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78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785)
“아니, 왜……?”
투란은 당황스러웠다.
다른 석상들도 서서히 금이 가는가 싶더니, 아주 호쾌한 파열음(破裂音)을 쩌렁쩌렁 울리면서 함께 무너지고 있잖은가!
마치 투란이 검을 빼앗아서 그렇다는 듯한 붕괴(崩壞)라니!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도 견뎌내면서 미궁 입구를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놓고서는 왜 하필 지금 저러고 다 함께 무너진단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투란을 무시한 채로 파열음의 뒤를 이어 조각난 돌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릴 뿐이었다.
투둑, 투투툭.
한데 드라고니아는 투란과 다르게 상황을 해석한 듯했다.
―검의 의무에서 해방된 탓인가 본데?
‘뭔 소리야?’
어쨌든 자신이 원인이 아니란 듯하니 살짝 안도하고 싶은 마음에 투란이 바로 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서히 징징거림의 수준을 높이는 스테노아를 느꼈기에 투란은 걸음을 느릿하니 미궁의 입구 쪽으로 디디는 중이었다.
이런 투란의 모습은 혀로 칼자루 끝의 붉은 보석 장식을 핥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보는 사람이 왠지 한숨짓게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드라고니아는 먼저 그런 투란의 자태부터 짚어야 했다.
―그건…… 대체 왜 핥은 거냐! 뭐 하는 짓이냐고, 꼴사나우니 관두라고!
‘어? 아…… 왠지 자꾸 이걸 어디다 문지르고 싶어져서, 너무 수상한데 자꾸 그러고 싶어서 맛과 냄새부터 확인해야 했어.’
어설프고 엉터리 같은 변명이라고, 소리 없이 대답하면서도 투란은 멋쩍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내던 드라고니아가 이를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라도 했는지…….
―검의 계승(繼承)인가…… 그래서 네 혓바닥에 각인(刻印)이 된 거로군.
갑자기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리 말하잖는가.
‘그래, 혀에 느껴지는 맛이…… 무슨 각인?’
엉겁결에 대꾸하던 투란이 움찔했다.
뭔가 달콤하고 상쾌한 듯한 미묘한 맛이 오래간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혀 위에 뭐가 새겨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투란은 서둘러 혀를 내밀었고, 손가락 사이에 시커먼 잉크빛이 맴돌면서 눈알이 생겨났다. 동시에 드라고니아가 전해오는 프로브의 시각 정보도 투란의 뇌리에 전해져 왔다.
어떤 눈으로 봐도 분명했다.
투란이 길게 내민 혀의 깊숙하고 넓적한 부분에 은은한 금색 무늬가 맴돌고 있었다. 그 무늬는 낯설지 않았다. 바로 지금 투란이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칼자루 끝의 장식에 나타난 것을 찍은 듯했으니까.
‘이거……?’
무슨 의미인가 투란이 생각하려 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에서 검이 사라졌다.
동시에 투란은 혀에 맺혀오는 묵직한 느낌을 알아차렸다.
금방 무게감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투란은 혓바닥에 새겨진 각인을 인지(認知)할 수 있었다. 마치 새끼손가락을 까닥이듯이 각인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각인의 효과는 대체 뭔가? 이걸 대체 뭣에 쓰란 것인가?
생각하면서 투란은 혀를 날름거렸고, 각인의 반응과 함께 검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투란의 입술 너머로, 약간의 간격을 둔 채로 검은 검갑을 두른 채로 툭 튀어나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엉겁결에 투란이 검을 받았을 때, 드라고니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손바닥이나 손목 쪽에 찍어놨어야 할 각인이군.
투란으로서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입에서 칼을 토해내지! 심지어 칼집도 채워진 채로!’라고, 의도해서 이렇게 된 척해봐야 그냥 바보일 뿐!
그래서 투란은 각인을 감각으로 더듬었고, 할 말을 간신히 찾아냈다.
‘괘, 괜찮아! 각인에서 일정거리를 두고도 뽑아낼 수 있어. 그래, 입에서 손까지 간격 정도는 충분히…….’
―꼴사나우니까 엉덩이 빼고 뒤로 걷는 짓은 그만 좀 해라!
이래저래 미궁 입구로 다가서는 뒷걸음질은 멈추지 않던 투란이었기에 움찔하는 채로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주변에 뭐가 있는가 조심해서 살피면서 미궁으로 후퇴한다는 변명을 해볼 수도 있잖은가. 물론 그런 이야기를 아예 피하는 편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한 일!
‘검의 의무가 뭐야? 계승은 또 뭐고? 아는 대로 말해줘. 미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리할 일은 정리해야지!’
드라고니아도 더 잔소리할 때가 아니라고 인정하듯, 이에 답한다.
