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7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72)
짙은 녹색이 무성해서 검게 보이는 숲, 두꺼운 갈색의 나무껍질조차도 녹색과 그림자에 파묻혀 본래의 색채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평소의 광경…… 그 일상을 깨뜨리겠다는 듯이 몰아닥친 벼락의 소나기 또한 본래의 색을 보여주는 대신에 새하얀 섬광으로 풍경을 덮고, 그 속에 금색의 조각과 벌건 불꽃을 처바르고 있었다.
뒤늦게 연잇는 뇌성(雷聲) 속에서 검은 표범이 질풍(疾風)처럼 앞발을 휘둘렀다.
하얀 발톱이 검은 발가락 사이에서 튀어나온 꼴이 눈에 선명할 때, 검은 표범의 형체 모두를 그림자처럼 덮어 버리는 번개의 그물이 튀어나왔다. 그물은 검은 표범을 스쳐 지나왔고, 발톱이 가리키는 쿤토르를 향해 뭉쳐들었다.
투란이 손발을 오므리면서 번개 그물의 파편을 피하는 사이, 쿤토르는 고함을 치며 검은 표범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모그와아!”
크어헝!
파칫, 퍼억!
표범의 자연스러운 포효, 번개 그물이 사방을 휘젓고 긁는 음향, 격돌의 파문이 겹쳐지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표범의 행로를 드러내는 듯한 발자취처럼 불길이 저편에서 사라져가는 번개의 금빛을 지우듯이 치솟아 올랐다. 섬광이 내리치고 지나가니 본격적으로 불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것처럼.
시커멓고 격렬한 맹수와 녹색의 문신이 몸을 타고 꿈틀거리는 탓에 그보다 더 징그럽고 사나워 보이는 쿤토르를 보면서 투란은 ‘저런데 마수라니!’라는 소리를 웅얼거리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번개 그물을 휘둘러대는 검은 표범의 형체는 더욱 빨라졌고, 쿤토르는 양손에 쥐고 있는 송곳니 단도를 휘두르기보다는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표범의 발톱과 번개 그물을 피해내고 있었다.
퍽, 파칫.
캬아앙!
“모오오오!”
쿤토르와 표범의 동작이 엇갈렸고, 처음으로 송곳니 단도가 표범의 옆구리를 긁어댔다 싶은 순간에 번개의 끝자락도 쿤토르를 할퀴었다. 비명인 듯, 포효인 듯한 애매한 소리가 짐승과 사냥꾼 사이에서 격하게 터져나왔다.
그리고 아예 피하지 않고 서로를 두들기는 난타!
철철 흘러넘치도록 피가 솟구치며 누가 사냥감이냐고 따지듯이 상처 입히는 것에 몰두하는 듯한 싸움이 이어졌다.
어찌 봐도 하나가 죽어야 끝날 듯한 광경.
‘교감이라더니!’
투란은 저래서야 그냥 잡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튀어오는 번개 조각, 튕겨나오는 돌과 나무의 파편이 너무 매섭고 사나웠기에 슬그머니 방패가 되어줄 나무 틈새로 몸을 굴리는 탓에 투란에게는 따질 틈이 없었다.
―그래도 치명적인 상처는 서로 잘 피하는군.
드라고니아는 투란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별하고 있었다.
‘치명적이었으면 벌써 하나 쓰러졌겠지!’
번개 그물과 송곳니 단도가 스쳐가기만 하고 제대로 서로를 향해 꽂혀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투란이 소리 내지 않고 툴툴거렸다.
과연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슬쩍 돕기를 해야 하는가.
나중에 시침 떼고 넘길 일이라면 투란도 빨리 끝내라고, 그동안 함께 온 상황을 고려해서 냉큼 쿤토르를 도왔을 터였다. 그러나 그동안 봐온 쿤토르는, ‘오르카 켈카르’라는 종족은 사냥…… 사냥감과의 투쟁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누가 끼어들면 원수 취급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러니 투란이 쿤토르를 눈에 띄게 도우면, 검은 표점 다음에 투란이 쿤토르와 싸워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투란이 망설이는데…….
―한 번에 끝나지 않아, 모그와는…….
갑작스럽게 드라고니아가 묘한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봐라, 보면 알아.
갸웃하면서 투란이 몸을 가린 나무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보니, 마침 검은 표범이 격돌 후에 벌어진 짧은 간격을 향해 발톱을 내지르고 있었다. 앞발에서 선명하게 돋아난 발톱에는 이제까지와 다르게 아예 번개가 맺혀 있는 참이었고, 그 발목 주변으로 그물처럼 광채를 뿌려내는 중이었다.
투란이 보기에 쿤토르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모그와아앗!”
괴성과 함께 녹색의 문신이 쿤토르의 몸에서 벗어난 것처럼 부풀면서 칙칙하게 빛났다. 느닷없이 허공을 녹색으로 가로질러 칠해버린 듯한 광경이었고, 번개 그물은 그 채색 속에 파묻혀 지워졌다.
