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78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784)
아무것도 모르는 때와는 달랐다.
칼 데릭의 상회에서 얻은 도감을 통해 미리 많은 정보를, 찾아갈 곳에 대해서 가는 길목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나아가는 탓에 거침이 없었고 헤맴도 없는 채로 기대한 것을 보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투란은 석상으로 이뤄진 기사단을 보고 놀랐다.
아래를 향해 길고 넓게 이어진 계단 앞에 늘어선 기사단…… 그 석상은 사람이 조각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사람이었던 이들이 돌이 된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인 광경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쥐고 있는 창검(槍劍), 방패(防牌)와 머리에 얹은 투구마저도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이 비바람과 세월에 으스러진 채였다. 어쩌면 시대(時代)가 변하고 지형마저 뒤틀린 지금까지 창검이라든가 방패라든가 투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잔재가 남았다는 것이 놀랍다고 해야 옳을 듯이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녹슬고 부서진 강철장화를 휘감듯이 자란 넝쿨, 길게 치솟은 덤불은 바닥에 깔린 돌을 깨고 그 틈새에서 치솟은 듯했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짐작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 광경을 보던 투란은 문득 생각했다.
‘입고 있는 옷이나 갖고 있던 물품은 돌이 되지 않았어?’
석상들은 마치 원래 알몸이었는데 거기에 녹슬고 스러져가는 갑주를 입히고 창검, 방패를 들려준 채로 무장시킨 듯이 보였다. 낡고 헤져서 누더기 끈처럼 보이는 망토, 붉은 녹빛에 돌인지 쇠인지 애매하게 보이는 사슬끈도 나중에 걸고 입혀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메듀시아의 마력은 철저하게 산 자의 몸에 적용된다 했다. 이렇게 보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아주 분명하군.
‘그러네.’
드라고니아가 느릿하고 나직하게 꺼내는 말에 투란도 동의했다.
도감에 남겨진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고대의 기사단, 모두가 오러 윌더로 구성된 이들이었다. 미궁의 문이 깨져 쏟아져 나오는 타우루스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고, 열린 문을 봉쇄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때 문턱까지 도달한 메듀시아와 만나 뭘 어찌할 틈도 없이 모두 돌이 돼버렸고, 그 후로 이어진 긴 세월 동안 미궁의 입구를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이 자리에 남겨졌다고 했다.
‘미궁에 도전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니까, 여기 돌 된 아저씨들한테서 웬만한 거는 다 챙겨갔겠지.’
투란은 가만히 석상의 차림새를 보다가 생각했고…….
―뭔 소리냐, 그건? 너, 설마 석상이 돈주머니라도 갖고 있으면 슬쩍 가져갈 궁리라도 한 거냐?
드라고니아는 식겁(食怯)한 듯이 으르렁거렸다.
픽, 새는 웃음과 함께 투란은 느릿하니 석상 사이를 지나면서 중얼거린다.
“내 차례까지 올 리가 없지. 이런 곳에 돌 된 아저씨들한테 필요할 리가 없을 테니…… 먼저 지나간 누가 날름 집어가는 게 당연해.”
―에라, 이 흉측한 놈아!
고귀한 의도를 품고 이 자리에 섰다고 석상이 된 이들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조차 없는 듯한 투란의 말에 드라고니아가 한층 더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이에 대해 투란은 키득거리면서 일부러 그 울화를 북돋겠다는 듯이 윌 라이트의 마력을 주변으로 퍼뜨려 탐지하면서 소리 없이 말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찾아볼까아아!’
―그만해, 이 흉한…… 응?
장난이라도 못 참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리려던 드라고니아가 멈칫했다.
투란도 발을 멈추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함께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가 마력에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녹슬고 망가진 채로 흩어진 파편들 사이에서, 석상들의 발아래를 가득 메운 잡초 넝쿨 사이에서 투란이 장난으로 퍼뜨린 마력의 의지에 호응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찾아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듯, 오래 기다려왔다고 외치듯!
‘이게 뭔 일이야?’
―대체 뭐가 있길래?
함께 궁금해하는 동안에도 투란은 움직였다.
당장 눈에 띄거나 소리를 내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한없이 여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의지를 바탕으로 생성된 마력, 그 마력에 담긴 투란의 의지에 호응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었다. 가까이 오라고, 더욱 다가와서 찾아달라고.
그래서 투란이 석상 몇을 지나쳐서 ‘여기다.’라고 느낀 곳에 도달하니, 거기에는 다른 석상들과 분위기가 조금 다른 석상이 있었다. 용맹하며 도도한 표정이 돌이 된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았다고 과시하는 듯한, 다른 석상의 표정에 담긴 분통, 곤혹, 원망의 낌새가 없는 석상이었다. 자세 또한 앞으로 한 손을 내뻗고 있는 꼴이 뭔가를 잡으려는 듯 혹은 뭔가를 내던지려는 듯했다.
