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8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80)
―농담할 때냐! 이 무슨……!
‘여유를 갖자고, 여유를.’
드라고니아의 늘어지려는 말을 자르면서 투란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잠깐 나가있던, 놔버렸던 정신을 가다듬는 몸짓이었고 이는 바로 드라고니아에게 효과를 발휘했다.
―괜찮은 거냐?
‘너랑 얘기하는 꼴 보면 알잖아? 괜찮으니까 이런 게 되는 거지.’
투란은 별것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사실은 별것 아닐 리가 없는, 진심으로 말하자면 정말 큰일을 겪는 중이기는 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허세(虛勢)! 자신을 향해 크게 외칠 수 있는 허풍이니까!
크륵, 쿵, 파앙!
두텁게 얼음벽이 되어가던 서리 장막이 깨져나갔다.
바위 주먹이 그 장막에 구멍을 뚫자마자 응축되던 힘을 잃고 터져버린 꼴이었다.
‘하아…… 아직 하나 더 남았었지.’
살짝 시야에서 흐릿하게 가려졌기에, 다시 드라고니아와 대화가 가능해졌기에 잊었다는 듯이 중얼거려보는 투란이었다. 하지만 드라고니아는 매우 진지하게 이 말을 받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야. 저건 그냥 파편이고 본체는 따로 있다.
‘뭐? 본체?’
콰득, 콰앙.
바위 팔을 피하면서 끌어안고 몸을 돌려 바위 덩어리를 통째로 들어서 냅다 내리찍는 괴력을 발휘한 다음, 투란이 사방을 둘러봤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먼저 깨뜨려놨던 바위 조각들이 데굴거리며 포석 위를 굴러 저편으로 가는 것이 바로 보였다.
새로 내리꽂아 뭉개진 바위 조각 역시 곧바로 저편을 향해, 원래부터 구르는 돌멩이였다는 듯이 빠르게 데굴거리고 있었다. 둥글지도 않고 모나게 부서진 돌 조각이 통통 튀며 구르는 광경은 투란에게 낯설지만 낯익은 분위기였다.
‘몬스터겠지?’
반쯤 기대하고, 반쯤 지겨워하는 듯한 웅얼거림이었다.
―그래, 몬스터다만…… 투란, 지금 상태로 괜찮겠냐? 너 지금 천칭도 황금매도 아니잖아! 아니, 그 늑대의 문장이 제대로 된 몬스터 엠블럼이라면…… 보이드 엠블럼 상태인데 정말 괜찮아?
‘보이드…… 같기는 한데, 꽤 애매해. 이건 공허한 기분이라기보다는…… 배고픔? 비어있는 거는 맞는데 보이드 엠블럼과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른 이상한 느낌이야. 그러니까 윌 라이트의 마력을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고.’
가만히 자세를 가다듬고 자신을 점검하면서 투란이 말했다.
늑대의 형상을 저절로 이루고 있는, 그 중심이자 핵(核)이 되어 있는 기묘한 문장은 분명히 가슴에 박혀 있었고, 등과 허리춤에도 그 문양의 일부를 펼쳐놓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 엠블럼, 투란이 지닌 황금매와 ‘천칭’과 마찬가지의 배분(配分)이었고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투란은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문장은 물론, 말로 들었던 몬스터 엠블럼의 수많은 이야기, 몬스터 로드들의 다양한 경험담 어디에도 없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몬스터의 정수, 그 에센스가 전혀 담겨 있지 않는 문장이 투란에게 늑대의 형상을…… 웨어울프의 형체를 덧씌워놓고 있는 것!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숨을 토해내면서 투란은 다시 한번 ‘붉은 늑대’를 사용했을 때랑 배교하면서 그 차이를 느끼고는 있었다. 몸을 직접적으로 변화시켜 몬스터 형상을 형성하는 것과는 다르게 ‘입었다’라는 느낌이 더 짙은 상태. 그럼에도 분명하게 이 웨어울프의 몸은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늑대의…… 아니, 어둔 늑대의 문장이라고 했었나?’
