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1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12)
저 멀리까지 훤히 열린 공간은 도저히 미궁이라 볼 수 없었다.
천장에 그려진 거대한 무늬는 태양, 달, 별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모양에 걸맞게 광원(光源) 노릇까지 하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밝혀진 풍경을 보는 것이 매우 쉽기는 했지만…… 한층 더 낯설고 이상한 곳이라는 감상은 더 깊이 투란의 가슴에 파고드는 중이었다.
‘설명 좀 해봐.’
투란은 먼저 자신이 빠져나온 곳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장까지 이십여 미터는 솟은 듯한 기둥의 아래, 거기 투란이 나온 구멍이 휑하니 문짝 없는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런 기둥은 저 먼 곳에 셋 정도가 더 보였다.
―춤추는 산맥에서 요즘 보기 힘든 건축물이야. 고대 육 왕국 내에서는 거의 없는 것이 이런 곳이지.
‘목적이 뭐라고? 투기장? 도박하는 곳?’
―대련하는 곳이다. 목숨을 걸 때도 있는 위험한 대련을 저 아래 중심지에서 하고, 다른 이들은 높은 층의 자리에서 지켜보는 거지.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말하는 곳, 지름이 얼핏 봐도 백여 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원형의 마당을 내려다봤다. 계단처럼 원주형태로 저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자리 중에서도 거의 맨 끝줄이라 제일 높다 할 곳이 투란이 선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저 원형의 매끈한 땅에 평범한 사람이 서 있으면 개미처럼 보일 듯했다.
‘저기서, 여기 구경꾼들이 둘러선 채로 내려다보는 상황에서 싸운다고? 왜?’
싸움 구경하고 싶으면 몬스터 둥지로 가서 날뛰면 될 일 아닌가?
투란은 자신의 생각은 매우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을 확인하면서 갸웃했다.
―적당히 싸울 상대가 없는 경우에 서로 겨뤄보는 기사들 얘기 못 들어 봤냐?
‘그 얘기는…… 아, 여기가 그 훈련용 연무장이란 말이야? 흐흠, 꽤 넓어서 몇 십 명은 확실히 마음 놓고 칼질할 수 있겠네.’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투란이 고개를 까닥거리려 할 때, 드라고니아가 울컥한 듯 버럭 외친다.
―그런 거 말고! 싸움 붙여놓고 구경하면서 내기도 하는 그런 곳이라고! 몬스터가 넘쳐나는 춤추는 산맥 안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여길 벗어나면 나름대로 이런 구경거리를 꾸며놓은 곳이 많단 말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말이야!
‘내기? 싸움 붙여놓고?’
문득 투란은 치고받고 싸우는 헌터들 주변에서 ‘누가 이길까?’ ‘쟤가 이기는 데 은전 두 닢!’ 이러면서 떠들던 다른 헌터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것을 몇 백 배로 확대하면 대강 이런 투기장이란 곳이 이뤄질 듯하기는 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여흥을 위해서 이런 거대한 것을 굳이 지을 필요가 있는가?
‘뭔 낭비야. 황금 벽까지 세워놓고…….’
멀리 보이는 한편, 투란에게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천장을 쪼개듯이 세워져 바닥도 쪼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툭 불거진 황금의 모서리가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투기장의 독특한…….
―아냐! 저건 투기장의 일부가 아니라고!
드라고니아가 바로 발끈하면서 투란이 상상을 부정했다.
낯을 구기면서, 몸에 깃든 형상을 정리하면서 투란은 다시 자신이 선 곳…… 미궁의 아래에 있지만 전혀 미궁 같지 않은 투기장을 둘러봤다.
간단히 이 풍경을 정리하면, 수백 미터의 지름을 지닌 원형의 바구니에 기둥 넷을 꽂아놓고 한편은 허물어서 불쑥 튀어나온 황금의 모서리를 지닌 한 쌍의 벽을 불거지게 한 괴상한 꼴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미궁만큼 거대하고 두툼한 황금 도끼로 저리 내리찍어놓은 듯도 보였고…… 전체적으로 여기저기 많이 부서진 채였다. 거기에 몬스터의 석상이 으깨지거나 온전하게 늘어진 풍경…… 돌로 된 타우루스가 부서진 채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데다가 여기저기 라미아의 형체도 돌이 되어 부서진 채로 끼어 있으니, 더욱 괴상한 광경이었다.
설마 타우루스나 라미아가 둘러앉아 구경하며 내기를 했을까?
그러다가 노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난 메듀시아게게 모조리 돌이 되고 만 것인가?
그러면 돌이 된 저 녀석들을 뭉개고 부순 것은 또 누구인가?
