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8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81)
Chapter 177. 눈보라의 높은 산
눈송이가 커졌고 눈보라가 조금 더 험한 바람을 절벽가로 불어댔다.
가느다란 실가닥처럼 엮인 불길이 날줄 씨줄을 자아내며 융단처럼 펼쳐진 중심에 투란이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채로 뺨에 달라붙은 눈송이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한 조각이었지만 이제부터 몰아닥칠 눈보라의 예고편 같은 눈송이의 차가움, 매끈하고 부드러운 불의 융단을 깔고 앉은 탓인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럭저럭 정령수 애들은 괜찮아진 것 같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뿐이지, 스피릿 아티팩트에는 어떤 타격도 없었으니까. 자연적인 정령수였다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을 거다.
‘음? 휘드라곤은…….’
―가계약의 징표 노릇 하는 녀석이라 너한테 많이 기대는 놈이잖아. 셰이아 역시 마찬가지이고…….
드라고니아의 말투가 왠지 예민하고 짜증이 난 탓에 투란은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흑요석 괴물을 모두 으깨놓고 앉자마자 정령수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괴물의 파편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파편 속에 담겨 있을 몬스터 에센스를 삼켜야 하는 투란의 의지에 따라.
어쨌든 험악하고 위험했던 싸움이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 지어졌으니 조금 느긋해도 괜찮을 듯한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불만스러워 하는가?
‘뭐가 또 있냐?’
투란이 ‘왜 불만이야?’라는 의미를 담아 짚어 묻는 말이었기에 드라고니아는 잠깐 끙끙거리는 듯하다가 대답을 한다.
―드러나는 일이 없어야 할 약점이었어. 순전히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거지, 실제로 약점으로 노출되는 일은 아예 없는 것인데…… 너란 녀석은 왜 자꾸 이런 상황을 겪는 거냐고!
‘글쎄다.’
쓴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투란이었다.
새삼 가슴에 새겨진 문장, 늑대의 머리……라기보다는 낯짝을 들이대는 듯한 모양으로 새겨진 문장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면서 투란은 ‘정말 왜?’라고 자신에게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 로드란 한번 문장을 새기면 그걸로 일생이 결정된다.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는 있을지라도 몬스터 로드이기는 마찬가지이며, 한 가지 문장을 새겼다면 다른 문장이 덧씌워지는 일 따위는…… 투란이 아는 어떤 이야기 속에도 없는 것!
한데 투란은 황금매를 겪었고, 또다시 늑대를 겪고 있었다.
전혀 기대한 적도, 예상한 적도 없는 산악왕국 루곤이 등짝을 기대기는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한 절벽 속에서!
‘쿤토르가 이상한 일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새삼 예언이 어쩌구 하면서 왕이 되라고 부추기던 쿤토르가 꽤나 멀쩡했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투란은 손끝에 얇게 만져지는 늑대의 낯짝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손끝에 살짝 만져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가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펜릴……? 그렇게 말했었지? 어둔 늑대를 그렇게도 부르나?’
―음? 아, 그건 아니야. 어둔 늑대의 원형(原型), 아니 시조(始祖)라고 해야 하나? 어둔 늑대란 종자의 근원적인 존재이고, 이 세계에 불려올 뻔했던 다른 세상의 신화적인 괴물이다. 대신에 발할리아의 신전이 생겨났고, 어둔 늑대를 비롯한 다양한 괴물들이 불려왔다고 하지.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필요 없는 얘기 빼고, 펜릴이 어둔 늑대란 거야? 아니면 어둔 늑대의 조상님 같은 놈이고 어둔 늑대랑 다르다는 거야? 괴작이니 뭐니 했던 이 문장에 대해서도 말해봐, 필요한 것만!’
사르륵, 불의 융단 아래로 흙덩이가 불룩거리면서 움직여 모아온 시커먼 돌조각의 파편을 손발을 움직여 조금 더 가까이 당기면서 투란이 툴툴거렸다.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정령수들이 정성껏 몰아온 파편이었고, 보통의 돌과 다른 낌새를 품은 것을 제대로 모아온 것이었다.
이제 늑대의 문장으로 이 파편을 삼키면 되는데, 투란은 그 전에 알고 싶었다.
기본적인 문장의 사용법, 특성은 절벽을 관통해 올라오는 동안에 대강 알게 되었지만, 그 안에는 드라고니아가 말한 ‘괴작’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으니까.
―알기 쉽게 말하자면, 펜릴은 아라크레온 같은 것이고 어둔 늑대는 아라크레온에게서 태어난 거미 마수나 몬스터 같은 녀석이란 거지. 대강 알겠냐? 그러면…… 펜릴의 문장인데…… 음…… 투란, 몬스터 엠블럼이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했었지? 이 늑대의 문장은 그중에서 보이드 엠블럼이 지닌 약점, 몬스터 로드가 지닌 형상의 지속시간이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을 보완하려고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보이드 엠블럼인 상태인데, 투란 네가 느끼는 것은 그저 소소한 굶주림이란 것부터 보이드 상태에서도 어둔 늑대의 형상을 융합한 것처럼 끌어내 쓸 수 있도록 해둔 것, 이게 모두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문장에 미리 부여해놓은 거란 말이지.
