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9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89)
암염층은 매우 복잡했다.
깊은 지층을 위아래, 앞뒤, 오른쪽 왼쪽을 가리지 않았고 두께도 너무 얇거나 너무 두껍거나 했다. 암염만 파내려 한다면 저절로 가는 길이 막힐 수도 있는 온통 제멋대로 깔린 지층 속의 미궁(迷宮)인 셈이었다.
흙의 정령수 테라트의 힘으로 그 길을 열면서 투란은 문득 갸웃하며 입을 다문 채로 묻는다.
‘이거, 혹시 골짜기 바닥까지…… 거기 아주 가깝게 내려가는 줄기도 있나?’
―바닥으로? 있기는 있는 것 같다만, 이 골짜기 바닥이 내려가볼 만한 곳은 아니잖아?
‘스톰라이더의 잔해가 있잖아.’
―천칭에 담고 싶은 거냐?
투란의 말에 드라고니아가 잠시 곤혹스러운 듯한 낌새를 띠고 물었다.
투란은 그 의아함을 안다는 듯이 살짝 쓴웃음부터 머금었다.
‘다른 날개로 어느 정도 흉내는 내겠지만, 뭔가 결판을 내려는 순간에 미묘하게 뒤틀릴 것 같거든.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바람을 타고, 날개를 아예 무기로 휘두르잖아. 그 감각이 꽤 미묘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스톰라이더 무리와의 전투, 그 순간을 되새기고 더듬는 이야기였다.
급격하게 희미한 수준이 된 마력의 제한으로 인해서 제 위력을 발휘 못한 채로 소란과 난동을 부리지만 제대로 스톰라이더를 죽이기는 힘들던 정령수들을 이끌고 싸웠다. 그 와중에 휘드라곤이나 셰이아는 제법 활약했지만, 그래도 꽤나 아슬아슬한 위기가 많았다. 그 위기를 기회로 엮어 반격해 공중에서 하나씩 스톰라이더를 잡아 떨구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스톰라이더의 날개, 할배의 날개였다. 다른 젊고 어린 것들의 날개를 가뿐히 찍어 누르고 꺾어버리는 강력하고 노련한 날개, 하지만 그렇다고 어리고 젊은 스톰라이더가 약하기만 하냐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쌓아온 세월이 모자라서 약하기는 해도, 간혹 할배의 날개에 위협적인 충격을 주고 반발해오는 날개도 있었다.
그 허공의 격전 속에서 투란이 쓰러뜨린 스톰라이더 무리는 골짜기 아래로 떨궈졌다. 깜깜하게만 보이는 그 바닥 어딘가에, 뭔가가 다 뜯어먹지만 않았다면 잔해가 여전히 거기 있을 터였다.
―쓸모가 없지는 않겠군. 잔해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말이야. 과연 남아 있기는 하려나?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생각에 살짝 미심쩍은 꼬리를 붙이듯이 중얼거렸다.
투란도 그 미심쩍음에 한숨을 더하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마력도 넉넉하잖아. 프로브부터 보내고…….’
―보냈다, 하지만 마력이 넉넉한 건 아니야. 파워 서클과 연계가 아직 튼튼하지 않아. 늑대로 오락가락하면서 소모량이 생각보다 컸어. 그 제단에 먹힌 것 같은 부분도 있으니까.
‘응? 마력이? 제단에?’
―그래, 제단은 자체적으로 마력을 축적해놓기도 했지만 마법이 발동하면 끌어 쓸 수 있는 주변 마력은 모조리 끌어 쓴 것 같거든. 덕분에 제대로 뭘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휩쓸려서 프로브가 부서지기도 했어.
‘흐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스톰라이더는?’
테라트가 아래로 향하는 암염의 굴을 여는 광경을 보며 투란이 다시 물었다.
세세한 상황이 마법과 관련되자마자 회피하는 듯한 물음이었기에 드라고니아는 혀를 차는 시늉을 했지만, 어쨌든 골짜기 아래를 향해 보낸 프로브의 상태를 파악하며 말한다.
