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3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32)
‘그냥 두고 가도 괜찮잖아? 이 도시가 폐허가 되기 전부터 있었고, 폐허가 되고 난 후에도 지금까지 별일 없이 여기 저러고 있었던 건데…….’
슬그머니 내뺄 궁리를 해보는 투란이었다.
드라고니아가 이런 투란에게 살짝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듯한 낌새를 풍기면서 바로 말한다.
―그래, 지금까지는 괜찮았어. 저 문이 열리고 여기에 누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뭣! 야, 설마?’
―잠겨 있던 정령의 문은 몬스터가 열 수 없지. 하지만 이렇게 훤히 열린 문으로 들락거리는 것은 몬스터가 아니라 벌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벌레가 저 지고의 정령에 닿는다면, 정령의 냄새가 스며들 테고 그 상태로 여길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이 산맥의 영향을 받아서 바로 뒤틀린 정령을 품은 벌레가 되겠지. 그래, 흔히 말하는 몬스터 벌레가 말이야. 투란, 니가 저 문을 연 순간부터 여기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한 곳이고 몬스터를 만드는 공방처럼 변한 거야.
‘마, 마법으로 닫아걸면 되잖아! 그냥 꽉 쳐 닿으면…….’
움찔움찔하면서도 투란은 천 가지 주문 속에서 폐쇄(閉鎖)와 관련된 것을 검토하며 버텨보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연잇는 드라고니아의 말투는 한층 더 단호할 뿐이었다.
“그린 이상 저 혼돈의 정령은 춤추는 산맥의 지독스러운 환경 아래 그대로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어! 여기 들락거릴 수 있는 벌레나 몬스터보다 더 민감하게 말이야. 그러면 이곳은 아주 유명해질 거야. 오래 잊혀 있던 페허가 새로운 몬스터의 산실(産室)이 될 테니까. 여기서 발생한 것들이 브로큰 킹덤으로, 바로크 왕국으로 번져가겠지. 아, 아예 북부 산맥을 넘어서 춤추는 산맥 밖으로도 흘러나갈 수도 있겠네? 으흠, 그러면…… 우와, 드라코눔에도 닿을지 모르겠는걸? 너, 몬스터 로드란 녀석이 이런 대형 사고를 치고 몰라라 할 참이냐? 몬스터 로드의 의무에 대해서 키린이 뭐라 하지 않았어? 홀랑 잊었냐?
계속해서 투란의 머리 위에 책임과 의무의 탑이라도 쌓아 올리듯이 줄줄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거, 거짓말……?’
―저게 뭘로 보이냐? 이제 슬슬 오랜 감금에서 깨어나 세상과 호응하려는 저 녀석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이대로 저게 이 황금의 밀실에서 벗어나면 어찌 되려는가 짐작이 안 되냐?
보다 엄격한, 전혀 농담의 낌새가 없는 말이 투란의 마음에 콕콕 꽂혔다.
이쯤 되니 투란은 ‘함정에 빠졌다!’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배 속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이러려고 나더러 여기 들어오라고 한 거냐? 너 이게 무슨 흉악한……!’
―알았으면 밖에서 완전봉쇄해 놓자고 했겠지. 파워 서클의 힘까지 이용하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대봉쇄를 완벽하게 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꽤 씁쓸한 대답을 하는 드라고니아였다.
때문에 투란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그 무거움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냐? 늦출 수도 없고 당장?’
―아니면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을 많이 할 리가 있냐?
‘홀시딘을 부르는 거는?’
―상아탑은 에아본 왕국의 정령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정령의 궁전을 꾸밀 때, 황금을 소모한 것을 봤지? 에아본 왕국의 정령술은 황금을 소모하지 않아. 그리고 정령의 나무가 없이 정령의 궁전을 짓지도 못했어. 그런 마법사가 어설프게 저것에 손대려 하다가는…… 운이 좋으면 죽는 거고, 운이 나쁘면 저게 씌워져서 미쳐 날뛸 수도 있다. 미쳐 날뛰는 상아탑의 대마법사를 보고 싶냐?
‘저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냐! 그럼 나는?’
―정신적인 방벽이라면 어떤 마법사도 몬스터 로드보다 철저할 수는 없지. 하물며 문장을 둘이나 지니고 둘 모두 재앙을 품은 너잖냐. 그래, 홀시딘이 널 보고 했던 말 그대로 너는 캘러미티 로드(Calamity Lord)니까. 아무리 고대 왕국이 자랑했다는 지고의 정령이라도 마그마 로드의 정수를 품고 다루는 널 어찌하지는 못할걸.
