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1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09)
통, 통, 팅, 팅.
암철의 벽을 두드리면서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기둥처럼 수 킬로미터라고 파악해낸 미궁 한 층의 중심에 자리한 암철벽은 암석(巖石)의 통로에 감긴 듯했다. 타우루스나 라미아, 왕자와 공주라는 몬스터의 괴력 앞에 부서지는 암석의 벽으로 이뤄진 통로에 우뚝 선 채로 암철벽이 단절을 선언하는 듯한 자태였다.
네 면 철벽의 아래를 테두리처럼 둘러싸듯 파인 홈이 길게 이어져 가는 해자(垓字) 노릇을 하고 있었고, 불규칙하게 군데군데 뚫린 구멍으로 혼탁한 거품이 간혹 밀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안 나오려나? 아니, 나와도 제대로 뱀이 안 되려나?’
손안에서 녹아내리다가 흘러가 버린 뱀, 다크림보랑 꼭 닮았던 형체를 떠올리면서 투란은 갸웃했다. 스테노아의 눈과 마주치던 눈을 지닌 뱀이지만 뱀이 아닌 것은 더 이상 암철벽 너머로 나올 일이 없다는 것인지, 흔적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녹아내린 거품만 뭉글뭉글 나오다가 푹푹 꺼질 뿐이었다.
투란의 눈길은 암석의 벽 쪽으로 향했다.
암철벽과 둔 간격을 통로로 삼는 암석벽, 상당히 두꺼워서 웬만큼 두드려서는 으깨져 패여도 뚫리지는 않는 바위의 벽은 마그마 로드의 결정으로 이뤄진 주먹질과 발길질, 거기에 휘감은 사나운 소용돌이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펑펑 뚫렸고 그 구멍으로 투란은 여기에 직진해서 도착했다.
‘왜 내가 나온 구멍이 안 보이냐?’
그런데 한 바퀴 돌다 보니 뚫어놓은 구멍이 없잖은가.
드라고니아가 심드렁하니 대답한다.
―느끼고 있었잖아. 석벽이 몇 곳이 움직이면서 통로가 막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것 말이야. 조금 전에도 뚫고 나온 벽들이 모두 위치를 바꾸면서 가라앉고 치솟으며 메워졌다.
‘그냥 타우루스가 덩치 좋다고 바위밀기 하는 거 아니었어?’
―타우루스나 라미아는 그 큰 체격으로 열심히 피해 다니던데?
‘대체 뭐야, 여긴 왜 또 위랑 이렇게 달라!’
살짝 짜증을 내며 투란은 다시 암철벽에 눈길을 줬다.
드라고니아도 짜증 어린 투덜거림은 들은 적 없다는 듯 말한다.
―이 암철벽, 거의 기둥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위랑 연결되어 있어. 여기에 내포된 마법은 위랑 거의 비슷한 분위기야. 읽을 수 있겠어?
‘해봐야지, 뭐…….’
툴툴거리며 불평하듯 대꾸했지만 투란도 느끼고 있었다.
이 암철벽 안에 담긴 마력, 그 밀도와 크기는 환마 넷이 미쳐 날뛰던 위층보다 더 짙고 거대하다는 것…… 보다 엄청난 마법이 이 암철벽에 깃들어 있고, 그 마법과 무관해 보이는 암석벽의 움직임에 은근히 관여하고 있다는 것.
그나마 프로브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에 투란은 거의 단숨에 이곳을 찾아내서 직진으로 돌파해 온 것이지, 프로브 없이 헤매고 있었다면 미궁이 왜 미궁인가를 3미터짜리 타우루스 왕자와 거의 30미터에 달하는 몸길이를 지닌 라미아 공주와 난투를 벌이면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터였다. 아주 잠깐만 생각해봐도 몬스터를 압도할 수 있다 해도, 이 미궁은 단지 미로만으로도 사람을 가두고 죽일 수 있는 곳이 분명했다.
스테노아의 부글거리는 본능을 잠시 가라앉히며 투란은 다시 선명하게 하피의 여왕의 눈매를 형성했다. 더불어 이마 위로 검은 가죽과 눈구멍이 생겨나게 했고, 그 눈구멍 사이의 위쪽으로 스테노아의 눈을 외눈박이처럼 띄워놓기도 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어깨와 목덜미, 등 쪽으로도 스테노아의 눈에 황금모피와 고르곤 아이까지 갖추며 보다 다양한 풍경을 볼 준비를 마친 다음에야 투란은 본격적으로 암철벽의 마법을 ‘읽기’ 시작했다.
그 통찰은 단숨에 투란의 마음에 울려퍼졌다.
‘안 열려?’
―허, 아예 열 생각이 없이 만든 거잖아!
몬스터 로드의 권능(權能)이 집약해낸 통찰을 전해 받은 드라고니아가 곧바로 자기 나름대로 분석을 하는가 싶더니, 투란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잠시 투란은 암철벽 아래의 조그마한 해자, 패인 끈 같은 홈을 바라봤다.
다시 자세히 봐도 그 홈과 이어진 바닥의 일부 또한 암철이었다.
