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8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78)
―찾았다, 생각보다 쉬운 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냥 경계를 따로 하지 않는다고 해야겠군.
탐색 끝에 불쑥 내놓는 드라고니아의 말이 투란을 의아하게 했다.
‘경계를 안 해? 여기처럼 알람도 없고 투명하게 뭘 설치도 안 해놨다고?’
―그래. 어쩐지 그 지름길로 뭐가 움직이든 아예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뭐, 쿤토르의 말처럼 눈보라의 높은 산에 오르려는 정신 나간 놈이 너 말고는 없다고 해야겠지.
‘됐고, 가는 길에 투명한 함정 같은 것도 없다는 말이지?’
―음? 아니, 함정은 있다. 반향(反響) 탐색을 해봤는데, 시각적으로 은폐된 함정이 있었어. 하지만 그 함정에 걸린 투명화는 이 발리스타만도 못해. 아주 초보적인 바람의 마법, 물거품을 띄우고 풍경을 왜곡한 기초적인 거야. 딱히 의미를 두고 정성껏 설치했다기보다는 그냥 걸리면 좋고 아님 말고 하는 경우야.
‘성벽에 알람 잔뜩 걸어놓은 부지런한 마법사가 아니란 얘기네?’
―아, 그렇기도 하군. 확실히 마력의 특성이 같은 계통 같기는 하지만 담겨 있는 개성은 꽤 달랐지. 여기 자리 잡은 마법사들이 한 계통이면서 왕국에 협력하는 모양이라 할 만하네.
드라고니아가 흥미로워하는 와중에도 투란의 시야에는 길게 이어진 녹색 끈이 보이고 있었다. 길잡이 노릇을 하는 표시였고, 투란만이 볼 수 있는 끈이었다.
투란은 여전히 반지의 힘으로 시야가 뒤틀린 것을 느끼면서 그 끈을 따라 조심스럽고 빠르게 나아갔다. 끈은 성채의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졌고 절벽을 오르기보다는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싶은 지경이었다. 계단과 통로가 서서히 조명(照明)조차 없는 채로 방치된 듯한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야 겨우 투명화 시켜놓은 함정이 투란에게 보였다.
‘이거…… 들어가는 거 막는 함정이 아니라 저 안에서 나오는 거 막는 거 아니야?’
보자마자 투란은 함정이 노리는 방향이 절벽 깊은 곳에서 나오는 뭔가에 대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고니아는 그런 방향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
―음?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더 깊이 탐색을 하며 갸웃하는 말을 할 뿐이었다.
투란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로 함정을 건너뛰고, 벽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나아갔다. 벽에 혹시라도 홈이 파여있다든가 구멍 비슷한 것이 있으면 한층 더 조심하며 뭔가 튀어나올 것을 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닥의 함정이 대충 투명화시켜놓았다는 말처럼, 그냥 파놓고 메우지 않은 분위기가 가득했고 화살을 쏘아내는 덫이라든가 하는 정성이 담긴 장치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방치된 모양이다. 이 정도면…… 적게 잡아도 수십 년은 들락거린 흔적이 없다고 봐야지.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속삭였다.
주변 분위기가 음울하면서도 고요한 것에 맞추는 듯한 그 말투에 투란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거기에 자신의 몸짓에 따른 소음이 퍼지는 것을 조심하며 나아갔다. 그렇지만 마침내 도착한 종착지에서는 투란의 입이 저절로 열리면서 살짝 얼빠진 듯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이제부터 올라가란 거냐?”
아주 깊은 곳까지 꽤 왔다 싶었더니, 위로 훤히 뚫린 듯한 수직의 굴 안이었고 벽을 따라 나선(螺線)으로 박혀 있는 계단이 보였다. 굴 한복판을 거대한 바늘처럼 암벽이 찌르고 내려와 꽂힌 듯한 풍경이었고, 그 바늘에 닿지 않게 계단을 파서 까마득한 위쪽으로 이어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지나온 어둡고 컴컴했던 통로, 더 이상 돌보지 않는 채로 방치된 함정이 가득했던 통로와 다른 점이라면 암벽 곳곳에 빛을 뿜어내는 이끼가 서식해서 조명은 그럭저럭 갖춰졌다는 점.
―투란, 날아오를 생각하지 마라. 이거 아주 고약한 수작인데, 계단 밟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
불쑥 나온 말에 투란이 움찔하면서, 등으로부터 날개의 형상을 끌어내려던 것을 멈추면서 으르렁거린다.
‘뭐? 걸으라고? 야, 이거 킬로미터 단위로 긴 계단이잖아!’
―그래, 그러니까 고약한 거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아무 일 없지만, 날아오르거나 단숨에 뛰어내리려고 하면 한복판의 암벽에서 공격을 할 거야. 불꽃 덩어리라든가, 서리 꼬챙이라든가 마구 날아들게 되어 있어.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을 향해서 쏘아내도록 설정된 마법이야.
