도시가 이런 규모일 수 있다며 놀라야 할 텐데, 투란의 감상은 ‘복잡’이라는 한마디로 끝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라비엔에서 이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한 석벽의 거리를 본 탓일 수도 있고, 알드바인에서 높디높은 상아탑과 성채로 둘러친 풍경을 본 탓일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파쿠란은 그 한마디 ‘복잡하다’를 되새기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 거리의 풍경은 눈에 띄는 지붕의 색채가 뒤섞인 것보다 몇 배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연이 가득 채워진 채일 테니까.
멀리 가서 물을 것도 없이 파쿠란 자신이나 이자닌만 봐도 이 왕도에서 아주 복잡한 사연을 품게 되었잖은가.
투란은 그런 파쿠란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혹은 알 바 아니란 것처럼 주욱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꽤 높네요, 여기도. 아래로 깊은 줄만 알았는데. 여기 말고 다른 곳…… 다른 쪽도 여기랑 비슷해요? 그래서 여기나 딴 데나 상관없다는 거예요?”
파쿠란은 투란의 물음에 잠시 멀리 보며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벡커드가 관리하는 곳이니 다른 곳보다 조금이나마 낫다는 거지. 봐서 알겠지만, 일단 미녀라면 정신줄 놓잖아. 다른 녀석들보다 이자닌이 조금이나마 상대하기 편할 수밖에 없어.”
“편하게 패긴 패더군요.”
키득거리면서 투란이 대꾸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파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게 제일 큰 선택의 근거였겠지. 다른 녀석들을 그렇게 성질대로 패면 죽을 정도의 고통을 받았다고 없던 원한을 새로 만들어 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쨌든, 십여 년 이상 떠나 있다 돌아왔으니 그나마 옛날처럼 대할 수 있는 놈을 찾아온 셈이야. 그러니…… 투란, 너무 구박하지 마. 일부러 굶긴다기보다는 그냥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어느 쪽이든 심각한 문제잖아요! 굶는 채로 여기서 며칠을 버티다니! 위험해요, 그런 거!”
진지하게 투란이 반박했다.
파쿠란은 조금 핏기 없는 얼굴로 투란을 보며 대꾸해야 했다.
“해결했잖아, 그건…… 이제 제대로 요리를 내준다잖아. 저렇게 차려주기도 했고.”
“그런 말 나오기 전에 제대로 해줬어야죠! 쳇! 아, 그런데 괜찮아요? 이자닌이랑 둘만 달랑 내보내도 되겠어요?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복잡한 거리에 벡커드를 이자닌이랑 둘만 내보내다니…… 역시 좀 불안하잖아요?”
“조금 그렇기는 해.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일단 거리에서는 도적이 멋대로 설칠 수가 없으니까. 저기 보이지? 왕도의 경비병이 저런 구석까지도 순찰을 돌고 있어. 나랑 네가 나서려면 무장을 풀고 움직여야 하잖아. 물론 무장을 감춘 채로 다닐 수도 있겠지만, 저기 봐. 지나다니는 사람이 수상해 보이면 바로 붙들고 검문하잖아. 저런 거리니까, 벡커드는 이자닌의 얼굴이 드러나서 반했다고 따라붙는 놈을 걱정할 테니까 잘 지켜줄 거야.”
파쿠란이 가까운 곳을 슬쩍 턱짓하며,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투란도 더 따지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이 왕도의 사정은 투란보다 둘이 더 잘 알 테니까, 벡커드가 적의(敵意)가 없는 이상…… 지나친 호의(好意)를 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자닌을 잘 지켜서 돌아와 줄 테니까.
―안심해라, 프로브 잘 붙여놨잖아.
덤으로 드라고니아가 거리의 풍경에 한껏 관심을 둔 채로 두 기나 되는 프로브를 이자닌과 벡커드에게 붙여놓기도 했으니 투란이 더 염려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들키지 말라고, 귀찮은 일 없게 말이야.’
투란도 잔소리를 할 수 있기는 했다.
문득 파쿠란이 창가에서 물러서며 벽에 붙었다.
마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눈길을 피하는 동작이었고, 투란도 반사적으로 그 흉내를 내듯이 물러섰다. 그 와중에 아래에서 누가 보는가도 흘깃했는데, 아래에서 철컥거리는 강철 장화를 신은 채로 돌아다니는 경비병이 잠깐 고개를 들었던 것뿐이었다. 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4층 건물을 올려다볼 까닭이 없는 듯, 이 거리에서 4층 건물은 그리 희귀하지 않아서인가 고개를 높이 들어 보는 이는 없어 보였다.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요?”
불쑥 창가에 몸을 숨긴 자세로 투란이 물었다.