문득 투란은 부서진 석상들과 다르게 꽤 멀쩡하게, 투기장의 무대 한편을 허물고 자기 자리를 만든 채로 눌러앉은 듯한 타우루스를 봤다. 황금 벽의 반대편이었고, 꽤 거리가 있음에도 듬직하고 크게 보이는 상황이었으니, 저 타우루스는 꽤 커다란 체격이란 것을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타우루스를 보는 사이에 투란은 메듀시아가 미묘한 아쉬움을 흘려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저 타우루스를, 석상이 된 커다란 저 녀석과 그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는 라미아를 안다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투란으로서는 메듀시아가 삼켜진 상태에서도 본래의 기억을 상당히 간직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저 타우루스가 한 손에 쥐고 있는 검은 갈고리 창만큼이나 희한한 놈이란 것도 알아차렸다.
아주 느긋하게 앉아서 돌이 된 놈이니까.
투기장의 구경꾼 노릇을 하다가 놀라 도망치려는 모습으로 돌이 되었다가 부서진 타우루스 무리와는 완연히 다른 자태인 셈이었다. 더불어 그 어깨에 머리를 울린 라미아 역시…….
투란은 호기심을 느꼈고 바로 뛰어올랐다.
바람의 부추김을 받은 듯한 가벼운 활강과 함께 원형 투기장의 난해(難解)한 잔해(殘骸)를 둘러보고 날아서 그 묘한 타우루스 앞에 내려선 다음, 투란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 기괴한 분위기에 놀랐다.
앉은 채였지만 이 타우루스의 체격이 일어서면 바로 6, 7미터…… 거의 키클롭스랑 비슷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고, 멀리서 봤던 검은 갈고리가 사실은 도끼날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 어깨에 머리를 얹은 라미아가 실은 타우루스의 몸 안팎을 드나드는 것처럼 뱀의 몸이 타우루스의 크고 굵은 몸에 엉겨 붙은 것도 괴이(怪異)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킹 타우루스로군…… 저 라미아는…… 적어도 퀸 라미아라 봐야겠어.
드라고니아는 정체불명의 석상, 뭔가 뒤섞인 것이 메듀시아의 눈빛에 돌이 되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엄청난 실력의 조각가가 돌을 깎아 만든 것이라는 편이 더 납득이 가는 형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투란은 갸웃하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설마…….”
저절로 입가에서 새나오는 목소리가 투란 스스로를 움찔하게 했다.
―뭐? 왜?
갑작스럽게 심각해지는 투란의 분위기를 느낀 듯, 드라고니아가 바로 캐묻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스윽 둘러보는 프로브의 움직임이 투란에게 바로 전해져 왔다.
―뭐야, 이 창…… 아니, 도끼 이거 설마 블랙리버였던 거야?
투란과 전혀 다른 것을 알아차린 듯이 놀라는 드라고니아였다.
‘뭔 소리야?’
어깨를 떨구며 투란이 묻고 말았다.
어째서 똑같이 보고 들으며……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같은 자리에 서서 거의 비슷한 감각으로 상황을 대하면서도 드라고니아는 늘 투란 자신과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듯하면서도 왠지 어이가 없었다.
―저 도끼가 옛날부터 유명한 마법 무구라고!
으르렁거리는 말투에 투란은 날만 남은 채라 멀리서는 갈고리로 보였던 검은 도끼, 블랙리버란 이름까지 가졌다는 마법의 무기를 바라봤다. 딱히 특별해 보이는 부분은 없었다. 은근히 마력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느낌은 투란이 킹 타우루스의 석상을 보고 느낀 것보다 훨씬 미약할 뿐이었다.
이런 투란의 낌새를 알아차린 듯, 드라고니아가 묻는다.
―넌 뭘 보고 있는 거냐?
슥슥, 입가를 닦아내는 시늉을 하면서 눈가를 다시 문지르는 시늉도 하면서 투란이 킹 타우루스를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이거, 돌인데 몬스터 에센스가 남아 있는 것 같아.’
―뭐?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드라고니아가 당혹스러워하며, 일단 부정했다.
투란도 그 당혹스러움에 동감한다는 듯, 소리 없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은 해. 하지만…… 뭔지 모르겠지만 메듀시아의 힘으로 돌이 되면서도 이 녀석은…… 저 라미아도 함께 정수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남긴 것 같거든. 이상하지만 딱 그런 기분을 느낀단 말이야.’
―뭘 착각한 거는 아니고?
‘그럴 거란 생각이야 당연히 들지. 하지만……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이 녀석의 돌덩이 몸에서 몬스터의 정수가 나올 것 같아. 뭐랄까, 돌이 된 채로 속살 깊은 곳은 아직 온전하다?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너의 생각이냐?
‘에? 어라?’
투란은 자신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 기묘한 기분, 생각은 과연 온전한 자신의 것인가?
금방 아니라고 투란은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었다.
원인은 메듀시아였다.
메듀시아는 또렷하고 선명하게, 인과(因果)가 명확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막연한 기분, 감정적인 기억을 투란에게 호소하듯이 떠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투란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함 속에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기분에 젖어드니, 황당한 상황인 셈이었다.
