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4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38)
빛은 허공에 저편의 북벽산맥의 흉내 내는 듯한 그림을 그려냈다.
지도라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냥 비춰준 듯한 모양이었는데, 그 안에 붉은 실빛을 길게 드리워 어딘가로 이어지는 금을 긋고 있었다.
‘뭐야, 지도라며?’
투란이 갸웃할 때, 드라고니아가 바로 프로브를 움직여 비친 빛의 환영을 기록하며 말한다.
―지도 맞아. 흔히 공용(共用)되는 작도법(作圖法)의 표준을 따르지 않았을 뿐이야. 기억에 담은 풍경을 이정표 삼아서 길을 알려준 거지. 북벽 산맥을 보는 시점도 다르잖아. 여기가 아닌 다른 쪽에서 보는 산맥의 모양, 거기에 가야 할 곳을 대충 표시해놨으니 길잡이 지도라고 할 만하지.
‘흐흠?’
말과 함께 드라고니아가 저편에 보이는 북벽 산맥의 형태를 프로브로 따로 본뜨고 거기에 사라져가는 세란드의 지도를 이리저리 겹쳐 투란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럭저럭 이곳에서 찾아가는 길이 대강 표시되는 새로운 지도를 보여주는 셈이었다.
주섬주섬, 밀포와 육포를 한 움큼 더 꺼내 입에 털어 넣고 씹으며 투란은 가만히 가야 할 곳을 바라봤다. 잠시 후 입안을 비우고 물을 들이부어 헹구듯이 삼키고서 블랙레온을 팔뚝에 담아 넣은 다음, 투란은 일어섰다.
잠깐 팔다리를 쭉쭉 뻗어보던 투란은 두 손을 살포시 가슴에 모으고 황금매의 문장에서 셰이아에게 이끌려 나가는 마력을 차단했다. 셰이아가 가볍게 그림자를 출렁이며 ‘왜?’라고 묻는 듯했고 휘드라곤은 ‘괜찮아.’라고 다독이듯 자연스럽게 땀방울처럼 투란의 살갗에서 튕겨 올랐다.
정령수의 움직임과 함께 마력장벽이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투란은 곧바로 몬스터 엠블럼을 바꿔나갔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심연의 풍경을 돌파하고 다시 투란의 마음속에 ‘천칭’의 풍경이 비칠 때, 투란의 가슴에도 작고 검은 얼룩처럼 ‘천칭’의 문장이 자리 잡았다.
드라고니아가 보다 깊이, 심상과 귓속을 동시에 울리는 듯한 말을 건넨다.
―왜? 마력장벽은 황금매 쪽이 더 유지하기 쉽잖아?
‘그러니까. 셰이아가 황금매에만 익숙해지면 곤란하다고. 원래 문장도 천칭이니까. 너랑 대화도 마력을 이용한 것보다 이쪽이 더 편안하기도 하고…… 음, 셰이아가 천칭의 마력은 못 끌어가네?’
나름대로 떠올렸던 바를 이야기하던 투란은 문득 마력장벽이 제대로 구성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칭’은 황금매와 다르게 오롯하게 몬스터 로드의 고유마력만을 흘려낼 뿐이고, 오러처럼 몸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고유마력을 셰이아가 건드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거다. 황금매가 마법을 위해 고유마력의 특성을 억제하고 금색의 마력으로 변환시키는 쪽이었지. 몬스터 엠블럼은 지금 천칭처럼 고유마력을 다른 특성으로 변환시키지 않는 것이 정상이야.
‘에흐…… 그러면 천칭에서는 셰이아의 마력장벽을 못 쓴다는 얘기?’
―딴 놈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넌 셰이아에게 별도의 마력을 공유할 수가 있잖아. 윌 라이트의 마력이 신경 쓰인다면…… 시알라 남매에게 해줬던 것처럼 파워 서클의 마력을 셰이아에게 공명시켜 양도해줄 수 있기도 하고.
‘아, 그래?’
살짝 안도하는 시늉을 했지만 투란은 셰이아가 그림자 속에서 요동치는 것을 그냥 관찰만 할 뿐이었다. 전혀 마력을 셰이아에게 건넬 생각이 없다는 듯.
드라고니아가 의아해서 말을 잇듯 묻는다.
―장벽 구성하지 않으려고?
‘뭐…… 항상 방패 걸고 다니는 거, 이상하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게다가 얇고 여려 보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알아서 하는 것 같은데?’
투란이 관찰하는 잠깐 사이에 셰이아는 그림자 속에서 미묘한 흐름을 만들어냈고, 투란의 몸 곳곳에 드리워진 작고 여린 그림자에 그 흐름을 얹어 넣고 있었다. 그 미묘한 그림자의 요동 속에서 흐릿하고 여린 마력이 생성되었고, 아주 엷고 성긴 그물처럼 장벽이 지어지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손바닥 반 토막 정도의 튼튼한 마력방패라도 만들 수 있는 바탕이 꾸며지는 셈이었다.