‘대체…… 얼마나 오래된 마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거냐?’
오면서 들었던 몇 마디를 되새긴 투란은 어이없어 묻고 말았다.
세심하게 돌보던 곳도 아니고, 들락거리는 이들조차 없이 내버린 곳에 방치된 마법…… 성벽처럼 관리도 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아직까지 효과를 간직하고 있단 말인가.
―저 중심 암벽이 마석(魔石)이라 그래. 쪼개거나 캐서 쓸 수는 없는 마석이지만, 그 덕분에 한번 새겨놓은 주문이 몇백 년이 흐르더라도 유효한 거지.
다시 한번 수직으로 뚫린 거대한 굴에 푹 꽂혀든 바늘 같은 암벽…… 기둥노릇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중심의 암벽을 흘겨보면서 투란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석이라면 비싼 거잖아? 그런 걸 여기 이렇게 내버려뒀다고? 오랫동안?’
―쪼개거나! 캐서는! 쓸 수 없다고!
‘파내서 쓸 방법이라도 찾아보려고 들락거려야 한다고!’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버려둔 거다.
‘왜 안 되냐고!’
으르렁거리는 드라고니아에게 투란이 칭얼거리듯이 다시 물었다.
나직한 한숨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대답을 한다.
―네이쳐 포스, 이 거대한 바늘 마석이 축적하는 마력은 아케인 포스가 아니라 정령이나 다룰 만한 자연력을 기반으로 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마법사를 위한 마석이 아니고 정령을 위한 마석이란 거야. 여기 새겨진 마법술식이 에아본 왕국의 특징이 드러나는 꼴로 봐서는 그 시절 정령술을 응용한 결과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 국경의 요새였다니까, 두 왕국이 교류하던 때에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거다.
‘그러면…… 혹시 우리 애들은?’
정령술이란 말에 투란은 자신의 정령수들에게는 쓸모 있는 마석이 아닐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도 드라고니아는 고개를 젓는 듯한 말투로 대답한다.
―안 돼. 드라코눔의 윌 라이트를 기반으로 삼은 정령술이랑 엮을 수가 없어. 에아본 왕국의 정령비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라면 모를까, 다른 누가 함부로 손댈 것이 아니다.
‘어우…… 그러니까 닥치고 걸어 올라가라고? 제에에엔장!’
투덜거리는 채로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투란은 계단에 발을 얹었다.
곧바로 계단에서 미묘한 울림이 퍼졌고, 따스한 파동이 주변에 맴돌았다.
빛 이끼가 한층 더 밝아지며 위로 오르는 계단이 밝혀지는 듯했다.
‘어라?’
―흐음?
까마득한 정상은 꼬인 나선과 중앙을 차지한 마석, 바늘 암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끝까지 빛 이끼가 모조리 밝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쓴웃음과 함께 투란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드라고니아도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툴툴거린다.
―손님맞이가 아주 정중하네.
날아오르거나, 떨어져 내리는 것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은 환영한다는 듯한 기묘한 마법이 계단까지 장악한 풍경이었다. 계단 오르내리는 것을 오래하는 것이 취미라면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했다.
투란은 춥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않은 따스함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씩이라도 빠르게, 그래도 건너뛰는 계단은 없도록 착실히 밟으면서 나선의 궤적을 따라 올라갔다.
“푸우아아핫!”
입으로 숨을 토해내면서 몸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툭툭 손으로 털어내는 시늉까지 하면서 투란이 묻는다.
‘야, 한두 시간 걸린 거야?’
―한 시간, 대강 그 정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참 잘 밟더구나. 왜 그랬냐?
한 시간을 참았다는 듯이 툴툴거리며 되묻는 드라고니아였다.
‘다 밟으면 뭐 좋은 거라도 줄까 해서. 근데 저건 뭐지?’
슬그머니 찌릿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주무르면서, 그러기 위해 허리를 숙인 채로 고개만 들어 주변을 좀 더 둘러보다가 투란이 묻고 있었다.
계단이 끝난 곳에는 바늘 암벽조차 끝난 듯이 평평한 형태를 기반으로, 중심에 묘한 원형 제단(祭壇)이 반원으로 둥근 벽을 두른 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을 향해 건너가는 다리가 따로 놓여 있는데, 원형 제단의 주변으로 둥근 해자(垓字)를 둘러놓은 때문이었다.
―생긴 거는…… 전에 봤던 그 정령의 별궁이랑 닮았는데? 해자 속으로 흐릿하게 자연력이 스며들어서 정령을 위한 마력으로 가공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마력이 가공돼? 아, 윌 라이트로 정령을 가공하는 것처럼?’