제단에서 형성된 거품에 담가져 절벽 깊은 곳의 암석을 관통하며 치솟아 오르는 동안, 투란은 이 문장에 대한 지식을 전이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전부 알려줬다기보다는 최소한의 기초적인 부분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을 요약해서 넘겨준 듯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로어 주문을 이용해 알려준 것이다.
―어둔 늑대……? 젠장, 이게 그 악명이 자자한 펜릴의 문장이었냐.
이제서야 투란이 얻은 지식을 공유받게 된 드라고니아가 으르렁거렸다.
‘뭐야, 너 아는 거야?’
―기록으로만 봤어! 고대의…… 아니, 고대에서 고대라고 부를 지경인 아스라한 옛날, 몬스터 엠블럼이 태동하던 시기의 시험작 중 한 가지이고…… 실패작이라고까지 불리던 괴작(怪作)이라더군. 만든 목적은…… 얘기할 때가 아닌데?
쿠릉, 콰르릉.
굴러가던 바위가 멈춘 곳에서 시커먼 것이 치솟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투란도 이야기할 때가 아니란 것을 인정했다.
포석이 끝나는 곳, 시커멓고 맨들거리는 커다란 평판(平板)처럼 보이던 암석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중이이었고 굴러간 누릇한 바위조각들은 시커먼 암석이 내민 지체(肢體)의 일부로…… 검은 살갗을 덮는 건틀릿처럼 처박히듯 들러붙는 중이었다.
잠깐 빠른 속도로, 소리 없이 대화를 하는 동안이 정말 짧았음에도 저 흑요석(黑曜石)의 덩어리는 이미 온몸을 땅에서 끌어내고 일어서며 한 발 디딘 채로 투란이 부숴놓은 바위 조각들을 무장으로 챙겨넣는 셈이었다.
‘먼지가루로 만들었으면 저런 주먹이 안 생겼을려나?’
누런 바위 건틀릿이 시커먼 팔뚝을 덮으며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꼴을 보면서 투란은 조금 시답잖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검은 바위인 채로도 아주 튼튼해 보이는데 거기에 누런 껍질을 한 겹 더 씌웠으니 한층 더 튼튼하고 강해 보인다!
―티끌이라도 다시 모았을걸? 그보다 저거 한 놈이 아냐. 둘 더 있다.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게 나갈 길목 셋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나보군.
‘셋? 나갈 길목?’
쿵, 쿵.
다가오는 흑요석의 덩치는 낮게 잡아도 3미터 이상, 배불뚝이 모양의 몸통 지름은 2미터를 거뜬히 넘거나 몇십 센티 남을 듯이 보였다. 그런 녀석이 포석을 밟으니 울리는 소리가 장난스럽게 넘길 수준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련하게 드라고니아의 탐색을 증명하듯이 덩달아 울려나오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투란 눈앞의 녀석이랑 비슷한 것이 분명히 둘 더 있다고 알려주는 상황이었다.
‘절벽가에 바싹 붙어 있구만, 그걸 또 세 방향으로 튀지 못하게 막아놨다고?’
눈앞의 검은 돌덩이를 피해서 좌우로 잽싸게 튈 경우까지 막아놨다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투란이 보기에 이 검은 광택이 가득한 돌덩이, 흑요석의 바위 괴물은 걸음조차 굉장히 빠르니까. 뜀박질로 피할 궁리는 아예 하지 않는 편이 옳아 보였다.
콰앗, 부웅!
눈치 보는 사이에 손이 닿을 거리까지 와버린 흑요석 괴물이 투란을 향해 누런 주먹을 내질렀다.
투란은 피해야 했다.
‘천칭’이나 황금매의 문장을 가슴에 둔 채였다면 맞잡고 걷어차서 뭉개버렸을 텐데…… 이 연약한 늑대의 껍질은 저기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고 피와 살을 벗어던진 채로 뽑혀나갈 듯하니까!