그 석상을 빙 돌며 살핀 투란이 두어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내밀면 닿을 자리까지 옮겨간 순간, 석상의 허리 언저리에서 허공(虛空)이 출렁이고 찢어지는 듯한 현상과 함께 검갑(劍匣)이 툭 튀어나왔다. 비어 있는 검갑은 석상의 허리를 감으며 나타난 끈에 이어져 있었다.
원래 검갑의 일부인 띠가 그 허리에 둘러진 듯했다.
동시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석상의 손이 내뻗은 방향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떨어진 것은 검이었다.
투란은 검과 검갑에 손을 내밀지 않고 열심히 눈으로만 훑었다.
녹슬지도, 비바람에 시달린 흔적도 없이 툭 튀어나온 검과 검갑에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가 알 수 없으니 괜히 손대서 험한 꼴 겪기 싫으니까.
―악마의 비술을 연구해 만들어진 왕가의 보검인가…….
드라고니아도 투란처럼 관찰만 한 것 같은데, 투란과 다르게 뭔지 아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뭐야, 저게 뭐라는 거야?’
조금 당황해서, 아예 검과 검갑과는 거리를 두면서 투란이 물었다.
잔뜩 호기심이 돋은 투란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쓴웃음 짓듯이 대답한다.
―화이트 미스트, 네가 악마의 동굴에서 얻은 검이랑 비슷한 경우란 말이다. 조금 전에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이 악마의 비술을 연구해 이뤄진 마법이고…… 아무래도 악마의 생체공방에서 나온 마도구를 사용하는 탓에 너한테 호응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다만…….
‘저건 인힐트 블레이드는 아니잖아.’
―네 팔뚝에 붙어 있는 데몬스 러그처럼 이차원 보관이 가능한 검이라고! 칼자루랑 칼날로 이어지는 문장을 봐라. 황금사자 문장인 꼴로 봐서는 왕가의 방계가 아닐까 싶어. 에아본 왕국의 방계 쪽으로 황금사자의 깃발을 사용한 경우가 있으니까. 아마 이 기사단이 그 방계에 소속된 이들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왕가의 방계 혈족이 직접 지휘하는 기사단이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제는 거의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과거가 남긴 흔적일 뿐이다.
‘그래…… 아니, 그런데 왜 윌 라이트에 호응한 거야? 내가 악마의 도구를 갖고 있어서 악마의 비술을 연구한 마법이랑 호응해? 그럴 수가 있나?’
―솔직히 그것 말고 다른 조건은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이 상황에 끼워 맞춘 막연한 추측일 뿐이기는 해. 저 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일단 쥐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만, 그냥 버리고 갈래?
‘아깝잖아. 어쩔 수 없네.’
투란은 버린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척 봐도 금은으로 무늬를 넣었고, 보석은 없어 보이지만 이상한 마법까지 걸려 있으니 일단 비싼 것이다. 그런 것을 버리고 가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탐욕스러운……!
다른 이유가 아니라 갖다 비싸게 처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투란의 생각을 알자마자 드라고니아가 한탄했다. 이에 대해 투란은 아주 당당하게, 스스로 생각해도 낯짝에 철판 두른 뻔뻔함을 들이대며 대꾸한다.
‘사냥 나온 헌터라면 당연히 사냥한 것을 가져가야지! 몬스터 로드라도 마찬가지야. 먹고 살려면…….’
―코인 백은 맡겨뒀다 쳐도, 금전을 깔고 자는 놈이 그딴 소리를 하나? 인간사회에서 너 정도면 평생 쳐놀고 먹어도 되는 부자소리 듣는다는 거, 나도 알드바인에서 보고 들어서 알거든?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철판 깐 얼굴에 망치질하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살짝 찔끔한 것처럼 눈가를 찌푸렸지만 투란은 땅에 떨궈진 검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석상이 둘렀다 해도 누군가 가지고 있는 듯한 마법의 물품보다는 맨땅에 떨어진 녀석을 편히 쥐어 올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안전하다는 묘한 생각 때문이었다. 당연히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란이 그런 생각에 따라 검갑보다 먼저 검을 집어 드니…….
치이잉.
칼자루가 진동하며 투란의 손아귀에 찰싹 안기듯이 들러붙었다.
“어머나?”
어이없어 투란이 헛소리처럼 한마디 내뱉을 때…….
―리필?
드라고니아는 검에서 발동된 마법이 뭔가 짚고 있었다.
뭐라 묻기 전에 투란은 칼자루를 쥔 손아귀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력이라든가 오러의 힘이 아니라, 순수하게 투란의 손에 담긴 근력(筋力)…… 체력(體力)이 손을 매개 삼아 새나가는 느낌이었다.