―바닥이 꽤나 거칠어서 많이 부서졌지만, 그래도 날개는 튼튼해서인가 그럭저럭 남아 있군. 그런데…… 뭐가 또 있는데? 저건…… 데드 워크?
‘로튼 웜?’
―아니…… 짐승인 것 같다만…… 이 암염층을 둘러싼 지층 암석에 마력이 은근히 방해받는군. 직접 내려가서 봐라. 너한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래? 얼른 가봐야겠네.’
투란은 조금 의지를 모았고, 마력을 키우며 테라트를 재촉했다.
정령수의 힘이 점차 더 강해지면서 암염층뿐이 아니라 주변의 지질(地質)도 투란이 내달리기 괜찮은 형태로 변화하며 통로의 일부가 되었다. 덕분에 골짜기 아래로 열린 길은 보다 쾌적하고 빠르게 열렸다.
하얀 하늘이 작은 틈으로 보이며 골짜기의 짙은 그림자가 어둠처럼 내려앉아 어지간한 눈으로는 주변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위에서 뭔가 떨어져 내린다면 아래에서 뾰족하게 돋아난 굵은 송곳 같은 암석 이빨에 그대로 꿰일 판이었다. 평평한 곳은 전혀 없다고 외치는 듯이 온통 울퉁불퉁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빨처럼 돋아난 돌조각이 길고 짧게 가득 펼쳐진 풍경, 이것이 골짜기의 바닥이었다.
그 풍경 속에 이질적으로 맺힌 것은 날개, 날개의 중심이었던 몸의 파편 무더기였다. 느닷없이 까마득한 저 하늘 틈새 쪽에서 무더기로 떨어져 내리며 으스러진 잔해가 넓게 펼쳐져 있는 셈이었다.
그 바닥 절벽의 어두운 한 귀퉁이, 완전히 바닥에 닿지 않고 대략 칠팔 미터의 높은 곳이 툭툭거리면서 돌조각을 흘리며 굴을 열었다.
굴에서 투란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두운 풍경을 보자마자 투란의 눈가에 검은 얼룩이 생겨났고, 얼룩 속에서 크고 작은 눈알이 섬세하게 돋아났다.
‘흐흠, 데드 워커 같은 것은 안 보이는데?’
골짜기의 바닥은 보이지만, 길게 이어진 양끝은 절벽의 굴곡과 함께 사라지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가, 투란이 머리를 내민 주변에는 그저 스톰라이더의 훼손된 잔해만 널려 있을 뿐이었고 죽어서 움직이는 시늉을 하는 뭔가는 전혀 없어 보였다.
투란이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하얀 틈새…… 하늘처럼 보이지만 얼어붙은 눈이 뭉쳐 막고 있는 광경이 있었다. 딱히 그 중간의 허공을 날고 있는 녀석은 없었다. 절벽을 파먹고 튀어나올 듯이 보이는 뭔가도 없었고.
―이 주변에 있는 놈은 저쪽 날개 아래에 파묻힌 하나 정도이고, 여기서 백여 미터 정도 멀리, 저기 가려진 너머에서 스톰라이더의 몸뚱이를…… 파먹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뜯어먹는 시늉을 하고는 있어. 허리가 뼈만 드러난 꼴이라 먹는 대로 으스러져 그냥 흘러내리는 꼴이지만 말이야.
‘무서운 얘기냐?’
어이없어 하면서 투란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위의 하얀 틈새 너머는 꽤 멀었지만 여전히 눈보라의 잔영이 휩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였다. 당장 주변에 이상한 것들이 있다지만 투란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스톰라이더의 날개, 온전하게 정수를 얻을 수 있는 잔해였다.
그 잔해 위에 내려서며 바로 삼키려는 것이었는데.
―피해라!
발끝이 닿을락말락하려는 순간에 드라고니아가 외쳤다.
투란도 뭔가가 오싹하게 몰려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을 꽉 채우듯이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좁아진 골짜기의 폭을 아예 모두 채우겠다는 듯이 밀려오는 뭔가를 확실히 피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날벼락이 벽이 되어 치고 들어오는 격이었다.
‘셰이아.’