‘우와?’
투란이 감탄하면서, 그래도 검은 표범이 머리부터 들이박으며 쿤토르를 그냥 발톱으로 찢어발길 틈은 열렸지 않나 싶어 보는데…….
크허엉!
검은 표범이 우렁찬 포효를 남기고 날름 뒤로 껑충 뛰고 있잖은가.
그리고 쿤토르가 갑자기 탈진(脫盡)한 것처럼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은 표범이 카학카학,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뒤로 물러섰고 나무 사이로 엉덩이부터 들이밀면서 그림자 속에 숨듯이 사라졌다.
쿤토르 역시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는 듯, 한쪽 주먹으로 땅을 짚는가 싶더니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뒤이어 격렬한 싸움터로 찾아온 것은 고요.
투란은 눈을 끔벅이며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둘이 짰……을 리가 없는데?’
몬스터이든 짐승이든, 저런 피투성이 싸움의 결말은 항상 한쪽의 죽음이기 마련이었다.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짐승과 짐승이 싸우더라도 어정쩡하니 끝나는 경우는 그냥 지나가다가 툭툭 장난처럼 건드려볼 때의 일이지 저리 싸우고 나서는 한쪽이 반드시 죽는다.
한데 지금 쿤토르와 검은 표범은 서로를 향해 마지막 남은 한 번의 치명타를 주고받는 대신에 의논한 것처럼 갈라섰다.
―엉뚱한 생각 하기 전에 쿤토르한테 물이라도 가져다줘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오르카라도 저렇게 탈진한 상태에서 탈수까지 겹치면 며칠 일어나기 힘들어.
‘어? 어…….’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은 어리둥절한 채로 쿤토르가 싸우기 전에 내려놓은 것들을 뒤척였다. 굽지 않고 그냥 말린 사슴고기가 조금 있었고, 아침 일찍 나뭇잎 사이를 훑어서 가죽에 받아둔 물주머니가 있었다. 모두 며칠 동안 쿤토르의 부지런함으로 획득한 것들…….
일단 물주머니를 들고, 혹시나 해서 사슴고기 묶음도 챙겨서 투란은 쿤토르에게 다가갔다.
헉헉거리는 숨결 속에서 쿤토르는 가만히 투란을 보더니, 잠시 구경만 하듯이 물주머니를 바라만 봤다. 그 꼴에 투란이 슬그머니 묻는다.
“입에 부어줄까?”
“아니다. 그냥 손에 쥐어다오.”
힘이 다한 듯한 쿤토르의 대답에 투란이 과연 손을 들 힘은 있는가 의심하는 눈초리부터 한 채 그 손에 물주머니를 쥐어줬다.
쿤토르는 훅훅거리는 거센 숨을 두어 번 몰아쉰 다음, 냅다 팔에 힘줄이 도드라지게 하더니 물주머니를 당겨 자기 이빨 사이에 주둥이를 끼웠다. 그리고 손을 툭 떨구더니 그대로 거세게 숨을 들이쉬면서 물주머니를 빨고 있었다.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쿤토르의 송곳니 사이로 물이 새는 것을 보며 투란은 사슴고기도 묶음을 풀어 그 손에 올려줬다. 그래도 한동안 물만 마시겠다는 것처럼 쿤토르는 물주머니를 빨았고, 지루해진 투란이 한편에 주저앉고 멀뚱히 구경하는 자세까지 취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일어나 앉아 사슴고기를 뜯어 씹기 시작했다.
―회복이 빠르군.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투란에게는 참 오래 늘어져 있었구나 했던 시간을 드라고니아는 사실 매우 짧다고 짚으며 조용히 감탄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투란은 숨을 고르는 쿤토르에게 가만히 묻는다.
“쫓을 건가? 기다릴 건가?”
검은 표범이 어디까지 갔는가 알 수 없지만,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쿤토르가 쫓아가서 결판을 낼 것인가, 아니면 검은 표범이 씩씩거리며 다시 돌아와 끝장을 보려 할 것인가.
“모그와를 느끼고 처음 먹잇감을 먹으려 할 때 덮쳐야 한다. 쿤토르의 모그와를 검은 벼락이 잊기 전에!”
강경한 쿤토르의 말이었다.
투란은 눈만 깜박이면서 쿤토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대로 하려면 쿤토르가 지금 씩씩거리면서 이렇게 앉아서 사슴고기를 뜯어먹을 때가 아니잖느냐고, 굳이 말로 묻지 않고 눈빛만으로 묻는 셈이었다.
쿤토르는 그런 소리 없는 물음을 알았다는 듯, 송곳니가 삐져나온 입술가를 실룩이면서 손으로 무릎을 짚기까지 하며 힘겹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투란에게 담담하게 말하기도 한다.
“인간, 고기와 가죽을 부탁한다. 쿤토르는 지금부터 모그와의 시련에 온 힘을 다한다. 다른 일은 인간에게 맡겨야 한다.”
“어, 그래.”