―그래, 그 비슷한 분위기야.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만…… 제단 주변으로 프로브를 움직여도 아무렇지도 않잖아. 다리 건너다가 해자에 빠지지만 않으면 별일 없을 것 같다. 건너뛰지는 마.
천천히 해자 곁으로 가서 텅 빈 채로 깊어 꺼멓게 칠해진 듯한 빈틈을 확인하는 투란이 발 내밀어보는 시늉을 하자 드라고니아가 잔소리했다. 아무래도 이 해자의 깊이 파고드는 빈틈이 바늘 암벽의 속으로 통하는 모양인 탓이었다. 암벽에 새겨진 마법이 해자 속에서 솟구쳐 올라올 가능성까지 고려한 듯.
‘다리 있는데 뭘 힘들게 뛰어. 그나저나 이걸 생각보다 좁다고 해야 하나, 넓다고 해야 하나.’
투란은 바늘 암벽과 나선 계단의 간격이 좁혀들다가 나중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어깨 펴고 지나야 할 정도로 좁은 틈새 통로가 돼버린 마지막 한 바퀴를 떠올리면서 갸웃했다. 올라와보니 수십 미터, 얼핏 가늠해도 한 오십에서 육십여 미터는 될 듯한 널찍한 곳의 중심에 해자까지 십수 미터의 크기인 원형제단이 덩그러니 놓인 꼴이었다. 올라오면서 가늠했을 때, 대강 높이가 1킬로미터하고 백 수십 미터인 듯했는데 그 정상이란 점을 고려하면 꽤 작은 듯했지만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히 넓다고 할 수도 있잖은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여기가 끝인데 더 올라갈 구멍이 없다는 것부터 따져봐야 하는 거 아니냐?
상황은 드라고니아의 말대로였다.
더 이상 밟고 올라갈 계단도 없었고, 위로 뚫린 구멍도 없었다.
위쪽은 튼튼한 바위 지붕이었고 조금 특이한 것이라고는 원형 제단 위에 새겨진 무늬뿐이었다. 원의 테두리 안이 현란하게 이것저것 채워진 무늬는 빛 이끼라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며 제단을 내려다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흠…… 이런 분위기라면 다리 건너가면 답이 나올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파악 못하겠어? 저 동그란 것에 무슨 마법이 있는가도 모르는 거야?’
―없다. 파악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없어. 분위기만 잔뜩 풍기고 있는 제단이야. 해자 속으로는 분명히 정령의 냄새가 맴돌고, 마법의 낌새도 있다만…….
‘올라가봐야 알 수 있는 건가? 프로브로 탐색이 안 된다니 나름 대단한 게 있을 수도 있겠네.’
피식 웃으면서 투란은 해자 주변을 조금 더 살피다가 제단으로 건너가는 다리에 살짝 발을 얹었다. 발끝으로 톡톡 두드려봤지만 다리는 계단처럼 부드럽고 따스할 뿐, 다른 느낌이 없었다.
―수상하면 내려가서 성채 안팎의 사람들이랑 얘기라도 좀 해보지? 모습 감췄다고 성채 안이고 밖이고, 루곤의 인간들이랑은 아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숨어 들어왔잖아. 무슨 전설의 도적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 뭐 있냐고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걸. 루곤에서는 눈보라 높은 산에 대해서 아예 한마디도 안 하고 안 들리는 척한다고 쿤토르가 말했잖아.’
―그 녀석은 오르카였지. 다른 종족이라 말하는 것을 꺼렸을 수도 있잖아.
묘하게 툴툴거리는 드라고니아였다.
투란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바로크보다는 대삼림이랑 거래가 더 많은 곳이라고도 했지. 내 보기에는 차라리 오르카 호기심을 부추겼지, 다른 사람 호기심을 부추기지는 않았을 걸. 어차피 외지인이라서, 웬만큼 머물며 알아보지 않으면 제대로 듣지도 못할 거고.’
―그러냐…….
갸웃하면서 드라고니아는 인간의 행태에 대해 다시 고찰하는 듯했다.
투란은 다리를 건너면서 자신의 감각을 한번 더 되짚었다.
프로브가 아무것도 못 찾은 것처럼, 자신 또한 별다른 특별한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제단 위에 서 있어도 자신이 그 자리에 없는 듯이 무시한다는 묘한 기분이 되었기에 투란은 기게이아의 반지를 돌려 투명한 상태를 해제하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자아, 이제 어떻……?”
시야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투명했던 투란의 모습이 제단 위에 선명해지는 순간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변화가 제단의 반원형 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마법…… 도해?
벽이 투둑거리면서 양각(陽刻)해 떠올리는 무늬를 보며 드라고니아가 웅얼거렸다.
투란은 발아래에서도 푹푹 패며 음각(陰刻)되는 무늬를 내려다봤기에 으르렁거릴 수 있었다.
“썩을, 뭔 마법 함정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