―한 자루의 검이 기사단의 의무를 증명하고, 가호(加護)한다. 너한테 각인을 새긴 검, 레온하트가 정말로 황금사자의 문장 아래에서 만들었는가 아닌가는 명확하지 않아. 하지만 그 검의 마법은 세월을 견뎌냈고, 새로운 각인을 만들며 다른 사람…… 투란 너에게 넘겨졌을 때 석상이 모두 부숴졌잖아. 그건 검의 의무가 너에게 계승되면서 네가 검의 소유주가 되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지금 네 머릿속에는 그 검을 지닌 자로서의 의무가 낱낱이 떠올랐어야 한다는 건데…… 그 의무랑 함께 검에 담긴 사연도 같이 전해지고 말이야. 아무것도 없냐? 검을 쥐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그런 거 없어?
의문으로 매듭지는 말에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내려다봤다.
레온하트란 이름을 알려주고 혀에 각인도 남기고…… 하지만 정작 드라고니아의 말처럼 무슨 사연인가 알려준 바는 전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그 맛과 함께 살살 뇌리 한구석을 긁적이던 듯한…….
“어라?”
투란은 갑작스럽게 갸웃했다.
―왜? 뭐냐? 사소한 거라도 말해봐!
검의 사연이라도 알아차린 것 아니냐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재촉했다.
‘에, 그러니까…… 그 사연이니 뭐니 알게 해준다는 말이 머릿속을 살살 긁는다, 그런 뜻이야? 그거 느낌이 별로라서 퉁겨낸 것 같은데?’
―퉁겨내?
‘응, 그러니까 뭐가 머릿속에 달라붙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면서 퉤퉤 하면서 떨쳐냈다는 느낌? 그런 느낌만 좀 남아 있어. 굉장히 작아서 네 말 듣기 전에는 맛보다가 뒷골이 땅기는, 그런 거려니 하고 그냥 잊었는데…….’
―그렇군. 정신 간섭이라서 몬스터 로드의 힘이 방어해낸 거로군.
‘뭐? 정신 간섭? 야, 그건…….’
―검의 의무를 계승시킨다는 것은 그냥 지식으로서, 정보로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을 남긴다는 뜻이 아니야. 의무를 동기(動機)로 새겨넣고, 앞으로의 언행(言行)이 거기에 따르도록 유도하는 힘을 새겨넣는다는 뜻이다. 몬스터 로드가 몬스터 에센스를 삼키고 그 본능과 자기 의지를 헷갈려하는 것처럼, 검의 의무를 계승한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의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몬스터 로드인 너에게는 느낌이 좋지 않았을 테지. 게다가…… 오랜 세월 소모해온 검의 마력으로는 너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을 거고…… 아니, 그런데 왜 네 손에서 검이 마력을 회복한 거냐? 어째서 리필이 된 거지?
한창 설명해주다가 울컥한 것처럼 자신이 풀지 못하는 의문에 대해서 으르렁거리는 드라고니아였다. 물론 투란에게는 그 의문을 풀어줄 답이 없었다. 그리고 검에 얽힌 의혹을 푸는 것은 지금 할 일도 아니었다.
‘이 검, 레온하트란 이름도 있고 문장도 새겨져 있으니까 도감에서 찾아보든가 하면 되겠지. 도감에 없으면, 상아탑의 대마법사이신 마스터 홀시딘에게 물어보든가 하고 말이야. 이런 검 보면 홀시딘이 굉장히 좋아하지 않을까? 살살 꼬드겨서 돈 받고 보여줄까? 아니, 내기라도 걸고 보여줄까? 히힛.’
슬쩍 홀시딘을 추켜올리다가 곧바로 장난칠 궁리를 하는 투란이었다.
드라고니아는 한숨도 포기했다는 듯, 그냥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그리 뒷걸음질 치면 계단에서 거꾸로 구를 수가 있다는 거, 알고는 있는 거냐? 검 휘두를 생각 없으면 치우고 똑바로 내려가라고. 아무래도 분위기 이상해 보이니까 말이야.
‘어, 알았어.’
투란은 검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검은 굳이 혀에 닿지 않았음에도 투란의 의지를 따른다는 듯, 금방 사라졌다.
빈손이 된 투란은 몸을 돌렸고, 스테노아의 징징거림이 잦아든 것을 느끼며 미궁의 입구를 바라봤다.
얼핏 봐도 폭이 6, 7미터는 되는 채로 아래를 향해 길게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고 뚜껑처럼 그 계단 옆으로 세워진 기둥에 얹어진 지붕도 보였다. 지붕은 금이 가고 구멍이 좀 뚫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입구 위를 가리는 중이었다. 지탱하는 기둥을 몇 대치면 지붕이 그대로 내려앉아 계단을 가릴 듯했지만, 깊이 내려가는 계단에 그 파편이 굴러 들어가면서 완전히 가리는 일은 없을 듯이 보였다.
넓은 계단에 발을 디디면서 투란은 미궁에 대해 도감을 통해 얻은 정보를 되뇌었다. 이 계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꺾이는데, 미궁 안에 들어서기 전에는 꺾이는 계단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했다. 시력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미궁이 품고 있는 기괴한 영향력 때문이라 했다. 그 말대로 완전히 계단을 밟고 서자, 투란은 저 아래편에 벽이 보였다. 옆으로 꺾이는 첫 번째 계단참인데, 거기 도달하기 전에는 왼쪽으로 꺾이는지 오른쪽으로 꺾이는지 눈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미궁 1층이…… 계단 아래 첫 번째 층이 지상에서 대충 이십 미터 정도 아래에서 시작된다고 했었지?’
