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7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75)
머나먼 옛날, 천년도 훌쩍 넘어버릴 거라고 하는 그 먼 옛날에 그림 투아란이 있었고, 드래곤 로드라 불렸지만 죽었다.
그리고 그림 투아란의 드래곤이 격노했다.
그 격노가 세상에 저주가 되어 퍼져나갔다.
저주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드래곤이 계약자를 잃은 격노를 온갖 언어로 토해냈기에!
그중에서 가장 유명했기에 대마도사 카엘이 쌓을 명성의 반석이 돼버린 저주가 있었다.
천 년도 훌쩍 지난 다음에는 ‘언어의 혼돈’ 혹은 ‘대화의 파괴’라고 불리게 된 그 저주는 마주한 이들이 언어를 구사할 지적능력을 갖췄을 때 그 위력을 발휘했다. 둘이 서로에게 하는 말이 완전히 어긋나서 전혀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한다는 그 효과.
단순히 소리를 매개체로 삼은 ‘언어’만이 그 저주의 대상이 아니었다.
문자와 손짓, ‘대화’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저주의 영역 안에 놓여 있었으니!
그로 인해 ‘사랑한다!’ 가 ‘증오한다’로 바뀐 정도는 웃음의 소재였을 뿐이었다.
서로 지껄이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것 또한 기막힌 상황에 불과할 뿐이었다.
저주는 똑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를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부수적인 효과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응, 들어본 적이 있어. 누가 뭘 훔쳤냐고 물어봐서 저놈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누가 내 원수냐고 묻는 말이었고 ‘내가 그랬지롱!’ 하고 약 올리는 꼴이 되어서 대가리 터져나가는 옛날이야기. 하지만 결국 카엘이 해결했다면서?”
투덜투덜.
잠에서 깰 기척이 없는 쿤토르를 한편에 두고, 지나가던 도마뱀을 잡아 올려놓고 통으로 굽는 모닥불을 돌보면서 투란이 나직하니 읊조리는 중이었다. 드라고니아가 교양 없다 탓하면서 길게 늘어놓는, 기억의 한구석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이었다.
숲은 일찌감치 어둠을 드리우며 저무는 노을을 나무 꼭대기에 얹은 채였고 바람이 스쳐가며 밤과 함께 깨우는 짐승의 울음과 기척을 여기저기 옮기고 있었다. 그 속에 덩그러니 비어 있는 자리에 모닥불을 피우고 쿤토르의 코골이 소리와 함께 투란은 고기 굽는 냄새를 자욱하게 풍기는 중이었다.
―카엘이 자신의 어휘능력을 기반으로 세상을 향해 통역(通譯)이란 대마법을 걸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카엘이 지닌 언어로 물들었고, 그게 유일한 언어의 섭리처럼 자리 잡아버렸지. 드라코눔의 일족이 이 세상에 닿았을 때, 가장 먼저 지성의 구조를 파고든 것도 그 언어의 섭리였다고 하더군. 덕분에 말을 할 줄 아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더군.
‘뭔 소리야? 말을 할 줄 아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원래 하나의 세계라도 사용되는 언어는 여럿일 수 있다.
‘아, 연금술사랑 마법사가 같은 뜻인데 서로 전문용어라고 따로 쓰는 그런 거?’
―아니, 그냥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 몽땅 다르다. 이를테면, 마법사가 자신들만의 전문용어로만 살고 연금술사도 그렇게 산다면 둘의 말은 전혀 다른 구조가 돼버리고 말지. 그런 것을 중간에서 중개해주는 것이 통역이란 마법이고, 카엘은 그걸 대마법 규모로 이 세상에 걸어버렸다는 거야. 덕분에 드래곤의 저주 한 가지가 기괴하게 해제(解除)된 효과가 생겨났고 말이지.
‘흠…… 아무튼 옛날이야기잖아? 그렇지?’
도마뱀 뒷다리를 찢어내면서 투란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에 물고 우걱우걱 씹는 채로 웅얼거렸다.
이미 해제된 저주에 대해서, 이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저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필요가 없잖은가?
매우 실용적인 투란의 태도에 드라고니아가 쓴웃음과 함께 대꾸한다.
―그래, 지금은 전혀 걱정할 까닭이 없는 옛날이야기지. 오르카 일족이 아무리 기묘한 말투라 해도 말뜻이 안 통할 일도 없기는 해. 하지만 투란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몽땅 믿지는 마라. 같은 말이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멋대로 쓰는 경우가 있으니까. 인간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암어(暗語)니 은어(隱語)니 하는 식으로 말을 꼬아서 떠들 때도 많거든. 아, 너라면 사냥꾼의 밀어(密語)라고 하면 더 쉽게 알아듣겠냐?
‘대충 알았어. 그런데 쿤토르, 얼마나 잘 작정일까?’