“아니, 버릇이야. 왠지 도적 길드에 몸담고 있다 보니 경비병을 보면 숨는 버릇이 생기더라고.”
묘하게 웃는 말투로 파쿠란이 대답했다.
“아, 그런 거예요? 그럼…… 고기나 먹죠.”
투란이 창가에서 멀어지며 방 안의 중심처럼 놓인 탁자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래쪽에서, 벡커드의 은밀한 방에서 벌어졌던 소동 끝에 결국 이자닌을 위한 특별 요리를 나눠서 얻어먹기는 했다. 하지만 투란은 곧바로 ‘배고파! 너무 적어!’를 외치며 딴 데 가자고 반쯤 생떼를 썼고, 발끈한 벡커드는 처먹고 싶은 만큼 처먹으라며 통구이를 준비해 4층의 방과 함께 내줬다.
덕분에 지금 통구이가 방의 중심에 떡하니 버틴 상황이었고, 투란은 파쿠란과 함께 이를 깨끗하게 먹어치울 셈이었다.
파쿠란도 딱히 먹는 것을 사양하지는 않으려는 듯이 일단 탁자 곁으로 오는데, 오면서 열린 창을 향해 가볍게 손짓하며 마력을 뿌려두고 있었다.
투란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보니, 파쿠란이 바로 설명한다.
“귀 좋은 녀석들이 많은 곳이라서, 창을 열어둘 때는 방비해두는 게 좋아. 이제부터 할 얘기를 누가 훔쳐 듣는 것은 너도 싫을 테니까.”
“얘기?”
투란이 갸웃했다.
고기 먹으면서 이자닌이 돌아올 때까지 놀며 기다리는 것 아니었는가?
파쿠란이 이런 투란의 낌새를 느낀 듯,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꾸미며 말한다.
“이자닌이 자리를 비워줬잖아, 벡커드까지 끌고 나갔고. 그러니 이 틈에 로열클래스의 일을 봐야지.”
“에? 아…… 왜요? 무슨 일인데요?”
투란이 눈을 끔벅이면서 물었다.
전혀 무슨 일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파쿠란은 살짝 질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놓아야 했다.
“투란, 여기 이자닌을 호위하는 일만으로 온 거 아니라고. 나랑도 할 일이 있잖아. 그래서 내가 금전 백 닢을 줬잖아! 이자닌도 부담하기는 했지만, 이자닌이 안 한다고 했어도 내가 전부 지불하겠다고 보증했잖아.”
“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먹으면서 자세하게 얘기해줘요.”
탁자 옆으로 앉아 고기에 손을 내밀며 투란이 배시시 새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파쿠란도 앉으면서 한숨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먹으면서 들어. 이전에 알드바인에서 잠깐 말했듯이…… 기억 못 해? 전부 까먹었냐! 하아…… 그래, 됐다. 어차피 내 사정을 말해야 하니, 그냥 다시 이야기하는 게 더 빠르겠네. 투란, 나는 블랙 메이지다. 수백 년 전의 블랙 메이지 바라크의 유산을 찾고 있지. 바라크에게는 검은 연금술사라는 또 다른 신분이 있고, 그 신분은 도적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니 블랙 메이지로서…… 바라크의 유산을 찾는 입장에서 블랙 메이지라면 어쩔 수 없이 도적 길드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거야. 때문에 나 이전의 선대 블랙 메이지가 도적 길드에 가입했고, 나는 그런 블랙 메이지의 후예가 되었지. 뭐, 따지자면 먼저 도적이었다가 흑마법을 배워 블랙 메이지가 된 거야. 그 순서는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바라크의 유산을 찾는다는 의무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단서의 끝자락이 가리키는 것은 상아탑의 그랜드 마스터 카티야였다. 다른 모든 단서는 거기서 의미를 잃어버렸지. 덕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저 도적 길드에 매인 블랙 메이지로서 살고 있었어. 왜냐고? 그야 상아탑에서조차 그랜드 마스터 카티야의 전승이 끊어진 채니까! 그랜드 마스터가, 카티야의 전승을 잇는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나지 않으면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어. 그래, 그런 상황인데 그랜드 마스터 홀시딘이 나타났다. 명백하게 카티야의 마법전승을 지닌 그랜드 마스터가 말이야! 그리고 로열클래스인 너와 이어져 있고, 여기 페브라에 머물고 있다. 자아, 그러니 투란. 전해달라고. 블랙 메이지의 유산을 원하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이야. 로열클래스로서, 은밀하게!”
“냠냠…… 음, 그런데 달라고 하면 바로 줄까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말 꺼내면…… 냠냠…… 마스터 홀시딘이 냉큼 가져버리지 않을까요?”