여기에 윌 라이트의 마력을 제대로 공급해주면 셰이아는 단숨에 강력한 마력장벽을 둘러칠 수 있을 듯했다.
‘티 안 나게 감추고 다녀야 비장의 수단인 거지.’
투란은 드라고니아에게, 한편으로는 셰이아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소리 없는 투란의 의지가 셰이아에게 명확하게 전달된 듯 그림자가 미묘하게 찰랑이며 더욱 차분한 파동을 퍼드리며 티끌 모으듯이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호오? 제법 정령을 다독일 줄 안다는 거냐?
드라고니아가 놀리듯이 말했다.
‘잘 가르쳤다고 자랑할 곳이 배운 나밖에 없지?’
투란도 냉큼 맞받아쳤다.
퐁, 땀방울을 살짝 튕기며 휘드라곤이 자취를 감췄다.
철없는 꼴 보기 힘들다는 듯.
셰이아 역시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파동과 함께 흔적을 감췄다.
―예민하고 영리하군.
드라고니아가 여전히 붕붕삭삭, 묘한 반향을 흩뿌리고 맴돌며 투란이 문장을 전환시키는 과정을 지키는 사대속성의 정령수, 마력으로 가공해서 조성해낸 스피릿 아티팩트 넷이 뭔 일 났느냐는 듯이 무심한 분위기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투란도 쓴웃음과 함께 살짝 투덜거린다.
‘크게 저질러놓는 거라면 절대 누구한테도 안 지려 하고 말이지. 그거 원래 네 성격이지?’
―자신을 탓해라! 남 탓하지 말고!
‘흥, 배운 대로 할 뿐!’
파앗!
투란의 등 뒤에서 금빛비늘이 영롱한 날개가 뻗어나왔다.
콰릉.
마법으로 공중에 지어졌던 움막이 발판이었던 자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뭉클거리는 와중에 한 줄기 돌개바람이 그 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투란은 이미 높이,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 날고 있었다.
시야에 비치는 붉은 실을 따라서…….
화아앙!
허공을 울리는 바람 소리가 세차게 투란의 귓가를 울렸다.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서기 위해 드레이크의 날개를 움직인 탓이었다.
주변을 휘젓는 회오리가 사납게 투란을 휘감으며 도도한 금빛비늘의 날개에 부양력(浮揚力)을 선물했다.
‘저거 같은데…… 일단 산이라고 해야겠지?’
갸웃하면서 투란은 눈앞에 펼쳐진 지형에서 도드라진 바위산을 내려다봤다.
언덕이라기에는 좀 심하게 컸고, 주변을 무시하듯 사납게 불룩 솟아오른 탓에 사방에 절벽을 들이대고 있는 형태였다. 구름을 발아래 둔 채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투란의 눈에는 들판 한곳에 거대한 바위가 덜렁 놓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 길쭉한 타원형이라 해야겠지만 여기저기 삐죽거리는 꼴은 잘못 그려진 원형이라고 봐도 될 모양…… 마치 북벽산맥에서 떨어졌다가 한참을 굴러나온 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봐도 될 지경이었다.
―돌산이라고 할 만하지. 뭐 절벽이 평원에서 우뚝 치솟으면 다 저거 비슷한 모양이 될 거니까, 나름 평범한 바위 절벽 산이라고 해둬.
‘절벽에다가 산까지, 그냥 다 갖다 붙이냐?’
―그보다 몬스터가 산 정상을 서식지로 삼고 있다는 것부터 따져 봐야잖아? 지도에는 분명히 저 암벽산이 목적지인데 말이지.
‘그래, 몬스터기는 하지. 독수리한테 쪼여서 깩깩거리고 도망치기는 하지만 말이야. 근데, 저거 날개도 달린 놈이 날지는 못하는 거냐?’
암벽산의 정상은 수백 미터의 너비를 지닌 채였고, 잔나비와 비슷하지만 잔나비일 리가 없는 몬스터가 여기저기 서너 마리씩 무리 짓고 있었다. 어떤 놈은 늘어져 뒹굴고, 어떤 놈은 여기저기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등…… 몬스터라기보다는 배고픈 짐승 같은 행태를 보이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한편에 자리 잡은 독수리 둥지 가까이 갔다가 발톱에 베이고 부리에 쪼이며 도망치는 녀석도 있었다.
붉은 피부, 살갗이 돋아 작은 뿔의 모양을 만든 머리, 피부가 늘어진 듯한 날개 사이로 녹색의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투란에게는 낯선 몰골이었다.
―뭐, 임프가 그렇지. 헬임프처럼 불길이 흐르는 핏줄 대신에 독을 머금은 피를 지녔다는 것만 빼면 산속의 원숭이 한 마리도 못 이길걸.
‘독? 피에 독이 있는데 독수리가 부리로 막 찍어?’
날짐승이라도 이런 곳에서 사는 경우라면 독이 배어 있는 상대를 저런 식으로 구박하고 피나게 할 리가 없다. 여기는 인간보다 짐승이 더 몬스터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곳이니까.