색다른 감각이라 투란이 한번 더 ‘어머나?’라는 소리를 되뇌는 사이, 검은 변화하고 있었다.
칼자루가 붉어졌고, 칼날과 맞물린 가드에서는 붉은 갈기처럼 실가닥이 돋아났고 칼날을 뿜어내는 듯한 입의 모양이 생겨났다. 송곳니가 칼날의 뿌리를 꽉 물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백금의 칼날을 바탕삼아 금빛의 무늬가 구름처럼 바람처럼 번지면서 칼끝으로 토해지는 듯했다.
동시에 칼자루 끝을 장식한 투박한 유리, 다이아몬드의 모형 삼은 듯해 보이지만 다이아몬드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불투명했던 유리 속에서 붉은 잉크가 번지며 색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 투란은 귓가에 사락거리며 뱀이 움직이는 듯한 낌새를 느꼈고, 재빠르게 그쪽으로 검을 내밀었다. 튀어오르는 뱀이라면 칼날이랑 들이박든가 하겠거니 했는데, 날아든 것은 검갑이었다.
“응?”
검갑에 검이 호응하며 투란의 손을 이끌었다.
철컹, 아주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검갑이 검을 삼키듯이 씌워졌다.
투란은 멀뚱거리며 그다음에 일어나는 색채의 변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몸에 이상이 생긴 듯한 느낌은 없었고, 한 벌인 검과 검갑이 뭘 하려는지 그냥 구경만 하는 꼴이었다.
검갑은 붉은 바탕 위로 금색의 무늬를 띄기 시작했고, 칼자루 또한 금색의 끈이 감긴 듯한 모양이 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 덜렁거리던 끈이 촘촘히 검과 검갑을 오가며 감는 꼴은 함부로 칼날이 드러나지 않도록 닫아거는 듯한 모양이었다.
―왜지? 어째서 네 손에서 검이 잃었던 마력을 보충하는 거지?
불쑥 혼란스럽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투란도 갸웃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너가 모르는데 내가 알 리가 있냐?’
대꾸는 이렇게 했지만 투란은 검이 쥐어진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검과 검갑의 상태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가를 살피는 시늉은 했다. 그러다 문득 투란은 눈가를 자극하는 뭔가를 느꼈다.
아까부터 보고 있던 칼자루의 유리 장식이었다.
붉게 물들어서 이제는 무슨 보석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히 투란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투란을 미친 아이로 부르게 했던 보석…… 칼자루의 붉게 변한 유리장식은 그 보석을 기억 속에서 들춰내고 있었다.
하지만 투란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칼자루의 박힌 보석 같은 장식은 누군가를 위한 것, 거기에 어째서인가 투란도 포함이 될 뿐이고 어린 시절의 그 붉은 보석은 오직 투란만을 위한 것.
때문에 이 검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다 해도 투란은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투란을 집착하게 하는 ‘어떤’ 것이 담겨 있지 않은 셈이었다.
‘왜지?’
새로운 의문이 투란의 마음 깊이 못 박히고 있었다.
왜 한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둔 보석을 기억나게 한 것일까?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는 느낌이 짙었다.
대체 어째서 이런 미궁 앞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인가…….
―투란, 저거 읽을 수 있지?
갑작스럽게 드라고니아가 물었다.
그 말에 겨우 투란은 검갑의 금색 무늬 위로 얄팍한 환영이 맺히는 것을 봤다.
금색 무늬는 문자가 아니었지만, 그 무늬가 비춰내는 저 흐릿한 환영은 읽을 수 있는 문자였다.
“레온하트……?”
무심결에 소리 내서 읽는 순간, 투란은 검으로부터 전해오는 색다른 느낌에 움찔했다. 문자의 환영은 그 순간에 바로 사라졌는데, 그 대신에 투란은 붉은 장식에서 풍겨나오는 달콤한 냄새가 상쾌하게 맴돌며 살갗에 문지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검의 이름이 레온하트라면…… 엥? 야, 뭐 하는 거야!
마법적인 현상에 뭐라 하려던 드라고니아가 투란이 하는 짓에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 순간에 투란은 혀를 잔뜩 내밀고, 붉게 물든 칼자루의 장식을 날름 핥는 중이었으니까!
한 번, 두 번…… 핥고 나서 투란은 붉은 보석처럼 일렁이는 장식에 금색의 무늬가 피어나는 것을 봤다. 그 무늬는 문자와 전혀 상관없지만, 투란에게는 그로부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투란을 위해 생겨났고, 투란 자신을 지적하는 듯한 무늬인 셈이었다.
푸석, 스르륵.
검갑을 둘렀던 석상이 무너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투란은 미궁의 입구를 놔두고 뭐하냐는 듯한 스테노아의 울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