즉, 암석 바닥을 뚫고 철벽을 지나 건너가는 것 또한 막아놓았다는 것.
―거품이나 뱀이 아니면 지나가지도 못하게 해놨다는 건가, 대체 안에 뭘 둔 거지? 설마 메듀시아를 그렇게 가둬놨을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드라고니아가 혼란스러워서 하는 말은 투란의 마음 한편을 욱신거리게 했다.
투란이 그 욱신거림을 더듬어보니 고르고니아 세 자매의 맏이, 스테노아의 본능에 각인된 고통이 뭉클거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그럴 일이 있었나 본데. 얘, 기억을 온전하게 전해주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들어가 봐야겠어. 어떻게든.’
숨을 고르며 투란은 다시 암철벽을 한 면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마법이 구성은 대강 파악했지만, 안팎을 완전히 갈라놓고 위로부터 전해오는 거대한 마력으로 잠가놨다는 것만 분명했다. 네 면의 암철벽마다 또 다른 뭔가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한번 더 돌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통찰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역시 이 암철벽은 안팎을 단절로 끝장내겠다는 듯이 막아놓은 것이고, 깃들어 있는 마법도 그럴 목적을 철저하게 과시하는 밀도와 마력의 강도(强度)를 자랑하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뚫기 힘든 암철이란 소재를 아예 마법으로 덧씌워 보호한 셈이었다.
‘이쯤 되면…… 저 구멍 대체 왜 뚫어놨나가 이상하네.’
투란은 저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면서 새로운 의혹을 짚었다.
드라고니아도 동감해서 말한다.
―구조상으로 보건대, 걸러내려는 목적이 아닌가 싶다.
‘어? 걸러내?’
―안에 있는 것이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말이야. 마법구성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프로브도 몇 센티 들어가질 못하는 구멍이다만, 보이는 것만 놓고 보건대 특정한 요소가 밖으로 새나오지 않게 걸러내는…… 말하자면 하수구의 수채망 같은 역할 말이야.
‘그거, 들어가는 것도 걸러서 들여보내려나?’
―글쎄? 그건 전혀 짐작이 안 되는데? 아마 안팎을 차단한 꼴로 봐서는 그럴 것 같기도 하다만……? 투란?
잠깐 침묵에 빠진 듯, 투란은 쪼그리고 앉아 홈 사이의 구멍을 노려봤다.
오롯하니 잠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투란이 입술을 삐죽이다가 손가락 끝으로 구멍을 쑤시면서 말한다
“되든 안 되든, 해봐야지.”
―투란? 뭘……?
강대한 몬스터의 형상을 사람의 몸뚱어리에 압축시켜놓은 듯한 괴이한 몰골로 하는 짓이 쪼그려 앉은 채로 구멍에 손가락 넣고 긁적이는 일이었기에 드라고니아는 그 어색함을 치우려는 듯이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름은 곧 잦아들었고,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뭘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며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끝이 은근히 길어지면서, 구멍 안으로 꼬물꼬물 기어 들어가는 느린 듯하면서도 재빠른 ‘악마의 심장’ 줄기가 드러나는 중이었다. 마그마 로드의 결정을 껍질에 덧씌우고, 이것저것 강화시킨 풀뿌리 같은 줄기에는 눈알도 새초롬하게 마디마다 살짝 하나둘씩 맺힌 채였다.
그렇게 투란이 구멍 안을 기어 들어가 살펴본 결과…….
꼬불거리며 길었다.
구멍 안은 작은 벌레를 헤매게 할 목적이란 듯이 좁고 촘촘하게 엮인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작은 것이 기어 들어온다 해서 바로 직진해 철벽 안을 보는 짓 따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때문에 시커먼 풀뿌리는 눈알마다 새 눈을 틔워서 벌레를 위한 미로를 채우고 갈라지며 꾸역꾸역 밀고 나가야 했다. 이는 미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을 쏟아부어 전부 채워버리면 알아서 물길이 열린다는 듯한 짓이었지만, 아주 잘 먹혀들었다.
결국 풀뿌리의 끝자락이 철벽 너머에 닿았다.
풀뿌리 끝에서 냉큼 열매처럼 눈알이 맺혀졌다.
‘엑? 저건 뭐야?’
투란은 낯설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흠칫했다.
투란과 함께 그 광경을 공유해서 본 드라고니아는 벼락처럼 외치는 중이었다.
―메듀시아야! 함부로 보지 마! 투란, 돌 된단 말이다!
반사적으로 황금모피의 생체파동을 두르면서 투란은 다시 한번 저 괴이한 풍경에 주의를 기울였다.
풍경은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처음 본 그대로, 거대한 덩어리였다.
무수한 뱀과 무수한 거품이 뒤섞인, 아주 괴상망측한 덩어리가 암철벽 안쪽 중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거품이 툭툭 떨어지고 흐르거나, 뱀 한둘이 밀려나서 뚝뚝 떨어진 다음에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철벽 아래 구멍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빈 구멍에서는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듯한 거품이 풍풍 쏟아져 나와 다시 덩어리 쪽으로 꾸물거리며 흘러가는 것이 괴상했다.
