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3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31)
Chapter 167. 유물
‘냄새’는 길을 열고 있었다.
오롯하게 정령에게만 맡게 해준다는 듯한 특이한 ‘냄새’였고, 정령의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투란에게만 그 길을 드러내고 알려준다는 듯했다.
그 때문인가, 그 길을 따라가는 동안에 폐허 곳곳에 자리 잡고 다투는 몬스터와 맞닥뜨리는 일이 없었다. 흐릿한 달밤이든 말든 간에 인간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몬스터임에도, ‘냄새’가 인도하는 길은 몬스터조차 피해가게 해주는 상황이었다.
이는 투란에게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냐?’
―안 될 일은 뭔데?
드라고니아도 수상하게 여기는 듯, 한 박자 늦게…… 고집스럽게 ‘냄새’가 이끌어주는 길로 갈 것을 주장하는 말로 대꾸하고 있었다. 마치 뭐가 튀어나오든 말든 투란이라면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수수께끼나 풀겠다는 듯한, 살짝 심술궂은 낌새도 담긴 대꾸였다.
투란은 자신이 걷는 길, 폐허의 담장과 벽 사이에 그림자처럼 늘어져 있으면서도 흐린 달빛 아래에 훤히 드러난 길을 보며 뭐라 핀잔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정령의 감각을 통해 드러난 이 기묘한 그늘이 연잇는 듯이 보이는 길을 걷는 이는 투란뿐이었고, 몬스터가 아닌 짐승의 기척조차도 없었다.
정말로 당장 무슨 일이 터질 듯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이 폐허의 유적 속에서 가장 안전한 은신처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이 안에서 설렁설렁 다닌다면 독사 한 마리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듯한 평온함…….
‘뭔 일 나면 네 책임!’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불쑥 말하고서 투란은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뭐가 나올지 몰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이 길 끝에 뭐가 있는가 빨리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가든 말든 그건 네 마음대로이면서 책임은 왜 내 몫이냐?
드라고니아는 투덜거렸다.
키득거리고 싶은 기분 속에서 투란은 달리는 와중에 와닿는 벽의 감촉, 드리워진 그림자의 질감을 슬쩍슬쩍 더듬으면서 묻는다.
‘페브라나 스타폴의 벽이랑 비슷하지 않아? 거기가 좀 새것이기는 하지만 오래 지나면 거기도 이렇게 색이 변하고 금이 가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게 될 거다. 여러 왕국이 세워졌다 무너졌다 했어도 브로큰 킹덤, 에아본 왕국의 후예들이니까. 건축양식은 색다르게 변했어도 그 기술에 있어서는 에아본 왕국이 건재했을 때랑 다를 바가 거의 없을 거야. 고대 왕국의 기술 중에서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이 건축 분야였다니 말이지.
‘흐흠? 정점을 찍어?’
―몬스터를 막아내고 버티기 위한 기술. 마법과 연금술, 정령술까지 동원된 건축술이었으니까. 라비엔만 하더라도 아직 그 거대한 틀이 유지되고 있었잖아.
‘어? 그러고 보니…… 라비엔처럼 높지만 않을 뿐이지, 꽤 닮았구나.’
홱홱 꺾이는 길을 내달리면서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벽은 라미엔처럼 자연스럽게 치솟은 돌이 스스로 짜인 듯한 부분이 보였고, 교차하는 무늬는 스타폴의 겹겹이 쌓인 성벽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면에서는 라비엔을, 어느 면에서는 페브라 왕국 쪽의 특징을 드러내는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층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고, 보다 더 오랜 세월을 버텨낸 견고함…….
확실히 정점을 찍은 기술이 이리저리 퍼지면서 그 특징이 갈라져 내려왔다고 볼만했다.
―음? 야, 조금 속도를 늦춰봐!
이리저리 둘러보며 조금 더 빨리 달릴까 하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가 억제하란 말을 꺼내고 있었다.
‘왜?’
세게 발을 디뎌 그대로 걷는 쪽으로 움직임을 전환하며 투란이 물었다.
혹시나 뭔가 특이한 것이 나타났는가를 확인하려고 재빨리 주변을 여러 시각으로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고.
―황금벽인데? 황금성과 같은 재질인…….
‘뭐?’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가리키는 담벼락, ‘냄새’가 인도하는 길의 저편을 가로막듯이 우두커니 서 있는 넓은 벽을 바라봤다. 흙과 먼지, 거기서 자란 넝쿨과 잎사귀에 적당히 가려진 벽은 어딜 봐도 반짝이는 부분이 없었다. 아무리 흐린 달빛 아래라고 하지만, 황금의 광채는커녕 노랑 이파리 하나도 안 보였다.
―원래부터 칠을 해놨어. 거기에 세월이 가며 쌓인 것 때문에 더욱 황금이란 소재가 드러나지 않는 거라고.
투란의 의심이 마땅치 않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툴툴거렸다.
