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3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33)
찰싹.
휘드라곤이 갈라졌던 머리를 합치는 소리는 작고 선명했다.
동시에 검은 여인이 촛불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출렁이며 늘어지는 것처럼 펼쳐지며 확대(擴大)되었다. 이전의 시커먼 빛깔이 그대로 그림자처럼 광채를 잃은 듯했는데, 질량(質量)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가 강력한 실체를 획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휘드라곤이 투란의 어깨 위로 회오리처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가늘고 길게 새로운 머리를 치켜올렸다. 작고 앙증맞은 휘드라곤의 새 머리가 투란의 볼을 콕콕 찌르듯이 건드리니, 부드럽게 뺨을 덮는 물결이 얇게 펼쳤다.
그 사이에 그림자가 된 여인의 형상은 빛의 구슬을 그 가슴에 품었다.
빛의 구슬이 그림자 여인의 품 안에 담기는 순간, 깊고 어두운 연못에 빠진 것처럼 멀어지는 듯했다. 너무 멀어서 아주 작은 빛의 파편인가 싶을 정도로 축소(縮小)된 것으로 보였던 빛의 구슬이 그림자 속에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투란은 돌연 휘드라곤으로부터, 전해오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휘드라곤이 낸다기보다는 중간 매체(媒體)가 되어 전해주는 듯한 ‘소리’는 이전 검은 환영이었던 여인의 형상이 말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무거운 느낌을 담고 투란에게 분명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있었다.
―셰이아.
“셰이……야?”
아무 생각 없이 투란은 그 이름을 소리 냈다.
그러라고 부추기는 듯한 휘드라곤의 흐름이 살갗에 맴도는 탓도 있었지만, 그래야 한다는 기분이 세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때문이었다. 덕분에 살짝 혀끝이 꼬여 묘하게 부정확한 한마디가 된 듯한데…….
―셰이아!
투란의 뇌리 깊이 그 한마디가 다시 푹 꽂혀들고 있었다.
휘드라곤을 건너왔던 ‘소리’가 제대로 투란의 마음에 뚜렷한 파문을 만든 셈이었다.
살짝 당황하면서도 투란은 엉겁결에 다시 한번 소리 내서 그 ‘소리’의 한마디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셰이아……?”
아까보다는 나름 정확하게 ‘소리’를 소리 낸 셈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처럼, 파문이 그림자가 된 듯한 여인의 형상 속에서 일어났다.
질량과 형상, 물체를 이루는 근거(根據)가 그림자를 채웠다.
이제는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여인의 모습을 한 뭔가가 확실히 있다고, 단순히 실체를 갖춘 듯한 느낌을 뛰어넘는 ‘현상(現像)’으로서의 존재가 명확해졌다.
그 존재, 여인의 형체를 기본으로 한 그림자로부터 일어난 파문은 곧바로 투란을 스쳐갔고 주변을 휘감는 듯했다. 어딘가 시원하면서도 무겁고 섬뜩하지만 포근한……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감각이 투란을 흠칫하게 하며 가슴 속으로 스며오며 심장의 맥동과 어우러졌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빛의 구슬이 그려내던 아케인 패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셰이아!’
투란은 바로 깨달았다.
네키아의 때처럼 진명(眞名)을 알지 못했기에 채워지지 않았던 아케인 패턴의 중심에 ‘셰이아’가 드리워졌고 빛의 구슬을 대신해서 투란과 ‘연결(連結)’을 만들어냈다. 빛의 구슬, ‘지고와 무용의 정령’이란 녀석과는 ‘셰이아’가 이어져 단단히 매듭을 이루고 있었다.
‘이거……!’
똑같지 않고 다르지만 닮아 있었다.
휘드라곤이 네키아에게 부여받은 역할을 셰이아가 맡은 셈이었다.
언젠가 투란이 진짜로 있는가 전혀 알 수 없는 진정한 이름을 알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가계약 상태…… 어찌 보면 노골적으로 휘드라곤을 흉내 낸 듯했다. 미리 알고 있던 것이 아니고 휘드라곤을 통해 알아낸 바를 실행한 듯한 묘한 분위기의 ‘셰이아’.
―학습하는 정령이었군. 놀라워.
뒤늦게 드라고니아가 불쑥 꺼낸 말은 투란의 막연한 추측, 그렇지 않나 싶었던 느낌을 확실하게 못 박는 이야기였다.
‘배웠다고? 조금 전에 눈싸움하듯이 한 짓이 배운 거였어?’
그 눈싸움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기는 하지만 투란이 멋대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드라고니아가 한번 더 명확하게 단정 짓는 말을 잇는다.
―그래. 정령술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순수한 정령과 정령의 교감을 통해 받아들인 모양이다. 에아본 왕국의 정령술, 그 별궁의 정령이 특별하다는 말은 들었다만 이렇게까지 특이할 줄은 몰랐군. 정령을 통한 전언이야 그러려니 하겠다만…… 계약자를 잃은 정령이 배워서 가계약을 성립시킬 정도라니, 드라코눔에서는 상위 정령에게나 겨우 기대할 일인데 말이야.