이 광경은 높낮이에 따른 흐름과는 전혀 다르게, 바닥에 맺히고 엉긴 뱀과 거품이 멋대로 이리저리 꿈틀거리며 덩어리에 붙었다가 철벽의 구멍으로 빠져들었다가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딜 다시 봐도 투란에게 고르고니아의 자태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진짜로 저것이 메듀시아인가?
세 자매라더니, 그냥 뱀들이 뒤엉킨 덩어리의 어딜 봐도 자매란 말은 나올 리가 없어 보이는데?
―몸의 일부, 그니까 머리카락이 온통 뱀이고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 메듀시아의 모습이라고 했어! 스테노아랑 호응도 했고 하니까, 저것이 메듀시아가 맞을 거란 말이다.
약간 자신감이 떨어져 나간 말투로 드라고니아가 말하고 있었다.
투란은 이런 드라고니아를 조금 더 보채고 윽박질러서 ‘사실대로 말해!’라고 하고 닦달하는 장난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 전에 몇 배로 더 강렬해진 스테노아의 본능을 달래기부터 해야 했다.
저 덩어리에 투란의 의혹을 느낀 사이, 스테노아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포효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저 덩어리를 움켜쥐는…… 끌어안고 싶어 하는 처절한 울부짖음이 투란의 마음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투란은 일단 저쪽에 닿은 풀뿌리를 더 부풀리고 엮어서 키우려 하는데, 등짝을 힘차게 두들겨 오는 뭔가가 있었다. 등짝에 이어 뒤통수도 장렬하게 갈겨주는 덕분에 투란은 스테노아의 본능 탓에 철벽 너머에만 관심이 몰입되어 정작 철벽 밖에 있는 자신의 상황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야, 이건 좀 미리 알려달라고!”
―뒤통수에 눈 단 채로 못 봤다는 말을 하려는 거냐?
드라고니아는 저쪽에 집중하느라 보고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더불어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는 타우루스의 도끼질에 뭘 새삼 신경 쓰느냐고 핀잔이라도 주는 듯한 말투였다.
‘너 왜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
투덜거리면서도 투란은 쪼그리고 앉은 몸을 일으켜 다가와 양손도끼를 질풍처럼 휘두르며 마구 두들기는 타우루스에 상대하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발목에서부터 시커먼 잉크를 괄괄 쏟아냈고, 거기서부터 치솟는 칼날 같은 촉수로 찾아온 타우루스 왕자룰 묶고 도륙(屠戮)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면 확실히 죽는가 알았기에 목을 치고 심장을 뚫어놓는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했는데, 그런 투란을 향해 새로운 괴성을 들려주며 달려드는 타우루스가 또 있었다. 역시나 3미터가량의 몸집을 자랑하는 프린스였고, 두 손에 한 자루씩 거대한 외날 도끼를 들고 날렵하게 휘둘러 연타로 투란을 두드리려 하고 있었다.
‘뭐야, 얘네들 지금……?’
―어, 줄 서서 덤빌 모양이네.
그 낌새가 괴이해서 투란이 조금 더 넓게 주변을 둘러보니, 드라고니아가 확실하게 살피고 알려줬다. 암철벽 주변으로 타우루스가 몰려들었고, 왕자급인 녀석들이 암석벽의 틈새로 한 마리씩 뛰어 들어와 투란을 공격할 준비를 마친 채였다.
그 덤이라는 듯, 라미아들은 그런 타우루스들의 다음을 잇겠다는 듯이 멀찍이서 긴 몸을 늘어뜨린 채로 대기 중이었다.
여태 따로 놀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와 분위기…….
까앙, 깡, 깡, 까강.
뒤통수에서 정수리까지 연타로 후려치는 도끼질에 머리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던 투란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결정을 내렸다.
“이것들이 지금 사람을 뭘로 보고! 가만히 놔두니까 내가 너네 먹을 걸로 보이냐! 이 소대가리들이 진짜!”
일단 ‘나, 지금 화났어!’란 외침부터 터뜨린 다음, 투란은 암철벽을 감싼 통로를 가득 채우는 시커먼 잉크를 뿌려냈다. 그 번져간 잉크 속에서 작은 파문과 함께 ‘절규하는 마물’들이 솟구쳐 올랐다.
어스름한 횃불의 그림자가 허공에 맺힌 듯, 가늘고 검은 거미줄이 통로를 가득 메우며 너울거렸다. 거기에 걸린 타우루스는 순식간에 동강 나며 시커먼 잉크 위에 붉은 핏물을 떨궜고 번져가는 핏빛 속에서 투명하게 으스러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환경을 꾸미고, 투란은 철벽 안에 관심을 집중했다.
철벽 밖은 이제 ‘악마의 심장’이 맺어놓은 ‘투란’으로도 충분하므로!
‘어디 보자, 역시 끌어안으려면…….’
어느새 철벽 안이 풀뿌리는 거의 사람의 크기로 부풀어 오른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