투란은 그 벽 앞에 다가갔고, 대여섯 걸음 앞에 서면서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길이…… 벽 안으로 이어지는 모양인데?’
―그러게?
‘냄새’, 여태껏 정령의 감각을 자극하며 인도하던 자취가 정확하게 투박한 벽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드라고니아가 황금의 벽이라 지적한 것이 괜한 짓은 아니었다는 듯.
하지만 투란은 떨떠름했고, 드라고니아도 바로 그 기분에 공감하는 중이었다.
‘너무…….’
―수상하기는 하다만…….
쓴웃음이 투란의 입가에 스쳤다.
드라고니아도 한숨 쉬는 기척과 함께 말을 잇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설 테냐?
‘야, 가려던 길도 아니었다고.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지! 대놓고……는 아니군. 황금이라며? 벽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면 벽이라도 파내 갈 거야!’
투란은 으르렁거리듯 대꾸하고 껑충 뛰어 벽을 넘으려 했다.
황금 벽을 통으로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일단 그 너머로 뛰어넘어 보려 한 것인데,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발끝이 땅을 박차기 전에 말한다.
―통과해야 해. 이 벽 안으로.
‘뭐? 이거 벽이 아니라 문이야?’
―문이라기에도 애매하다만, 단순히 벽 두께라고 한다면 팔십팔 센티미터 정도이고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 여태 느껴지던 것도 저 너머에는 없어. 있다면 모조리 우리가 온 길을 따라 이 벽 안으로 스며드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깨고 지나가?’
멈칫하고 선 채로 잠깐 멀뚱하니 벽을 바라보던 투란이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그 와중에 살짝 투란은 손을 뻗어 벽을 더듬고 슬쩍 긁어봤다.
먼지와 흙이 너무 단단히 들러붙었는지, 무슨 돌을 긁는 기분이었고 황금의 촉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쯤 되면 이건 지나가다 등짝 기대기도 애매한 돌로 된 벽이 맞는가 싶을 지경!
‘어쩌라고!’
바로 투란이 살짝 성내는 한마디를 던지니…….
―정령의 힘을 담아 쓰다듬어봐.
드라고니아가 신중하게 상황을 검토했다는 듯이 말했다.
‘응? 아…….’
투란도 금방 무슨 말인가 알아차렸다.
여태 쫓아온 ‘냄새’는 정령의 감각에 의해 포착하고 따라올 수 있었다.
정령수가 이 길에서 나는 그 ‘냄새’의 흐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뭔가 반응할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정령의 힘을 기다릴 것이 뻔하잖은가.
‘거참, 이리저리 귀찮게 하기는.’
누가 무엇 때문에 이래놨는가, 작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투덜거리는 생각을 담아서 투란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가 내밀었다. 왼손에는 살갗 안팎을 들락이는 휘드라곤의 물결이 휘감긴 채였다.
벽은 바로 휘드라고의 존재에 호응했다.
단단하게 맺혀 있던 흙이 떨어져 나갔고, 넝쿨과 이파리가 흔들리며 좌우로 밀려나갔다.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한 바람이 벽을 쓸어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황금의 색채가 흐린 달빛 아래에서 노랗게, 억제한 반짝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투란이 마주 선 황금의 벽에 동그랗게 파문이 번져갔다.
‘어? 이거…… 황금이 녹지도 않았는데 물결치냐?’
이빨로 깨물면 자국이 남기는 한다지만, 황금은 물결치며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을 억센 바람으로 밀어내고 드러난 황금의 벽에는 분명히 동글동글한 물결의 무늬가 연이어 드러나면서 찰랑찰랑했다.
드라고니아가 미묘하게 혀를 차는 듯, 쥐어짜 내는 것처럼 말한다.
―정령의 영역이로군. 1미터도 안 되는 벽이 아니라…… 내부 공간이 왜곡된 창고였나 보군. 들어가라, 그대로 밀고 들어가. 문턱을 넘어가 봐야 뭐가 있나 알 수 있으니까.
‘책임져라.’
위험에 대해 대비하면서도 투란은 핀잔하듯 한마디 던졌다.
그러나 휘드라곤이 맺힌 손을 내밀며 앞으로 내딛는 투란의 걸음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뭐가 튀어나오든 오른손에서 대기하는 샤벨투쓰의 이빨로 썰어버릴 준비를 하며 투란은 황금의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
‘켁.’
몸을 휘감고 관통하는 듯한 잠깐의 일렁거림이 투란에게는 낯설었다.
―아무 탈 없어. 앞이나 봐.
드라고니아는 냉정하게 투란이 막 쏟아내려 한 낯선 경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찍어 눌렀다. 그 말이 없더라도 이미 들어선 곳을 훑어보던 투란은 저절로 장난스럽게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있기는 했다.