탁자에 놓인 큰 고기를 쥐고 먹으면서 투란이 물었다.
파쿠란이 빙긋 웃는 채로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에 대답한다.
“상아탑의 마도사는 손댈 수 없는 유산이다. 그리고 바라크가 자신의 유산을 카티야에게 맡긴 까닭은 붉은 눈의 미녀 마도사에게 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아탑의 마도사로서 카티야의 전승자라면 제대로 그 유산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욕심부리고 그걸 차지하겠다고 설쳐대는 얼간이라면, 카티야의 전승자가 될 리가 없어.”
“음, 냠냠…… 그래도…… 냠냠…… 마스터 홀시딘이 달란다고 그냥 줄 정도로…… 우물우물, 냠냠…… 마음씨 좋은 전승자는 아닐걸요.”
우걱거리면서 고기를 씹어 삼키며 투란이 말했다.
반쯤은 ‘오호? 그런 게 있었어? 좋아, 내가 갖도록 하지!’라고 홀시딘이 날름 블랙 메이지의 유산을 가로챌 거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또렷하게 투란에게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 낌새에 파쿠란은 미미하게 한쪽 눈가를 떨었다.
“로열클래스이면서…… 비밀을 지켜주는 상아탑의 마도사를 그렇게 못 믿냐?”
“상금 받아준다면서 냅다 튀어서는 이 먼 곳에 와 있으니까요. 그거 받은 다음이라면 아마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원하게 물을 들이켠 다음에 투란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파쿠란으로서는 갸웃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무슨 상금이기에 여기까지 와서 받아준다고 하는가.
하지만 이는 파쿠란이 당장 관심을 둘 일이 아니었다.
“달란다고 바로 주는 것도 곤란한 일이기는 해. 블랙 메이지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췄는가, 그걸 받을 만한가를 심사하는 것 또한 그랜드 마스터의 전승자가 해야 할 일이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투란이 염려할 일은 아니고, 일단 나를 소개해달라고. 로열클래스로서 말이야. 그래야 마스터 홀시딘이 진지하게 나를 평가할 테니까. 그게 내 의뢰잖아, 투란.”
“음, 그랬죠. 으흠…… 알았어요. 일단…… 조금만 더 먹고요!”
투란은 슬쩍 열린 창문 너머를 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파쿠란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더 뭐라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고요해진 파쿠란에게서 투란은 더 깊은 압박을 느꼈고, 어쩔 수 없이 두어 덩이를 더 먹고 제대로 대답을 해야 했다.
“불러줄게요. 바쁜 일 없으면…… 뭐, 있어도 틈을 내서 대답할 거에요. 아 참, 혹시 가면 같은 거 없어요? 나중에 만나서 모른 척하려면 가면이라도 하나 쓰고 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도적 길드 소속이잖아요. 왕도 경비병만큼이나 상아탑의 마법사한테도 얼굴 보여서 좋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뭐, 그럼…….”
탁탁, 손을 털면서 투란은 일단 탁자 한 귀퉁이를 비웠다.
그 빈자리에 두 손을 올리고 투란이 파쿠란의 긴장하는 모습을 보며 말을 잇는다.
“내 손 잡고 있어야 하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에요? 뭐, 그럼…… 부릅니다!”
로열 가든의 징표가 금빛을 번뜩이며 투란의 손가락에 맺혔다.
금색의 안개가 주변 풍경을 밀어내듯이 번져나갔고, 투란은 그 안개에 파쿠란의 모습도 살짝 밀려가는 것을 깨달았다. 투란이 바로 손을 뻗어 파쿠란의 손을 잡은 다음 금색 안개 안으로 당기는 시늉을 했다. 조금 움찔하면서도 파쿠란은 투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벡커드가 마련해준 4층의 방은 어느새 고요하게 금색 안개로 채워진 정원과 닮은 풍경으로 변했다.
투란이 한쪽을 봤고, 파쿠란은 그쪽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심술 난 목소리와 함께, 금빛으로 허공에 그려진 형상이 빙글 몸을 돌리면서 투란을 향했다.
“아, 또 뭐야! 며칠 잠잠하더니, 왜! 또 뭔 일을 저질렀어!”
“으흠! 이쪽은…….”
투란이 냉큼 파쿠란을 소개하려 말문을 여는데…….
“야, 이 썩을! 이 시커먼 놈은 대체 뭐야!”
금빛 홀시딘의 울컥한 외침이 먼저 터졌다.
그래도 투란은 하던 말을 재빨리 이어 쏟아낸다.
“블랙 메이지 파쿠란 씨입니다!”
파쿠란은 웃음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