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5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54)
뿌욱, 빠악.
돌을 긁적이는 손가락 끝에서 나는 소리는 조금 괴상했다.
그 결과는 많이 괴상했다.
긁고 지나간 자리가 핏물이라도 맺힌 듯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니까.
“음?”
투란은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살펴봤다.
옴 문자라는 것이 한 번 긋기로 끝까지 모두 그려낼 수 있는 무늬였기에 이미 문자 형태는 붉게 피맺힌 색칠이 끝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조금 파리하게 변한 분위기만 띨 뿐, 진짜 출혈(出血)은 없었다.
―야아아! 말 좀 듣고 하라고! 그렇게 바로 골렘을 기동시키면 어쩌란 거냐! 어디 쓸모 있냐고 따지던 놈이 뭐 하는 짓이야앗!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피 나나 안 나나 갸웃하는 것 따위는 관심 두지 않고 가열하게 으르렁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골렘의 낯짝에는 새로운 무늬가 그어졌다.
이미 투란은 손가락을 뗀 다음이었지만, 피칠한 문자가 이제부터란 듯이 비어 있는 공백의 한편으로 번져가며 새로운 무늬를 그려낸 것이다.
그 결과 골렘의 머리 위가 푸슥거렸고, 핏빛 무늬가 번뜩이기 시작한 낯짝을 향해 덮개 같은 돌가면이 씌워졌다. 여태 머리 위에 불룩했던 돌이 사실은 따로 놀고 있었다고 밝히듯이 흘러내린 것이다.
본격적인 변화는 그다음부터 골렘의 온몸에서 뿌득뿌득하는 음향과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투란은 움찔해서 골렘 앞에 늘어놨던 물품들을 빠르게 챙겨 뒤로 물러섰다.
골렘이 느릿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뜨린 다리를 접으며 부스스하니 일어서는데, 울퉁불퉁한 바위의 형태가 압축되고 꾸물거리며 그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마치 이제까지는 위장이었고, 이제부터 제대로 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듯!
그 광경을 느끼면서 투란이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는데…….
―넋 놓고 보지 말고, 상상을 하라고! 저게 어떤 모양이면 좋을까 상상해!
드라고니아가 묘한 말을 바득바득하는 노여움과 함께 쏘아붙이고 있었다.
‘응? 상상? 얘 모습을?’
어리둥절했지만, 투란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훅훅 스쳐갔다.
통통하게 울퉁불퉁한 바위의 모습에서 바로 무쇠뿔 오우거가 떠올랐고, 곧이어 붉은 오우거가 연상되었다가 가장 최근에 본 조금 통통한 배불뚝이라서 살짝 우스웠던 타우루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투란의 상념(想念)에 호응하듯, 골렘은 뿌득뿌득 계속해서 형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뿔이 돋아났다가 가라앉았다가 온몸에서 가시 같은 뿔조각을 내밀었다가 거뒀다가, 소머리 모양으로 변하며 다시 뿔이 돋아가는…….
이를 지켜보던 투란은 어느 순간 미노타우루스를, 통통하고 재미나게 생긴 모습인 미노타우루스를 상상했다.
골렘이 바로 이 상상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빠드득, 빠각.
돌이 뒤틀리며 형상이 고정되는 것을 알리는 듯한 거친 소리를 흘렸다.
변화의 끝에 도달한 골렘의 모습은 압축된 근육이 울퉁불퉁하니 드러나는 팔다리, 꼬인 밧줄 같은 가슴 근육 아래로 통통하고 둥글게 튀어나온 배를 지닌 몸매, 굵직한 뿔 한 쌍을 자랑하는 소머리의 미노타우루스였다.
그 발가락 다섯 개가 온전히 사람의 꼴인 것을 보면서 투란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막판에 ‘진짜 미노타우루스?’라는 생각으로 재빨리 내려다봤는데, 골렘의 마지막 변화가 깔끔하게 그 기대에 호응하듯 마무리된 것이다.
‘이래서 상상하라고 했구나.’
뒤늦게 드라고니아의 말을 떠올렸다는 듯, 혀를 날름하며 투란이 소리 없이 말했다.
드라고니아는 잠깐 골렘의 주변으로 프로브를 움직였고,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 더 따지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한다.
―아무래도 초기형인 모양인데?
‘뭐? 초기형?’
―금색의 마도사가 처음 골렘을 다룰 무렵에 만든 거라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카엘이 공표했던 형태와 가장 가깝다는 말이다. 아까 새겨졌던 무늬, 네 손가락이 떨어진 다음에 저절로 새겨진 부분이 지워지면 파괴되는 약점을 의도적으로 간직하게 한 골렘이란 거지.
‘뭐?’