금빛이 사방을 밝히는 방, 조금 전까지 흐릿한 달빛 아래 어두운 벽을 마주 보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 십여 미터의 네모난 방, 들어선 자리의 맞은편에 ‘내가 제단이야!’라고 주장하는 듯한 널찍한 반석이 있었고 그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빛의 구슬…… 온갖 색이 뒤엉켜서 도대체 무슨 색인가 전혀 알 수 없는 광채의 구슬이었다.
그 제단 곁에 푹푹 패여 길쭉한 여러 벽감(壁龕)은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두어 군데는 거친 담요 같은 천으로 둘둘 말린 크고 작은 것이 놓여 있기도 했다.
일렁거림과 함께 투란의 시각이 본래대로 돌아오자마자 둘러본 황금 내실(內室)의 상황은 사방이 황금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빼놓으면, 꽤 소박하다고 할 정도였다. 황금이 아니라 그냥 석벽으로 해놨으면 오히려 분위기가 더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느껴지나?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무겁게 묻고 있었다.
투란도 신중하게 이에 답한다.
‘그래, 여기…… 마이두스 임금님이 손댔구만.’
―뭐?
흠칫하고 살짝 당황한 듯한 묘한 드라고니의 대꾸.
투란은 어리둥절해서 주변 바닥과 벽의 형태를 다시 살피며 발끝으로 더듬어보면서 말해야 했다.
‘원래 돌로 된 곳이잖아. 그걸 임금님의 손길로 황금으로 바꿨구만. 보라고, 표면이나 짜인 꼴이 원래 석실이었잖아. 누가 황금을 손질해서 일부러 돌의 표면 같은 것을 꾸미겠어? 원래 돌이었던 것이 그대로 황금이 된…….’
―그거 말고! 누가 지금 이 석실의 소재 원형이 뭐냐고 하든!
씨근거리는 듯한, 어처구니없어 울컥한 듯한 드라고니의 외침이었다.
작정하고 질러댄 외침에 투란은 머리 한구석이 징징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 아니면 뭔데? 뭘 느껴야 하는데?’
―저 빛! 제단에서 혼자 둥둥 떠서 뭉쳐 있는 꼴을 보고 아무것도 못 느끼냐! 당장 눈에 띄는데 그걸 안 봐! 황금 표면 관찰할 시간에 저게 뭔지부터 궁리해야지, 이 얼빠진 녀석아!
한번 더 징징 울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긁적거리면서 투란은 뚱하니, 입술을 핥지만 소리 없이 대답한다.
‘정령이잖아. 보면 그냥 알겠구만. 뭔 정령인지까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저게 날 유인한 냄새를 풀풀 날린 정령이란 거는 자세히 안 봐도 뻔하잖아.’
―이 자식! 지금 이 방에서 제일 중요한 거잖아! 봤으면 뭘 느꼈는가 말을 하라고! 그래야 내가 보충 설명을 할 거 아냐!
드라고니아가 아까보다는 확실히 누그러진 채로 말했다.
덕분에 머릿속이 덜 울린 투란이었지만, 여전히 뚱한 말투로 대꾸한다.
‘그니까…… 그냥 정령이라고. 휘드라곤도, 파이로도, 에어로도, 테라트도, 아쿠아도 저거랑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정령이라고. 대체 뭔 정령이야? 사대속성이 아니더라도 대강 뭔지는 드러내야 하는 거 아냐? 아, 설마 혼란스러운 색의 정령인 건가?’
―그딴 정령 없다. 저건…… 혼돈(混沌)의 정령이다. 섭리 속에 자리 잡은 혼돈, 그렇기에 이 세상에 정당하게 존재하는 혼돈의 속성을 품은 정령이야.
‘정당하게……라면, 몬스터 로드가 삼킬 수 없다는 뜻이지?’
팔짱을 낀 채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투란이 멀찍이 보이는 빛의 구슬을 새삼스럽게 더듬는 눈길로 되물었다.
―당연히 못 삼키지. 뒤틀린 채로 섭리에서 어긋난 정령이 아니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볼 생각이 전혀 없냐? 왜 발에 접착제 묻힌 것처럼 가만히 서 있냐?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태도를 짚으며 물었다.
투란은 가만히 빛의 구슬을 향해 조금 게슴츠레한 눈매를 만든 채로 답한다.
‘내가 미쳤냐? 삼킬 수도 없고…… 굉장히 수상하잖아! 뭐하러 저런 수상하고 영문도 모를 것에 가까이 가? 그럴 이유를 대봐!’
어이없어하는 듯한 한숨을 섞은 말투로 드라고니아가 바로 말한다.
―정령의 별궁. 거기 간직된 최고의 보물이자, 지고(至高)의 정령이라 불렸던 것이 저거니까. 저게 있었기에 정령의 별궁이 성립되었다고 하니까. 사대속성의 왕이라 할지라도 저걸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고 하는, 그런 아티팩트이고 정령의 자취를 흘려내며 찾아올 사람을 기다렸으니까. 투란, 저건 네가 회수해야 한다.
‘썩을…….’
너무 분명하게, 꽤 거창하게 들이대는 이야기에 투란은 낯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