설마 해가 저물 때까지, 모닥불을 다 피우고 이렇게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상황에서도 코를 골며 깰 생각이 없을 줄은 몰라서 투란은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냥 가슴팍에 산 짐승이라도 올려놓으면 깨려나 하는 못된 생각도 불쑥 찾아들고 있는 중이고!
캬앙, 컁!
울버린이 모닥불 옆에서 울었다.
“얘는 왜 안 가지? 야, 너 왜 안 가냐?”
도마뱀 뒷다리 뼈까지 씹다가 투란이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머리를 씹힐 뻔하고 거친 혀로 핥아서 졸도시켜놨던 녀석이 깨어나서 두리번거릴 때는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그냥 빈터를 맴돌면서 씩씩거리며 투란이 뭘 하는가 한참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모닥불 가로 와서 투란을 보며 앵앵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뭘 어쩌자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흐흠, 먹을 것 달라고 보채는 것 아닌가?
‘뭐? 나한테? 왜?’
―글쎄다? 짐승의 행태란 것이 몬스터만큼이나 제멋대로이고…… 오소리든 울버린이든 개체마다 성격도 전부 다르잖아? 짐작이 안 된다.
‘모른다는 말, 참 길게도 한다!’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투란이 으르렁거리는 시늉을 했다.
소리 없는 말은 못 들었지만, 들었어도 의미를 알 수 없었을 테지만 그 표정을 본 울버린이 냉큼 납작 엎드리면서 죽은 척했다! 그리고 여전히 작게 크게 흘러나오는 쿤토르의 코골이 소리…….
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말로 할 수는 없었지만, 투란은 바로 자신의 충동에 따라 움직였다.
잘 구워진 도마뱀 꼬리 끝을 끊어서 쿤토르의 두툼한 가슴팍에 올려놓고 배 위에 울버린을 얹어놓는 짓이었다. 도마뱀 꼬리의 구운 향이 바로 울버린의 코로 스며들게 방향까지 잘 잡아서!
충동적인 투란의 행동에 울버린은 바로 본능과 충동을 따른다는 듯이 코앞에 놓인 구운 도마뱀 꼬리를 앞발로 잡고 덥석 물고 있었다. 그리고 쿤토르의 손은 그런 울버린의 등짝을 덥석 잡아 입가로 가져갔고!
쿤토르의 입술 끝이 살짝 열리면서 바로 울버린이 물고 있는 도마뱀 꼬리의 반대편을 물었다. 부스스한 자세로 쿤토르가 일어나 앉으니, 울버린은 굳었던 몸이 풀렸다는 듯이 앞발로 계속 도마뱀 꼬리를 당기면서 더 많은 부위를 씹겠다고 캬릉거리고 있었다.
“숲의 개구쟁이?”
으석, 자기가 문 꼬리를 끊어 바로 삼키고는 쿤토르가 중얼거렸다.
“흠? 아는 녀석이야? 도망도 안 치면서 계속 얼쩡대고 있었는데.”
문득 투란은 이 울버린이 쿤토르와 이미 아는 사이라서 저리 배짱 좋게 곁으로 와서 그러고 있었나 하며 나름대로 납득할 만하다 생각할 수 있었다. 원래 오르카 일족이랑 낯을 익힌 녀석이라면 곁에 묘한 인간이 있더라도 뭉개고 버틸 만할 테니까.
드라고의 형상을 드러냈다고는 해도, 모그와로 여러 형체를 드러내는 오르카에게 익숙하다면 그럴 만하잖은가?
쿤토르는 이런 투란의 추측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숲이 키우는 자식이다. 부족이 사냥을 끝내면 냉큼 사냥감에 올라타고 자기 몫을 달라고 하는 짓궂은 녀석이다. 오르카 사냥꾼 사이에서는 어머니 숲이 낳은 미친 자식이라고 평판이 나쁘다.”
“어, 그래.”
어처구니없는 설명에 투란은 울버린을 바라보며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방귀 오소리 녀석은 원래 성질이 그렇다는 것!
샤오콴 마을 근처에서 저런 성질머리로 산다면 하루가 가기 전에 어떤 놈 배 속으로 들어가서 삭혀질 터였다.
‘아, 그래서 저런 짐승은 없는 건가?’
문득 방귀 오소리랑 닮았지만 그래도 다른 종이란 것을 되새기면서 투란은 새롭게 자신을 설득했다. 방귀 오소리는 방귀 뀌고 도망친다, 한번 위협을 받아서 겁을 먹으면 다시 와서 엉겨 붙지 않는다. 이 녀석, 울버린처럼 남이 사냥한 것에 올라타고 까불 일도 없었다.
―토끼도 사슴도, 도마뱀도 처음 보는 품종이라며?
윌 라이트의 마력공명을 멈춘 채, 문장의 풍경 속에서 드라고니아가 툴툴거렸다.