―화이트 벌쳐잖아. 시체 먹는 흰독수리. 몬스터 시체까지 뜯어먹는 녀석들이라 배 속은 거의 마수 수준이지. 피를 녹색으로 물들인 정도로는 여기 사는 새에게 전혀 위협이 못 될걸.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은 머리를 긁적였다.
날개는 까맣지만 머리부터 몸통까지는 하얀 독수리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라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애매한 날개를 달고 있는 임프의 체격으로는 뭘 어찌 못 하는 것이 정상적이기는 했다.
그리고 저런 아래의 풍경, 몬스터와 날짐승이 살아가는 광경은 투란이 여기 와서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마도사의 흔적은?’
―특이한 동굴이 한 곳 있다만.
‘어떻게 특이한데?’
―프로브가 그 근처로 다가가질 못해. 감지도 안 되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바위라면 그냥 꿰뚫어 보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 투시도 안 되고 마력으로 이뤄진 프로브가 들락거리지도 못하는 암벽산이란 말이다. 저게 통째로.
‘호오?’
투란은 겨우 드라고니아의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멀리서 암벽산을 둘러보고 그 형태를 가늠하면 동굴이 뚫렸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지만 정작 동굴 안으로, 암벽산의 내부로 프로브의 탐지 범위를 넓히려 하면 눈뜬장님 꼴이 되는 것.
드라코눔의 프로브를 이런 식으로 방해한다는 것은 보통 수준의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제대로 찾아왔네, 동굴 입구는?’
―이대로 내려가면서 왼쪽으로 조금 틀고…….
눈동자에 비춰주면서도 설명까지 해줬기에 투란은 곧바로 동굴 입구 쪽으로 하강했다. 드레이크의 날개가 마지막으로 방향을 잡아 투란을 쏘아 보내면서 사라졌고, 투석기로 쏘아진 돌처럼 투란은 동굴 입구 앞에 거친 소리와 함께 내려섰다.
쿵.
발소리라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소리가 훤히 열린 동굴 안으로 그대로 스며들었고, 깊은 메아리가 잔잔하게 동굴을 울리며 퍼져가는 듯했다.
암벽산의 높이가 대강 가늠해도 백여 미터에 가까웠기에 지름이 5미터 정도 되는 큰 구멍은 어딘가 벽 귀퉁이의 쥐구멍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가 맴돌았다. 몇 미터 들어가지 않아 드리워진 그늘이 순식간에 시커먼 어둠처럼 보이는 탓에 큰 쥐구멍 안에 쥐가 아닌 괴물이 살 거라 해도 믿을 만했다.
―생각보다 더 심한데?
드라고니아가 불쑥 하는 말에 투란이 되묻는다.
‘심하다니?’
―이거 그냥 마법이 아니야. 정령술이랑 엮인 마법이다. 어째 유적이랑 은근히 가까운 곳이라 싶었더니, 금색의 마도사가 유적 속에서 뭔가 얻은 것이 있었나 봐. 프로브를 밀어내고 차단하는 저 힘, 대지에서 끌어낸 정령의 힘과 비슷해.
‘비슷하다는 말은, 정령은 아니란 거?’
잠깐 눈살을 찌푸리다가 투란이 물었다.
―그래. 뭐랄까, 이건 꼭…….
드라고니아가 다소 고민하는 듯, 주저하는 듯이 말을 이으려 했다.
투란은 그 말을 다 듣지 않고 그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볍고 경쾌하게.
―야, 꺼낸 말은 다 듣고……!
드라고니아가 경솔하지 말라 경고하려는 참이었다.
‘정령을 뒤트는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잖아. 금색의 마도사가 남긴 가디언이 있다고 했으니까. 입구에 서서 구경만 해서 뭘 알겠어. 그냥 들어가서 내 눈으로 보면 된다고.’
드라고니아는 잠깐 할 말을 잃은 듯이 침묵했다.
그리고 투란의 행동에 한번 더 뭐라 하지 못했다.
겨우 30여 미터, 두어 번 구불거린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넓게 열린 듯한 빈터가 드러났는데 비어 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길게 뚫린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에서 내려온 햇살의 파편이 흐릿하기는 해도 분명히 밝혀주는 공간.
그 한복판에 우뚝 선 채로, 금색 사슬에 목과 허리, 손목, 발목이 감긴 몬스터가 있었다.
바싹 마른 몸집이었지만 넉넉히 4미터는 될 듯한 키와 굵직한 골격은 앙상함보다 살벌한 파괴력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몬스터, 머리와 허리, 팔다리 언저리에 하얗고 수북하게 털이 채워진 그 모습이 투란에게는 왠지 낯익었다.
―투란, 저거…….
“하하핫!”
투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찰캉, 찰캉.
크르르…….
땅밑으로 이어진 금색 사슬에 묶여 있는 오러 몽거가 투란을 향해 짜증과 불만이 가득한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