―그래, 빛이 닿지 못하는 어둠의 시작이 계단 끝에서 바로 기다린다 했어.
‘근데 밖에서는 뭔 일이야?’
투란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미궁 입구에서 새로 벌어지는 미묘한 낌새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 서면서 바로 적용되는 듯한 미궁의 영향력에 감각이 둔해지는 듯했지만, 조금 전까지 석상이 서 있다가 무너진 자리에 몰려온 녀석들이 끽끽 쉭쉭거리면서 땅을 밟고 긁는 듯한 소란스러움은 충분히 알 수 있는 탓이었다.
―남겨둔 프로브의 보고에 따르면, 주변이 타우루스나 라미아 무리가 누가 죽으려고 미궁 안에 발을 들여놨나 아주 궁금해하는 모양이다만.
‘멋대로 타우루스나 라미아의 속내를 짐작해서 떠들지 말라고!’
―달리 해석할 방법이라도 있냐?
‘시꺼요!’
투란은 투덜거렸다.
드라고니아가 타우루스니 라미아니 하며 꺼낸 말은 투란이라면 했을 듯한 짓을 놀리면서 짚은 것뿐이었다. 달리 해석해봐야 구경하러 와서 기웃거린다는 녀석들의 행태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 닥치고 미궁으로의 첫걸음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계단참에 도달하니, 오른편은 막혔고 왼편은 아래를 향해 여전히 넓은 계단을 주욱 펼쳐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번째 계단참의 앞을 막는 벽이 보이지도 않았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은 두 번째 계단의 상단부, 첫 번째 계단참 언저리만 살짝 닿을 뿐이지 저 아래로는 전혀 그 광채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감에 나온 대로네.’
―그래, 두 번 꺾이고 나면 암흑뿐이라 했지. 어쩔래? 라이트 마법? 아니면 몬스터의 시각을 이용해서 볼래?
드라고니아가 어둠을 밝힐 수단에 대해 짚고 있었다.
투란은 잠시 멈춰 선 채로 고민했다.
이전에 미궁에 도전했던 이들은 기름 먹인 횃불과 함께 마법의 등불 또한 준비했었다. 인간이 시각을 통해 얻는 정보량은 다른 감각으로 얻는 것보다 훨씬 방대했고, 시각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었다.
몬스터 로드라 해도 특별한 감각을 획득한 바가 없다면 먼저 눈으로 보고 확인하지, 눈 감고 귀로 듣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시커먼 곳에 불빛 비추는 소동은 나중으로 미루자.’
결정과 함께 투란의 눈가, 이마와 볼로 시커먼 잉크 빛이 번져갔다.
동시에 어깨와 등, 목과 허리, 다리를 두르면서 띠를 그리듯이 번지기도 했다.
그 잉크 속에서 자잘한 두드러기가 돋는 듯한 순간,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공유해서 넘겨주는 광대한 시각에 감탄했다.
―참으로…… 쓸데없이 대단하구만.
‘야!’
그냥 좋다 하면 될 것을,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임에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어느 방향이든 간에 단숨에 간파할 수 있는 눈알을 온갖 크기로 형성했고 그중에는 빛을 꺼리는 디퍼 다크 리저드의 눈알, 숲의 어둠 속에서만 서식하는 다람쥐의 눈알, 뿔수리의 눈알과 드레이크의 눈알도 있었다.
그 다양한 눈알의 다채로운 시각을 통해 투란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풍경이 흑백(黑白)의 농도에 따라 그려지는 듯한 광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주로 리저드와 다람쥐의 시각이었고, 빛의 영역이 극단적으로 축소된 탓에 뿔수리의 시각에는 크게 포착되는 부분이 없었다. 그나마 드레이크의 눈동자는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섰다는 것을 자랑하듯, 상당히 밝게 어둠을 관통해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 폭넓은 시야에 대해 도대체 뭐가 쓸데없다는 것인가!
―이대로 메듀시아랑 마주치면, 너 바로 돌 되는 거 알고는 있는 거지?
드리고니아는 심드렁하니, 하지만 분명하게 투란의 불만 가득한 한마디를 짓밟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 투란이 스테노아의 눈알을 형성하지 않은 것을 바로 짚는 셈이었다.
‘알아, 안다고! 특별해서 잠깐 늦게 나오는 것뿐이라고!’
투란이 씩씩거리면서 거칠게 대꾸하는 사이에 눈가와 이마, 어깨와 등, 팔 곳곳에 실로 꿰맨 듯한 눈덩이가 나타났다.
―제대로 기능하기는 하는 거냐?
드라고니아는 여전히 스테노아의 눈이 지금 투란의 몸으로 제 성능을 발휘하는가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뭔가 놀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진심으로!
‘아, 걱정 말라니까!’
투란은 당당하게 외치면서 두 번째 계단참, 어둠이 제대로 시작되는 곳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내려갔다. 그렇게 미궁 속으로 퍼져가는 발걸음 소리는 왠지 축축하고 음산한 메아리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