‘너 정말 나 함정에 빠뜨린 거 아니지?’
―아니라고! 이 안에 뭐가 있는지 프로브도 파악할 수 없었잖아! 프로브가 파악 못 하고 너도 엿볼 수 없는데 지금 내가 무슨 재주로 저딴 게 저러고 있는지 알겠냐고! 정신 차리고, 마음 단단히 하고 제단 앞으로 가라. 시간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어. 바깥바람이 슬슬 스며 오려 하니까.
‘젠장…….’
투덜거림을 입안에 가득 담은 채로 입을 꽉 다물고 볼만 부풀린 투란이 한 걸음 제단 쪽을 향해 내디뎠다.
제단 위에서 오롯하게…… 도대체 무슨 색인지 모를 온갖 빛깔을 머금은 빛의 구슬이 이런 투란의 걸음에 바로 반응했다. 그 번잡하고 복잡한 빛깔 속에서 검은색 한 가닥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는 듯하더니, 제단 위로 드리워지듯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빛의 구슬을 두 손에 품은 듯한 검은 환영(幻影)이 제단 위에 맺혔다.
어스름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환영은 대강 인간의 여성으로 보였고, 어깨에 걸친 망토에 이어진 두건을 머리에 드리운 듯한 형체를 느릿하게 완성시키고 있었다.
“음?”
―음?
투란과 드라고니아가 그 광경에 동시에 어리둥절했다.
서로 이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는 것에 둘은 곧바로 마음의 교감을 통해 쓴웃음을 나누는데, 생겨난 검은 환영의 형상이 그 머리 부분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이단(異端)의 정령술사(精靈術使)여…….
‘소리가 아니지?’
―염파(念波)도 아니다. 정령의 교감을 이용한 것 같은데?
들려온 말은 입으로 토해낸 듯했지만 목소리를 울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념(思念)의 공명(共鳴)을 이용해서 생각을 전하는 마법의 계통도 아니었고, 자극을 받은 것은 오로지 정령의 감각뿐이었다.
마치 이곳을 찾아올 때처럼 정령이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를 통해 ‘청각’의 형태를 자극하는 듯한 기묘한 전언(傳言)이었다.
투란과 드라고니아가 이런 상황을 점검하는 사이, 검은 환영이 말을 잇는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자랑스러웠던 우리 왕국의 정령술이 오염(汚染)되어 타락(墮落)의 수단이 되었기에…… 우리와는 다른 길을 택해 정령과 교류하는 이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뭔 얘기야?’
―에아본 왕국의 정령술에 대한 말인 것 같다만.
투란은 여전히 어리둥절했고, 드라고니아는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했다.
―우리는 교만(驕慢)과 과오(過誤)로 인해 많은 정령을…… 우리와 함께했던 동반자를 잃어야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죄를 씻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해준 동반자에게……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함께 할 새로운 벗을 만날 방법을 마련해주고 그 때까지 저 ‘파멸(破滅)의 혼돈(混沌)’이 끼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고(至高)와 무용(無用)의 정령’이라 불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우리의 긍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전하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의무라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단의 정령술사여…… 우리의 벗을 맡아주세요. 그대의 동반자로서, 그대의 벗으로서……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희망을 품고 활약하도록 해주세요.
검은 환영이 가만히 두 손을 내미는 시늉을 했다.
실제로 앞으로 뻗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빛의 구슬을 받쳐 들고 공손하게 앞으로 내미는 그 동작의 의미는 아주 선명하고 간결하게 그 의미를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란은 마주 손을 내미는 대신에 엉거주춤하니 망설였다.
드라고니아는 재촉했다.
―뭐해? 어서 저 손을 맞잡……?
‘네키아.’
투란은 마음속에 짧게 이름 하나를 되뇌어서 드라고니아의 말을 끊었다.
―젠장. 그럴 수도 있겠군.
드라고니아도 바로 투란의 떠올린 문제점을 인정했다.
투란의 왼팔을 휘감고 맴돌며 휘드라곤이 이슬처럼 흩어졌다 뭉쳤다 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휘드라곤이 이렇게 투란에게 들러붙듯이 함께 하는 까닭…….
‘그냥 떠맡는 것뿐이고 계약이 아닐 수도 있지?’
투란이 조금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나서 물었다.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만…….