게다가 이 무모하고 묘한 ‘느낌’ 속에는 스테노아의 완고한 낌새가 깃든 채로 투란을 향해 뚜렷하게 메듀시아를 지원한다라고 알려오는 듯도 하잖는가!
즉, 둘이 킹 타우루스의 석상에는 여전히 몬스터로서의 정수가 남겨져 있다고 벅벅 소리치며 우겨대는 듯한 상황!
‘아, 이게 진짜…….’
둘이 뭉쳐서 본격적으로 그 본능을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투란은 씁쓸함을 느꼈고 살짝 울컥하며 치솟는 울화도 느꼈다. 이러라고 미궁을 찾아와 메듀시아를 삼킨 것은 아닌데!
―만약…… 진짜로 이 석상이 킹 타우루스의 에센스를 간직하고 있다면…… 메듀시아의 킹 타우루스라면…… 투란, 이건 전설적인 몬스터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전설?’
치솟는 울화를 살짝 억누르며 투란이 되뇌었다.
―오랜 기록에 따르면 고르고니아 세 자매가 불렸을 때, 세 자매의 미니언으로서 타우루스와 라미아가 생성되었다. 그 미니언들은 세 자매의 휘하였지만, 어지간한 몬스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녔고 그런 녀석들을 지배하고 이끄는 우두머리가 바로 킹 타우루스라고 했어. 만약 이놈이 그 전설에 나오는 놈이라면…….
‘삼켜보라고?’
투란은 길게 이어지려는 말을 자르고 물었다.
드라고니아는 잠깐 침묵했다.
미묘한 망설임, 그 의미를 투란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강대한 몬스터를 하나 더 삼키는 것, 이미 몬스터 엠블럼의 풍경 속에 몇몇 재앙을 품은 투란에게 또다시 전설적인 몬스터를 더 꾹꾹 눌러 담으라고 권하는 짓을 해도 되는가, 이를 드라고니아가 망설이는 것이다.
이미 타우루스를 왕자, 왕족, 족장에다가 기원이 다른 녀석들까지 삼켜놓았는데 저리 망설이는 것이 투란에게는 조금 어이없기는 했다. 하지만 투란은 그 망설임 속에 담긴 염려, 킹 타우루스가 생각보다 까탈스러운 경우일 수 있다는 드라고니아의 생각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세 자매의 휘하였음에도 타우루스의 왕이라 불린 까닭은…… 몬스터답지 않은 지성적인 면모를 자주 드러낸 때문이야. 말하자면…… 킹 타우르스는 자의식(自意識)이 꽤 강하다. 본능을 억누르고 생각하는 모습이 잦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능력은 어떤 타우루스라도 단숨에 압도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몬스터 로드에게는 금기를 범하는 경우도 될 수 있다. 역시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긴 한숨처럼, 드라고니아가 처음 권하려던 생각을 포기한 듯이 말했다.
투란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라고니아는 킹 타우루스, 이 석상이 된 채로 몬스터 에센스를 간직하고 있을지 모르는 타우루스의 왕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 힘을 손에 넣을 기회라면 거침없이 얻으라고 투란에게 권하고 싶어 했다. 이는 투란이 모르는 타우루스의 왕, 그 능력은 드라고니아조차 탐낼 정도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 박자 늦게, 몬스터 로드에게 자기라는 의식을 명확하게 간직한 몬스터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되새기고는 그 생각을 접고 있는 셈이었다. 문제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제 와서 내가 금기 따져서 뭘 해?’
투란의 ‘천칭’ 풍경 속에 생각하고 기억하고 자기 나름대로 딴 궁리하는 녀석이 이미 한둘이라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 특히나 지금 걱정하는 드라고니아는 뭔 수작을 부렸는가, 처음부터 자신의 형체조차 감추고 있었잖은가!
―음? 야, 잠깐! 나는 내 자아를 통제할 수가……!
떠드는 말을 무시하고 투란은 껑충 뛰어올라 킹 타우루스의 무릎 위에 섰다.
푹신한 의자 위에 등을 잔뜩 기대앉은 자세였기에 무릎에 선 채로 배를 밟으니 킹 타우루스의 가슴팍에 손이 닿았다.
“뭣 때문인가 좀 애매하다만…… 메듀시아랑 스테노아가 너한테 무슨 볼일이 따로 있는 것 같거든. 그러니, 일단 삼켜지나 안 삼켜지나 한번 해봐야겠다. 불만 갖지 마라, 불만 드러내면…… 넌 그냥 지워버릴 거야. 나 이미 타우루스 넉넉히 많이 품었으니까 말이야.”
두서없는 말을 뱉은 다음, 투란은 암석형태의 몬스터를 삼킬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에 따라 가슴의 문장을 문질렀다.
‘천칭’에서 방울진 핏빛 무늬가 투란의 손끝에 깃들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