투란은 복잡한 생각을 치우고 간단히 대답해버렸다.
어쨌든 사냥 보조로서 쿤토르가 지금까지 사냥해서 챙긴 것들을 들고 졸졸 따라만 다니면 되는 것이니까.
한편으로는 과연 지금 온몸에 녹색 문신 사이로 발톱과 벼락에 할퀴어진 상처까지 더해진 쿤토르가 제대로 검은 표범을 쫓을 힘이 남아 있는가 궁금하기도 하니, 투란은 아주 진지하게 구경만 할 셈이었다.
그리고 앞장서 가는 쿤토르를 보며 재빨리 투란은 짐을 챙겼고, 드라고니아에게 소리 없이 물으며 뒤따랐다.
‘정말로 벼락 부르고 번개 뿜는 검은 표범에게 무슨 주술이 걸린 거야?’
―걸렸을 거다, 아마도.
드라고니아의 대답이 조금 시원찮게 들렸다.
그 까닭을 투란은 바로 물을 수 있었다.
‘정말 쿤토르네…… 오르카의 주술이 어떤 마법인가 감도 못 잡는 거냐?’
―모그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전승 주술이란 것은 알지.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현되며, 어떻게 그 효과를 발휘하는가는…… 솔직히 짐작도 못 한다. 드라코눔에서 내려진 결론이라고 해봐야, 대마도사 카엘이…….
‘야, 카엘이 왜 나와?’
이야기를 끊고 투란이 짚어 물었다.
소소한 바람이 뾰족한 나뭇잎 사이를 헤쳐나갔고, 검은 표범의 자취 같은 검게 타서 파인 나무가 죽지 않고 버티는 풍경도 눈에 띄었다. 길이라고 하기는 힘들어 보이는 나무를 타고 뛰어간 듯한 흔적을 쿤토르는 그 우람한 체격으로 밀어 파고들듯이 지나갔고, 투란은 그렇게 열린 흔적을 따라 움직이며 드라고니아와 잡담처럼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었다.
―대주술사 카엘이라고 녀석이 말했잖아? 기억나지? 그게 대마도사 카엘 맞다.
‘아, 그 미친 소리…… 오르카 켈카르를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불러왔다고 한 그 이야기? 진짜였냐?’
―얌마! 그거 내가 한 이야기잖아! 진짜라고! 정말이라고! 카엘이 저지른 짓 중에서 언제나 가장 미친 세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끼어드는 것이 바로 오르카 켈카르의 대소환이란 말이다!
‘대소환? 그 얘기는 없었잖아?’
―종족 전체를 소환해버린 일이니까 대소환이라 부르지. 규모도 그렇고, 불러오자마자 이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시켜버린 것도 그렇고…… 아무튼 트롤도 있고 고블린도 있고 오우거도 있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오르카도 있어야 한다는 궤변(詭辯)을 지껄이면서 카엘이 소환했다. 미친 소리를 하며 저지른 짓이기는 하지만 헛짓이라고 하지는 않아. 오르카란 종족이 소환되면서 이 북부의 폐허는 순식간에 숲이 치솟았고, 북벽 산맥 전체를 이 녀석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지금 네가 보는 대삼림이 바로 완성되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숲을 어머니라 부르는 이 녀석들을 통해 춤추는 산맥의 북쪽을 틀어막는 대삼림의 방벽을 만들어낸 거나 다름없지. 단지 이 녀석들이 지닌 문명이…… 언제나 모그와란 말로 뭉뚱그려진다는 것이지.
‘마법이 아니라 문명이냐? 어, 검은 표범이다!’
투덜거리려던 투란은 문득 저 너머 나무 틈새에 웅크린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봤고, 그 광채가 돋는 시커먼 털가죽의 이곳저곳이 송곳니 단도에 파인 것을 살피며 쿤토르를 흘깃했다.
쿤토르는 검은 표범이 저편에서 홀랑 타버린 뭔가를 앞발로 부여잡고 뜯어먹는 광경을 확인하자마자 내달리고 있었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모그으으으와아아앗!”
검은 표범에게 ‘내가 간다!’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투란은 그 모습에서 정상적인 사냥과는 아무 먼 것이라고, 전사의 시련인지 모그와의 시련인지 알 수 없는 ‘오르카 켈카르’의 문명을 그냥 감상하기로 결정했다. 도대체 저 짓의 결말이 어찌 될는지, 참으로 궁금해지지 않는가.
캬아앙!
파칫!
몸을 일으키자마자 성난 소리를 내지른 검은 표범이 순식간에 온몸에 번개를 두른 채로 쿤토르를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두 앞발을 한껏 당긴 채로, 마치 쿤토르를 포옹이라도 하겠다는 자세였는데…… 그 품 안이 번개가 질주하는 그물의 광채가 가득한 것이 꽤 섬뜩한 모습이었다.
‘어, 저러다 홀랑 튀겨질 것 같은데?’
구경꾼으로서 투란은 걱정했다.
쿤토르는 한층 더 강렬하게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모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