‘셰이아가 상위 정령이 아니란 말이네?’
서서히 자신의 주변을 맴돌기를 멈추며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셰이아’의 상태를 가늠하면서 투란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네키아처럼 말을 할 듯해 보이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입을 다문 듯한 분위기가 이제는 투란에게 휘드라곤처럼 아주 낯익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셰이아였다.
그 때문인가 투란으로서는 어디 내놔도 이 정도면 상위 정령이라 할 만하잖은가 싶었는데 드라고니아는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다니…….
―상위 정령을 이런 곳에 오래 가둬두면 미쳐 버린다. 자아를 갖췄다는 것은 이런 폐쇄된 영역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니까. 심지어 전언까지 간직한 채로 막연하게 누군가 기다리는 임무라면…… 굳이 춤추는 산맥의 영향력이 없어도 세월이 지날수록 광폭해지고 말지. 그런 임무는 기초적인 특성만 갖춘 최하위 정령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야.
‘야, 어딜 봐서 얘가 최하위야? 전혀 아니잖아!’
왠지 억울한 기분에 투란이 툴툴거렸다.
―응? 누가 이 녀석이 최하위라고 했어? 보통 그런 임무를 최하위에게 맡기는 편이란 말이야. 이 그림자 정령은 하위 수준에서는 확실히 벗어난 중위 계층이야. 부여한 임무 탓인가 자아가 꽤 느슨하고 얄팍하게 구성된 경우이고…… 아무래도 학습을 통해 성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 같군.
드라고니아는 혼잣말하듯이 떠들고 있었다.
투란은 그 말에 마음을 기울이는 대신에 셰이아를 그림자 정령이라 부른 점에 주목했고, 자신이 그 부분에 집중하는 순간 셰이아가 반응하는 것을 봤다.
그 반응이란, 그림자 속에서 시커먼 도끼 두 자루가 불쑥 튀어나온 광경이었다.
셰이아가 투란의 그림자를 더듬더니 블랙리버를 끄집어낸 것이다.
―음, 너의 그림자를 보금자리로 삼으려고 이물질을 제거한 모양인데?
어딘가 움찔하는 듯한 낌새와 함께 드라고니아가 말하고 있었다.
투란으로서는 새까만 얼굴을 들이대며 ‘이 도끼는 뭐죠?’라는 듯이 갸웃거리는 셰이아를 보며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거리는 중이었다.
셰이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할 일을 하겠다는 듯이 그림자의 형체를 꿈틀거리며 계속 움직였다.
곧바로 투란의 마력, 황금매의 문장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당연하다는 듯이 셰이아에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어?’
―음? 계약자의 마력을 차용(借用)할 줄도 알았나? 이건 휘드라곤에게 배운 것은 아니로군. 구성이 독특한 걸 보니…… 어라?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하는 태도로 중얼거리던 드라고니아도 셰이아가 투란에게서 이끌어낸 마력으로 자아내는 마법의 형체를 파악하면서 놀라고 있었다.
‘뭐야, 이게 뭔데…… 얘, 지금 껍질 만드는 거야? 날 가두려는 건가!’
투란은 슬슬 전모(全貌)를 드러내는 결과에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몸을 온통 감싸는 마력의 흐름은 수십, 수백 가닥으로 갈라졌고 교차하며 제멋대로의 궤도를 지닌 채로 엮이고 있었다. 마치 실을 잔뜩 자아내고 엮어 담요라든가 옷가지를 만들기라도 하는 듯했지만, 이 마력이 결성(結成)하는 것은 투란의 살갗을 스치며 단단히 조이는 그물처럼, 그물이 그대로 철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견고했다.
산 채로 흙을 발라 굳혀버리려면 딱 이럴 것 같다는 생각에 투란이 살살 불안함을 느끼는데, 드라고니아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듯이 감탄하고 있었다.
―이 녀석, 섀도우가드의 구성체였나!
‘그게 뭐냐?’
셰이아가 끌어가는 마력을 차단하거나 뒤틀어볼까 하던 투란이 멈칫하며 얼른 물었다. 드라고니아의 감탄 속에 담긴 의미가 왠지 나쁜 것은 전혀 없는 듯했으니까. 그런 기대에 응하듯 드라고니아가 프로브까지 새로 형성시킨 채로 셰이아가 마력을 엮어 구성하는 것을 조금 더 진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대답한다.