‘이 치사한! 텅 빈 이상한 문장 하나 강제로 심어놓고 저런 꺼먼 바위로 길을 막아놓다니! 이런 비겁한 짓을 대체 누가 해놓은 거야!’
연타를 피해 바닥을 구르면서 투란은 으르렁거리는 넋두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넋두리에 드라고니아가 ‘어?’ 하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아주 빠르게, 사유(思惟)를 통째로 건너듯이 이야기한다.
―펜리르, 펜릴의 문장은 빛을 삼키는 어둠의 늑대, 어둔 늑대를 갈아 넣어서 기본 형태로 삼아버린 몬스터 엠블럼이다. 다른 문장과 아주 큰 차이가 바로 보이드 엠블럼인 채로 어둔 늑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지! 어둔 늑대가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는 특성은 단단한 것을 부수고 으깨서 바로 씹어 삼키는 거다! 어둔 늑대의 이빨과 발톱은 한때 샤벨투쓰랑 맞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지! 투란, 저건 먹이다! 어둔 늑대의 힘을 간직한 펜릴의 문장, 그 허기를 채우라고 놔둔 먹이야! 먹어 치워!
‘진담이냐? 농담할 때 아닌 거 알지!’
콰앙, 쿵, 쾅, 콰앙!
포석이 내리 찍히는 누런 바위 주먹에 으깨지며 파편을 화살처럼 뿜어냈다.
뒤이어 휘둘러진 주먹에 날려진 포석 파편이 투란을 덮치는 장막처럼 뿌려졌다.
이를 피하며, 최대한 스치더라도 긁히며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비켜가면서 투란은 3미터가 넘는 흑요석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의 민첩함을 압도하는 빠른 움직임이었고 들러붙는 순간에 흑요석 괴물의 두툼한 바위 배를 손톱으로 베고 발톱으로 차며 바로 어깨까지 도달해서 몸통에서 튀어 올라온 머리통을 억세게 깨물기까지 했다.
와드득!
‘으아, 딱딱해!’
물어뜯은 부분을 분명히 으깨 부숴내기는 했다.
손톱, 발톱으로 할퀸 부분이 쩍쩍 갈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투란은 이빨이 얼얼하고 손톱 발톱이 시큰한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흑요석 괴물은 예상 이상으로 튼튼했고, 보이드 엠블럼에 불과한 문장에서 기본적으로 갖췄다는 어둔 늑대의 힘은 기대 이하로 약한 것!
―세질 거다, 몬스터 에센스를 삼킬수록.
당장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드라고니아가 위로하듯 내놓고 있었다.
쿵, 콰아앙.
머리가 꽤나 으깨졌지만, 몸통이 꽤 깊이 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흑요석 괴물은 자신의 배를 치고 머리를 치며 들러붙어 움직이는 시커먼 늑대를 뭉개려 하는 중이었다.
투란이 이를 피하며 보니 고통 따위는 아예 모르는 움직임이었고, 멈춰서 생각해보려는 낌새도 없는 차분한 동작이었다.
‘야, 이거 코어인가 뭔가 있는 바위 괴물 아니야? 그것만 부수면 멈춰 서거나 그러는 거 맞지? 구경하지 말고 프로브로 좀 캐보라고!’
바위 손길을 피하면서 보채는 투란의 말에 드라고니아가 바로 대답한다.
―심장, 인형(人形)을 기본으로 삼은 까닭인지 모르겠다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약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곳에 핵을 심어뒀다.
‘인간은 머리 이만큼 으깨놓으면 쓰러지거든?’
투덜거리면서도 투란은 일단 흑요석의 겨드랑이로 파고들면서 손톱을 사납게 움직여 한쪽 어깨를 끊어버렸다. 거친 소리와 파열음이 터지면서 흑요석의 다른 누런 주먹이 후려치는 순간에 투란은 멀찍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쿠웅.