쿤토르가 느릿하니 모닥불 앞에 울버린을 내려놓으면서 냉큼 도마뱀의 머리통을 뜯어냈다. 그다음 당연하다는 듯이 그 머리통을 코끝부터 물어뜯고 갈아먹는다. 다른 것을 따질 여지 따위는 없다는 듯, 식사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투란은 가만히 뒷다리 한 짝을 뜯어 먹으면서 함께 식사했다.
우걱우걱하는 식사의 침묵이 끝난 후, 길게 트림하면서 쿤토르는 허공을 잠시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투란도 흘깃 올려다보니 별빛이 아련하게 뾰족한 나무 끝에 걸린 듯한 밤하늘의 풍경이 짙게 펼쳐져 있었다. 작은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별빛에 밝혀진 밤하늘은 어딘가 시원해 보였다.
돌연 쿤토르의 목소리가 굵직하게, 무겁게 투란의 귓가를 찔렀다.
“인간, 왕이 된다.”
“음? 뭐?”
“왕이 된 인간, 쿤토르를 다시 만난다. 그 때, 쿤토르가 길잡이한다.”
이어져 나온 쿤토르의 담담하면서도 강인한 각오를 다진 듯한 말이 투란의 입이 그냥 벙긋거리게만 했다. 그와 함께 투란의 마음속으로는 문장 속을 울리는 드라고니아의 웃음소리가 괄괄괄 흘러들고 있었다.
진지하고, 신중하게 쿤토르의 말이 이어진다.
“예언은 틀림없다. 인간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왕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왕이 된다. 그 때 쿤토르를 다시 만난다, 숲의 마수를 사냥한다. 예언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뭔가 지독한 각오를 한 듯한 적갈색 눈빛이 번뜩거리는 쿤토르의 표정에 투란은 아주 맹한 대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투란의 뇌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물음은 입 밖으로도, 눈빛으로도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라 하고 싶은 충동은 투란의 마음에 한가득!
‘이 자식, 설마 미친 사제나 미친 살인자 같은 타입이었나?’
끙끙거리는 사이에 투란은 농담처럼 들었던 이야기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둘 다 미친놈 이야기인데…….
미친 사제가 신탁을 받아서 어떤 사람을 찾아가 ‘내일 해뜨기 전에 당신 목이 부러질 것이오. 나는 그걸 치유해주기 위해 왔소.’라고 했는데 해뜨기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대체 언제 내 목이 부러지오?’라고 미친 사제에게 물었더니, 미친 사제는 바로 그 사람의 목을 부러뜨리고 치유해주고서는 ‘신탁은 절대적으로 지켜지오!’라고 말하며 떠났다고 했다.
미친 살인자 역시 비슷한 이야기였다.
아는 사람에게 ‘넌 해지기 전에 죽는다, 반성하고 죽어라.’라고 했지만 날이 다 저물어가는 와중에 죽지 않자 자기 손으로 죽이고 ‘반성했기를 바란다.’라고 지껄였다는 미친놈의 살인 이야기…….
쿤토르가 하는 말의 맥락은 딱 그렇게 들리고 있었다.
예언이 옳으니까, 투란에게 왕이 되라니!
이런 미친 녀석, 오르카에게 뭐라 해줘야 하는가?
―야, 그런 거 아냐.
겨우 웃음을 그친 듯, 웃음과 별개라는 듯이 신중한 낌새를 잔뜩 피우면서 드라고니아가 말하고 있었다.
―약간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투란 네 생각이랑 많이 다르다. 어쩌면 이 녀석, 서약이라도 할지 모르겠군. 흐흠…… 그렇다면, 내게 맡겨볼래?
‘뭐? 맡겨? 너한테?’
투란으로서는 한층 더 얼떨떨한 제안이었다.
이 상황에서 드라고니아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마 이 자식도 정신줄 놓은 짓을 하려는 것인가?
역시 생각하지 않아도 치솟는 의문이 투란의 뇌리에 채워질 때, 돌연 윌 라이트의 마력이 세게 맥동하면서 빛의 고리를 허공에 띄웠다.
쿤토르의 얼굴을 훤히 비췄고, 그 우람한 뱃가죽 위에 들러붙은 울버린의 터럭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빛의 고리였다. 그다음에 바로 이어진 웅웅거리는 고리의 울림이 말을 한다.
“오르카여…… 예언을 신뢰하는 자여, 예언을 이루기 위해 서약을 하겠는가?”
투란은 눈을 껌벅였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설마 드라고니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마법을 이용해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한데 쿤토르는 오히려 이 예상 못 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가호하는 자여, 어떤 서약을 말하는가?”
침착한 되물음은 대체 뭔가, 투란에게 그 태도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묻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드라고니아는 뭘 어쩌려는 것인가?
빛의 고리가 울렸고, 드라고니아가 합성한 음향을 이용해 하는 말이 모닥불의 일렁임과 함께 퍼져나온다.
“오르카여 그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