‘과연, 그러니까 보이드가 그럭저럭 참을만한 배고픔 정도로 느껴지고 텅 빈 문장인데도 어둔 늑대를 뒤집어쓰고 웨어울프처럼 싸울 수 있게 해놨다? 그러면 엄청 좋은 거잖아? 어째서 세상에 퍼지지 않았지?’
달그락, 흑요석 괴물의 정수가 조금 더 짙은 것을 킁킁거리면서 냄새로 찾는 와중에 투란은 물었다. 몬스터 에센스가 짙은 조각을 감각을 통해 더듬어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문장은 투란이 아는 범위를 확실히 벗어난 듯했다. 고유마력을 이용해서 주변을 탐색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아도 된다니, 강력할 뿐 아니라 편리하기까지 하니 몬스터 로드라면 당연히 선호할 수밖에 없는 특성이었다. 널리 퍼진 천칭이나 매의 문장을 지녔다면 갈아치우고 싶다는 기분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을 듯한데…… 어째서 춤추는 산맥을 오가는 몬스터 로드 중에 이 문장을 지닌 자에 대한 이야기가 없을까?
드라고니아가 한숨을 섞어 이야기한다.
―왜겠냐, 그럭저럭 참을 만하게 느껴지는 그 굶주림이 멈추질 않고 계속 이어지는 데다가 자꾸 커지니까 그렇지.
‘뭐? 그게 무슨 얘기야?’
―보이드 엠블럼은 아주 쉽게 해소되잖아.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일단 몬스터라면, 그 정수를 조금이라도 담아둔다면 보이드는 순식간에 해결되지. 그다음부터는 거의 겪을 일이 없는 것이 보이드 상태, 그렇지? 하지만 늑대의 문장은 그 굶주림이 점점 커지면서 지속된다. 어둔 늑대의 허기를 완전히 달래기 위해서 강한 몬스터를 아주 많이 삼켜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독한 굶주림이 보이드처럼 절대 익숙해질 리가 없는 상태로 점점 커지는 거야. 마지막으로 늑대의 문장을 지녔던 몬스터 로드는 굉장히 강해졌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그 허기는 달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살하고 말았지.
‘이거 함정이었던 건가!’
가슴의 늑대 낯짝, 황금매나 ‘천칭’과 다르게 살짝 얇은 점처럼 만져지는 촉감이 또렷한 늑대의 문장을 어루만지면서 투란은 움찔하며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그대로 흘려내고 말았다.
한데 드라고니아가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 듯한 낌새와 함께 말을 이으니.
―그 긴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런 장소에 그런 식으로 배치해놓은 것이 겨우 누군가를 죽일 함정을 꾸미려는 생각이었다고는 보기 힘들어. 어쩌면…… 제단이란 형태로 몬스터 엠블럼을 전이시킬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치명적인 단점도 보완해놓았을 수도 있어. 투란, 로어를 통해 전해받은 지식, 문장의 정보를 되새겨봐라. 내가 보기에는 이건 단순히 걸린 자를 죽이려는 함정은 절대로 아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냥 절벽 안에 처박아놓고 가둬버리는 것으로 충분해. 굳이 이 정상에 올라와서 준비된 몬스터랑 싸우게 할 까닭이 없잖아?
‘어, 그건 또 그렇기는 한데…….’
투란은 일단 생각을 멈췄다.
드라고니아의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복잡한 마법, 고대의 이야기가 거기에 뒤섞이면 지금 당장 겪는 문제의 해결책은 없다는 뜻!
게다가 여기에 늑대의 문장을 남긴 자가 누구든, 마법을 통해 투란에게 이 특이한 몬스터 엠블럼의 대해서도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것을 모두 알려주기까지 했다. 죽으라고 그랬을 리는 분명이 없는 일!
그리고 그 정보, 지식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부분에 분명히 이야기했다.
“산을 제압할 정도로 몬스터의 힘을 쌓는다면, 늑대를 길들이게 될 것이다.”
처음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던 말은 이랬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늑대는 배고프다, 그 배고픔을 채우는 방법은 몬스터를 삼키는 것이다.”
그러니 끝과 처음을 함께 놓고 본다면 드라고니아가 단점을 보완했을 거라 추측한 이야기랑 맞물리고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투란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이 파고드는 생각이 아니었다.
“모그으으으으와앗!”
―뭐? 얀마!
드라고니아가 한순간에 정신 나간 것처럼 당황하며 격한 반응을 뿜어냈다.