드라고니아는 씁쓸하게 그 가능성이 적다고 짚을 수밖에 없었다.
정령술은 세계의 섭리에 깊이 스며든 ‘정령’에게 새로운 형태를 부여해 보다 깊이 세상의 사물에 간섭하게 하는 마법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하게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정령’에게 ‘이름’을 부여해야 했고, 부여하는 자의 ‘이름’을 닻으로써 제공해야 했으니까.
전혀 다른 방식, 다른 길을 걷는 정령술이라 해도 그 기본적인 조건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술을 아는 자라면 네키아가 휘드라곤을 투란에게 붙여놓고 가계약을 맺은 것이 파격적이라 할 지경이니까.
―일단 손 내밀어라. 어찌 되나 봐야지. 에아본 왕국의 정령술이 우리가 아는 것과 아예 다를 수도 있으니까.
희망의 끝자락이라도 잡겠다는 듯한 드라고니아의 말이었다.
투란도 그 희망의 끝을 잡아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앞으로 나아간 투란이 두 손을 내밀었고, 검은 환영의 두 손 위에 살짝 포개듯이 얹어봤다.
순간 검은 환영이 그려내는 여인의 형상이 보다 선명한 윤곽으로 형태를 잡았다.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아주 무심해서 동상이나 인형 같은 느낌이 짙어졌다.
빛의 구슬은 투란의 손과 환영의 손이 겹쳐진 사이에서 조금 더 떠오르는 듯하며 더욱 다채로운 색채를 그 표면에 띠고 방출하겠다는 듯한 무늬를 그려냈다. 하지만 시커먼 그림자가, 여인의 얼굴과 몸이 기울어지듯이 자세를 바꿨고 색채는 빛의 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 안으로 다시 스며들며 온갖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혼란스럽게 변해갔다.
그 변화와 함께 투란은 환영이 묻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소리도, 염파도 아닌 정령의 교감을 이용한 물음이었다.
―그대의 이름은?
“투란, 내가 아는……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이름이야.”
억누를 수 없는 한숨을 쉬듯 투란은 소리 내서 대답했다.
―젠장…….
다음 상황을 예측한 듯, 드라고니아도 한숨 쉬듯이 웅얼거렸다.
그리고 투란은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응? 이건?’
‘청각’을 자극하던 교감이 갑자기 ‘시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확 찢고 새로운 풍경을 활짝 펼쳐놓은 듯한데, 그 풍경의 중심에 빙글거리듯이 맴돌며 자리한 것은 중심이 텅 빈 기묘한 무늬…… 마법의 구조와 형식을 결정한다는 아케인 패턴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대로 저 아케인 패턴이 완성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것이라는 확신이 투란의 가슴을 살짝 두근거리게 했다. 드라고니아도 ‘어라?’ 하면서 진행과정이 자신이 아는 것, 예상한 것과 달라지는 광경에 살짝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중심의 텅 빈 자리를 향해 채워나가던 아케인 패턴이 멈췄다.
그 멈춘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투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망할…….’
이름을 새겨넣는 것이 실패했다.
투란의 이름이 그 중심을 채워 넣어야 했는데, 채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여기 투란이란 이름으로 선 누군가가 투란일 리가 없다는 듯.
―망할.
드라고니아도 투란의 심정에 바로 공감했다.
진행이 멈춰서 고착된 어느 순간에 검은 여인이 고개를 들었고, 투란과 그 시커먼 눈동자가 마주쳤다.
씁쓸하게 투란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난 다른 이름 몰라.”
검은 여인은 그저 투란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기다리는 듯했다.
어느 틈엔가 그 검은 그림자 같은 두 손이 투란의 손을 꽉 잡듯이 덮고 있기까지 했으니, 진짜 이름을 내놓기 전에는 놔줄 수 없다는 듯한 인상이 풀풀 휘날리는 셈이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투란이 진지하게 드라고니아와 따져보려는 찰나.
휘드라곤이 불쑥 끼어들었다.
투란을 대신해서 검은 여인과 눈길을 마주치려는 듯, 휘드라곤의 한쪽 끝이 갈라지며 두 가닥의 머리가 여인의 눈앞에 다가왔다.
‘에?’
―흠?
물과 그림자, 두 가지 기묘한 형상이 뭔가 교감하는 광경은 투란과 드라고니아를 어리둥절하게 했고 가만히 닥치게 했다.
빛의 구슬이 조금 환하게 빛나며 이를 더 밝혀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