―에아본 왕국의 성벽을 지키던 정령의 방어술식이다. 그림자가 성벽을 덮는 광경 속에서 성벽이 몇 배의 강도와 견고함을 갖춘 채로 외부의 힘에 버텨내게 해줬다더군. 요정의 일족 중에서 그림자 일족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그 방어술식의 일부를 활용하는 것을 목격한 기록이 있다만, 사람의 살갗이 샤벨투쓰의 이빨에 갈라지는 것을 막을 정도로 강화되었다고 했어. 그때 소모된 마력은…… 지금 너한테서 셰이아가 끌어내는 것보다 훨씬 적었다던데?
‘뭐?’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이야기 끝에 의아해하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셰이아가 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자기 몸 주변에 이런 철벽을 초월한다는 방어를 펼치는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무 까닭도 없이 이러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 까닭은 굳이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금방 그 까닭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으므로.
꽈드득, 우득!
키잉, 와드득!
황금의 밀실이 우그러지면서 온갖 파열음, 수축음을 토해냈다.
“어머나?”
갑작스러운 황금벽의 괴멸 현상에 투란은 넋 나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이렇게 되는 거였군.
드라고니아는 셰이아를 관찰하려고 만들어둔 프로브로 주변을 바로 훑었고, 나름대로 원인을 알아낸 듯이 말했다.
그게 뭔가 투란에게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일이었으니…….
‘야! 혼자 알지 말고 말을 하라고, 말을! 이대로 있어도 되는가 아닌가!’
입을 꽉 다물며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채로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응? 아, 괜찮아. 그냥 구경해도 돼. 셰이아가 만든 마력장벽은 이걸 대비하는 거였으니까. 아마 정령의 계승이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 지어지면 저절로 이 영역을 폐기하도록 해놨던 걸 거야. 별궁의 잔재를 지우려고 말이지.
‘잔재를……?’
―지고의 정령을 계승한 자에게 모든 것을 넘기는 거야. 음, 뭐 지금 너한테는 그냥 셰이아란 정령을 맡기는 정도겠지만.
‘얌마,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냐! 지금 허공이 찢어지고 있다고!’
여유로운 드라고니아의 말이었지만, 투란은 전혀 안심하지 못한 채로 다시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단이 우그러지면서 빛의 구슬이 맴돌던 자리, 텅 빈 허공이 금이 가며 으깨지고 찢어지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하핫, 이 정도쯤이야!’라고 쳐 웃으며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빈가의 여우를 통해서 도약할 줄 알고, 공간의 만들어내는 틈새를 감지할 줄 아는 투란이었기에 허공이 저리 찢겨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섬뜩한가를 느낄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괜찮다니까. 셰이아가 만들어내는 마력장벽은 섀도우가드라고 하는데―.
살짝 찢어지는 허공에 놀란 낌새를 흘리면서도 드라고니아는 투란에게 다독거리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허공이 찢어지는 광경과 함께 투란은 황금 밀실을 완전히 파괴하는 굉음(轟音)이 시야를 흔드는 것을 보며 그 말을 듣는 척도 할 수 없었다.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기괴한 촉감, 섀도우가드인가 뭔가 하는 마력장벽은 감각은 전혀 차단하지 않고 해를 끼치지 못하게 막기만 하는 듯이 선명하게 투란에게 주변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해줬기에 투란은 온몸으로 파괴의 음향을 느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황금의 파편이 퍼져나갔고, 환한 낮의 햇살 아래에서 폐허의 풍경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밤이 사라진 듯이 드러난 낮의 풍경은 투란을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거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밀려오는 색다른 파동, 마치 정령의 자취를 흘려내던 영역이 파괴된 탓에 사방에서 퍼져나간 정령의 ‘냄새’가 반동(反動)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셰이아의 마력장벽은 그 반동을 그대로 받아냈고, 잡아먹었다.
투란에게 이 상황은 뱀이 벗어낸 허물을 다시 집어삼키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까지는 누군가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흘려냈던 ‘냄새’를, 그 정령의 자취를 양분처럼 다시 끌어와 삼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셰이아는 투란의 그림자와 동화(同化)하고 있었다.
도끼 두 자루를 품은 채로 자신만의 보금자리로 숨어버리는 것처럼.
투란은 그런 상태를 파악하면서, 급변한 주변환경을 둘러보며 따져야 했다.
‘왜 낮인 거냐?’
―여덟 시간 정도 지난 모양이군.
‘장난쳐?’
―아니야. 아무래도 정령 별궁의 전승을 지키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가능한 늦춰놓았던 모양이다. 밖에서 몇백 년이 흐르더라도 안에서는 몇십 년 정도만 흐르게 말이야. 정령의 유지를 위해서도 그편이 유리했겠지.
‘그런 게 가능하다고?’
―신속(迅速)과 둔화(鈍化) 같은 마법의 효과랑 비슷하게 생각해라.
‘전혀 다르잖아!’
투란은 투덜거리면서, 햇살 아래 흩어진 황금의 파편에 맞아 성난 산양 머리의 몬스터가 저쪽에서 메헷 하며 칼 들고 달려오는 광경을 봐야 했다.
다시 봐도 역시 칼 든 사티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