투란은 히죽 웃으면서 불의 융단이 뭉치고 살살 녹이겠다는 듯이 달궈놓는 흑요석의 파편을 집어 올렸다. 여린 바람결이었지만 두툼하게 뭉친 것처럼 투란의 이런 손을 휘감는 시원함이 있었다. 불의 융단과 호응하는 바람의 살갗, 정령수들이 늦었지만 제대로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을 느끼면서 투란은 늑대의 문장에 집중했다.
‘배고프다고? 먹어치워!’
투란의 부추김에 바로 문장이 반응했다.
그러나…… ‘펜릴의 문장’이라고 불리는 늑대의 문장은 다른 것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가를 과시하듯 투란의 어깨와 목 위를 늑대 형상으로 덧씌우고 있었다! 잔소리 하려던 드라고니아가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뭐 하는 거냐?
투란은 맹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문장의 이끌림에 따라서 움직였다.
으적, 와드득.
늑대의 입이 열렸고, 흑요석의 파편을 씹었다!
―야?
드라고니아가 놀라 외치는데, 투란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씹어 삼키는 건데! 이 녀석, 진짜로 먹어치워서 문장에 정수를 새겨넣고 있다고! 이게 뭐야!’
굶주림으로 느껴지던 보이드가 채워지고 있으니, 결코 착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늑대의 문장이 본격적으로 투란의 심상 속에 풍경을 그려 넣고 있기까지 했는데…… 거칠고 난폭한 분위기가 가득한 황야(荒野), 멀리 있는 지평선이 사방을 채우고 잿빛 하늘은 어디까지 높은가 전혀 알 수 없는 황무지의 한복판에서 검은 늑대가 네 발로 우뚝 선 채로 겨우 코앞에 떨궈진 먹이를 핥는 기묘한 광경!
그 맛과 함께 투란은 한 가지 더 느낄 수 있었다.
저 풍경에서 맛본 것을 삼키면 늑대가 온몸으로 그 냄새를 풍겨낼 수 있다는 것.
그 의미가 명확하게 투란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아하, 이런 거란 말이지.’
투둑, 꽈드득.
투란의 손이 힘줄이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흑요석의 광채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는 채로 쥐락펴락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흑요석의 파편을 먹어치우던 늑대의 형상은 홀랑 사라졌다.
먹어치우는 과정, 몬스터의 정수를 삼키는 상태가 몬스터의 형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넘겨진 듯했다.
‘이건 다른 거랑 마찬가지네.’
적어도 몬스터의 형상을 유지한 채로 정수를 삼킨다든가 하는 일은 안 된다는 것.
하지만 문장 안에 담겨진 늑대의 형상은 몬스터가 아니란 것처럼, 입고 벗는 기분을 짙게 느끼게 하면서 그 과정을 겪는 실체로서 실현된다는 것은 다른 몬스터 엠블럼과 분명히 차별화되는 특성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기록에 없었다만…….
어이없어 질린 듯이 드라고니아가 웅얼거렸다.
‘꼴사나워서 비밀로 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옛날 늑대랑 지금 늑대가 다른 걸 수도 있고.’
키득거리며 대꾸한 투란은 보다 깊이 문장의 변화를 관찰했다.
자신을 가늠하고 점검하며 몬스터의 정수를 통해 그 힘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한번 더 되새기면서 삼킨 몬스터의 능력을, 맞서 싸우며 지켜본 몬스터의 특성이 자신의 몸에서는 어떤 식으로 발현하는가를 통찰했다.
그 결과 투란은 바로 흑요석 광채를 뿜어내는 손을 바닥에 찧으며, 불의 융단이 갈라지며 드러낸 포석과 맨 땅의 돌조각이 흑요석의 손으로 뭉쳐들며 살갗에 접합되고 팔뚝을 휘감으며 온몸을 덮는 광경을 펼쳐낼 수 있었다.
흑요석의 괴물은 그 핵을 중심으로 주변의 돌을 장악하고, 몸으로 삼아 부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괴물의 정수를 얻은 투란은 아예 자신의 몸을 핵으로 삼아 암석의 갑주를, 몸을 확장한 듯한 돌의 형상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몬스터 로드의 고유마력.
그 속에 의지를 담아 윌 라이트의 마력을 한번 더 정제해서 주변을 향해 뿌려냈고, 그 마력의 반향을 통해 투란은 알 수 있었다.
‘여기…… 돌덩이 괴물만 남겨둔 것이 아닌데?’
―젠장할, 몬스터의 구역을 갈라놓은 건가.
투란의 감각을 공유받으며 그 자취를 따르던 드라고니아가 으르렁거렸다.
저 너머에서 꾸물거리며 서서히 그 기척을 드러내는 또 다른 몬스터가 있었으니까…… 마치 늑대의 문장을 가진 자가 흑요석의 괴물부터 차례대로 쓰러뜨려 삼키라고 준비해놓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