―하아…… 설명부터 들으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들어봐라. 골렘이 카엘의 꿈에서 비롯된 마도구, 생명을 흉내 낸 것이라고는 이미 말했지? 그 꿈에서 골렘을 다루던 일족, 쥬다스의 혈족(血族)이라는 부족은 불사(不死)라는 두 문자를 골렘에게 새겨서 움직이게 했고, 앞의 한 문자를 지워서 사(死), 그러니까 죽음이란 문자만을 남겨서 골렘을 멈추게 했다는 거야. 카엘은 그 꿈을 그대로 구현하려 했었어. 그래서 룬 문자 시스템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처음에는 한 문자가 저절로 새겨지고 그 문자가 지워질 때에 골렘이 멈추게 해놨다.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생각이 없으면 닥치고 들어라, 좀! 아무튼 초기의 골렘은 그렇게 멈추는 방식이 너무 노골적으로 노출된 형식이었어. 잘 살피다가 새겨진 마법문자 하나를 으깨기만 하면 바로 무너지니까. 때문에 골렘에 관심 있던 마법사들은 그 문자를 감추는 방법을 많이 연구했어. 대마도사가 만든 마법술식 전체를 뜯어고치는 것은 난해하지만, 거기에 외모의 일부를 감추는 특성을 부여하는 짓은 간단했으니까. 그래, 아까 본 것처럼 한 겹 더 가면을 씌워서 골렘의 약점이 될 무늬를 통째로 감추는 거지. 이게 가장 처음에 유행했던 방식이라서, 이런 스타일로 만들어진 골렘을 초기형 골렘이라고 불러. 나중에는 보다 다양하고 괴상한 방법으로, 아예 목적 자체도 다른 골렘도 구상되고 만들어진다만…… 이 녀석의 경우에는 카엘이 처음 시도했던 방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금색의 마도사가 아직 금색이란 별명이 붙기 전에 만든 것인가 싶다고. 그 시절이라면 아직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전이니까, 골렘을 제작할 수 있는가 자신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거지. 이모저모로 초기형이란 말이다.
‘으흠!’
투란은 열심히 듣는 시늉을 했다.
금색의 마도사 아겔페스가 아직 순수했던 시절, 그러니까 초기형이면서 대마도사 카엘이 처음 골렘의 마법을 알렸을 때랑 가까워서 초기형……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납득이 갈 듯 말 듯 한 애매한 기분이 왠지 짙어지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기분보다 골렘의 처분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겠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응? 뭘 어째? 이렇게 되는 거 봤으니까, 지우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잖아? 아, 근데 감춰진 무늬를 어떻게 꺼내…….’
투란의 생각에 호응하듯 바로 골렘의 머리, 바위 미노타우루스가 입을 열었다. 그 목구멍 깊숙한 곳에 마법을 완성한 문자의 무늬가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손을 뻗어도 닿을 듯했고…… 비록 손목까지 바위로 된 미노타우루스 목구멍에 넣는 해괴한 몰골이 되겠지만, 그렇게 손으로 지울 수 없다면 몽둥이나 칼로 쑤시면 금방 으깨서 지울 수 있어 보였다.
―부술 거냐?
불쑥 드라고니아가 묻는 말이 투란이 가만히 목구멍에 들이밀려고 내미는 손을 멈추게 했다.
‘뭐? 부수다니?’
―아까부터 착각하는 것 같더니…… 골렘은, 특히나 이 초기형 골렘은 한번 시동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 저 무늬를 지우면 그대로 마법이 해체되면서 붕괴한단 말이다.
‘에? 뭣이라!’
―그러니까 말 듣고 손을 댔어야지. 쯔읏!
슬쩍 타이르는 시늉을 했지만 드라고니아는 투란을 놀리고 있었다.
어디 쓸 거냐고 묻던 골렘을 냅다 움직이게 해놓고 필요 없다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푹푹 찌르면서!
―그냥 몬스터한테 밀어 넣고 얼마나 잘 움직이고 잘 싸우나 구경이라도 할래? 그거라면 골렘을 제작해놓은 마도사의 솜씨 감상 정도는 될 것 같다만…… 나중에 거창한 금색의 마도사가 되지만, 순수하게 대마도사의 길을 따라 한 초보나 다름없던 시절의 마법사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긴 하군.
‘왜 원래대로 안 돌아가는데에에에!’
―그건 나중에 카엘 찾아가서 묻든가. 아직 세상 어딘가에 있을 테니 말이야.
심드렁한 척하는 드라고니아의 말투, 그 안에 담긴 기묘한 기분을 투란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대마도사 카엘이 골렘의 이러한 약점을 일부러 만들어놨고, 꿈대로 만든 그 짓거리에 마법사라면 다들 많이 당황했었다는 것!
‘꿈속에서 봤으면 꿈속에서 본 약점 따위는 없애고 내놔야 할 것 아냐! 뭘 꿈이랑 똑같은 약점을 갖게 만드냐고오오오!’