자기 몸을 후려친 것이 꽤나 센 충격을 준 듯, 흑요석의 커다란 몸뚱이가 잠깐 주춤했다. 그 틈을 노리고 투란은 한 손을 창처럼 내밀며 돌격했다. 손끝에는 하얀 서리가 맺힌 채였고, 은근히 맴도는 먼지는 송곳의 첨단(尖端)을 꾸며주고 있었다.
콰득! 파앙.
충돌음은 거칠었지만 관통음은 시원하게 허공에 울렸다.
흑요석 덩치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쿠웅, 쿵, 쾅, 쿵, 쾅.
연이은 바위의 걸음 소리는 구르던 투란을 바로 일어서게 했다.
한 마리랑 툭탁거리는 사이에 바싹 다가온 다른 두 마리, 누런 껍질을 쓴 주먹 따위는 없었지만 심장 부위를 뚫어 쓰러뜨린 녀석보다 왠지 더 사납고 억세 보였다.
‘착각……이겠지?’
―아니, 저 둘이 더 튼튼한 거 맞아.
‘대체 왜!’
―내가 착각한 것 같다. 저 둘은 여기서 나가는 자를 막는 게 아니라, 여기로 쳐들어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배치해놓은 모양이야. 나가는 자를 상대하는 거는 순전히 부수적인 거고 말이지.
‘그게 뭔 소리냐고오오!’
으르렁거리면서 투란은 다시 옆으로 구르고, 뒤로 튀면서 두 마리 흑요석 괴물이 서로 엉기다 두들기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는 동작으로 투란을 패죽이겠다고 휘둘러대던 주먹의 힘을 확실하게 제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명확하게 투란에게 제대로 된 주먹질을 하고 밟겠다고 움직이면서도 슬쩍 좌우로 갈라지며 포위까지 하려드는 모습은 아무 생각 없는 몬스터랑은 다르다고 시위하는 태도였다.
‘정령수 아직도 마력이 모자란가?’
한숨을 참으면서 투란이 물었다.
억지로 마음에서 끌어낸 냉정함이 담긴 물음에 드라고니아가 씁쓸하니 답한다.
―문장이 강제로 변환되면서 모아둔 마력이 다 날아갔으니까. 이럴 때 드라코눔 정령술의 단점이 드러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드라코눔의 정령수는 세상으로부터 그 힘을 비축하지만,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마력도 필요로 했다. 미쳐 날뛰고 싶어도 자신을 창조한 자의 마력이 없으면 별 위력을 보이지 않도록 채워놓은 고삐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력이 강제로 해체당했다가 다시 모이는 순간에는 방벽 노릇도 못하게 무능해지는 것이 단점!
‘이런 꼴 당할 줄 누가 알았냐고! 넋두리 나중에 하고, 저 둘을 부술 정도면 되는 거잖아.’
손끝에 모여드는 아쿠아의 서리, 테라트의 먼지 송곳, 이를 보조해주는 에어로의 부드럽지만 억센 바람결을 느끼면서 투란은 한 번 더 보챘다. 그래도 열심히 투란의 정령수들은 꺼낼 수 있는 힘을 모두 다 꺼내며 지원해주는 중이니, 여기에 윌 라이트의 마력을 조금만 더한다면…….
―가라. 서둘지 말고 하나씩 부수면 되잖아. 저건 먹이라니까.
프로브가 손등에 맴돌면서 정령수를 강화시켜주는 마력의 밀도가 높아지는 와중에 나온 말이었다. 이는 투란을 어이없어 웃게 했다.
‘정령수 없이 이 늑대의 문장만으로 저런 거 셋을 잡을 수 있겠냐? 먹이 노릇이 아니라 먹잇감이 와서 먹으러 온 녀석들이라고! 저 돌덩이들!’
투덜거리면서도 투란은 다시 빠르게 바닥을 차고 방향을 틀어 또 한 마리의 흑요석 괴물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음, 일리가 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