―글쎄다…… 꿈을 현실처럼 추억하는 버릇 때문이라고 자기 입으로 그랬다는데, 뭔 생각인지 알게 뭐냐. 그래서, 어쩔 거야? 이대로 때려 부수고 갈 참이냐? 그야말로 네 생각대로 움직이는 착한 녀석인데?
‘그니까 내 생각대로 움직…… 뭐? 생각대로?’
투란의 질풍처럼 쏘아져 가던 생각이 멈칫했다.
생각대로 움직이든 말든 어디다 쓸 거냐고 따질 참이었다.
하지만 정말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앉아봐.”
손끝을 까닥하면서, 앉는 자세를 마음에 품고 투란이 지시했다.
골렘은 바로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벽에 기댄 채로 쪼그리고 앉았다.
딱 투란이 상상한 그대로!
―뭐냐?
그 자세가 많이 주눅 들고 풀죽은 아이를 떠올렸기에 드라고니아가 어리둥절했다. 뭘 시키더라도 이 엉뚱한 꼴은 대체…….
“진짜네.”
투란의 감상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감상 속에 담긴 생각은 간단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오우거를 만들면, 오우거를 가르쳐야 한다.
마법에 의해 가공되었을지언정 오우거는 ‘살아’ 있다고 봐야 하는 가공생명체이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야 비로소 제대로 부려먹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처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로 생각한 그대로 동작한다면, 차라리 골렘 쪽이 더 낫지 않은가?
투란의 이런 생각은 바로 드라고니아가 말하게 했다.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마냥 가만히 있는단 말이다. 판단능력도 없고, 그냥 주인의 의식을 기반으로 전해진 명령을 끝없이 실행만 한다고.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없어. 그거 보강한다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끙끙거렸다. 그냥 옆에 둔 채로 계속해서 주시하며 부려먹을 경우라면 네 생각대로 오우거보다 낫지만, 그래도 눈을 떼고 방치할 수는 없어.
‘가르쳐서 기억시킬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고?’
―이 녀석에게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단 말이야. 가공된 자아를 부여해서 골렘을 만들겠다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괜히 고민한 게 아니란 말이지.
‘고민까지 했구나…….’
헛웃음과 함께 투란은 깔끔하게 마음을 접기로 했다.
어디 쓸모가 있나 전혀 모르겠으니 끌고 다닐 수도 없고 마도구가 미쳐버릴 수도 있는 이런 곳에 두고 가기도 난감하고,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부숴야 할 참이다.
―결국 그거냐? 괜히 손대서 마도구 하나 그냥 망가뜨리는구만.
드라고니아가 혀를 찰 때, 투란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골렘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마도구?’
오우거랑은 많이 다른 골렘의 눈동자에 다시 투란의 눈길이 꽂혔다.
불쌍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은 돌덩이 미노타우루스, 어딜 봐도 그냥 섬세하게 터럭까지 조각해놓기만 해놓은 큰 바위일 뿐이었다. 오우거처럼 가만히 있으라면 눈알을 데굴거리며 굴리거나 훅훅 숨을 쉬거나 하는 낌새 따위를 풍길 리도 없는 모습, 그냥 이렇게 두면 움직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것이 골렘.
이런 것이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새삼 굉장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순간에 투란은 기분 내키는 대로 손을 활짝 펼치며 팔뚝에서 꺼낸 블랙레온을 움켜쥐고 명령을 뱉어내고 있었다.
“꼼짝 마라. 다음에 내가 꺼낼 때…… 아니, 꺼내서 다른 명령을 내릴 때까지!”
블랙레온의 검은 사자머리가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너울거리는 검은 장막이 펼쳐지며 골렘을 날름 삼켰다.
―엥? 지금 뭘!
“오우거랑 정말 다르구만. 후후훗.”
투란은 자랑스럽게 쳐웃었다.
블랙레온이 다시 투란의 팔뚝 속으로 사라졌다.
데몬스 러그가 깨끗하게 밀봉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투란이 계속 히힛거리니, 드라고니아가 황당함을 가득 담아 투덜거린다.
―이런 잔머리가 통하다니……! 정말 어이없구만!
‘잔머리라니! 골렘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 나의 똑똑한 판단을 잔머리라고 하지 마! 음하핫!’
―과연…… 오우거였다면 바로 질식시켜 뒈지게 만들었을 잔머리 맞네.
‘숨 쉬는 오우거를 넣을 리가 있냐! 어, 잠깐만. 여태 골렘을 마법배낭에 담아둔다는 생각을,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정말 없어?’
으스대던 투란은 돌연 고개를 갸웃하면서, 잘난 척하기는 했지만 너무 간단한 이 방법을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걸어다니는 놈을 마법배낭에 왜 처넣냐? 게다가…… 1톤 넘는 덩어리를 담을 마법배낭이 그리 흔할 리가 없잖아. 1톤 넘는 골렘과 그런 걸 담을 수 있는 마법배낭, 둘을 다 가진 경우는 더 드무니까.
‘음? 너네, 드라코눔에도?’
투란은 한층 더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