그래도 투란은 가장 최근에 얻은, 정령의 별궁에서 데려온 정령을 부를 수 있었다. 주변의 그림자 덕분에 한층 더 활발해진 정령수가 곧바로 투란에게 호응하며 마력장벽을 펼쳐냈다. 발아래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몸 주변을 감싸는 두터운 구형의 마력장벽이었다.
둔탁하고 소리 없는 자극이 마력장벽에 부딪혔다.
투란을 감싸고 억누르려는 기묘한 힘…….
투란은 발끝에 발판삼아 새로 마력장벽을 맺고 밟으며 튀어 올랐다.
몰려오던 기묘한 힘이 얄팍한 곳을 가르고 절벽에 들러붙을 수 있었다.
그사이에 투란의 발끝에서 가늘고 길게 시커먼 잉크의 흔적이 흘러나가며 주변에 옅게 뿌려져나갔다.
뛰어내린 굴과 반대편인 절벽에 붙은 채로 주변을 확인했고, 밀려온 뭔가가 일으킨 기묘한 변화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벽? 아니, 포석?’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흔적조차 없는 사나운 암석으로 이뤄진 바닥과 거친 절벽의 낮은 부분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벽과 바닥의 형태로 변해 있었다. 왕성의 궁전 안이라든가, 도시의 깔끔한 도로 풍경처럼 변한 채로 스톰라이더의 잔해를 담고 있었다.
투란은 낯을 구겼지만 곧바로 뿌려둔 잉크를 움직여 스톰라이더의 잔해를, 시야 내의 잔해를 모두 옅게 덮었다. 그 속에서 핏빛이 피어올랐고 섬세하게 도는 고리의 흐름이 바로 만들어졌다.
덮쳐온 것이 여전히 무엇인가는 알 수 없었지만, 몬스터 로드의 고유마력이 맹렬히 활동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금방 구겨지고 망가진 스톰라이더의 날개가 완연히 투명하게 변하며 흩어졌고, 잔해는 옅은 거죽과 내장, 뼈다귀 정도만 남아버린 듯했다.
투란은 대략 서너 마리 정도 되는 스톰라이더의 잔해를 삼킨 다음, 곧바로 흘려낸 잉크를 거둬들이면서 붙어있던 자리에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데드워커가 온다.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투란도 그 방향을 흘깃하며 한층 더 좋지 못한 낯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로 말해야 했다.
‘그래, 이쁘게 깔린 돌을 밟고 신나게 달려오네. 대체 뭐야?’
―모르겠어. 갑자기 이런 골짜기 바닥을 무슨 성의 내부처럼 꾸미고 있다는 것만 보일 뿐이고…… 근원이 어디인가도 모르겠다. 아주 길게, 이 골짜기 밖의 어딘가로 이어지는…… 이걸 마력이라고 해야 하나?
‘저건 몬스터 헌터가 죽어서 된 건가? 북벽 산맥의 몬스터 헌터? 이상한데?’
드라고니아가 지형을 변화시키는 힘에 의아해 할 때, 투란은 데드워커 서너 마리의 차림새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루곤왕국 역시 춤추는 산맥과 맞닿은 곳이고, 마수라든가 몬스터 중에 흉악한 녀석들이 꽤 배회하고는 있으니 몬스터 헌터야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란이 지나쳐오면서 본 루곤왕국 사람들의 차림새는 저기 다가오는 인간 시체가 아직 걸치고 있는 옷맵시랑 전혀 달랐다. 저 데드워커의 차림새는 오히려 투란에게 아주 낯익은 춤추는 산맥의 몬스터 헌터 쪽이었다.
―로튼 웜의 배 속에서 기어나온 모양이군.
‘에? 뭔 소리야?’
―몸에 붙은 쇠붙이들을 봐라. 원래 재질을 파악하고 녹슨 형태를 보면, 저건 로튼 웜의 배 속에서 삭혀지다가 나온 거야. 죽을 때 뽑지 못한 칼날붙이가 손상된 채로 가죽이랑 눌어붙은 꼴이 딱 그 모양이야.
‘아하…… 그렇다면, 정말로 로튼 웜도 없는 녀석을 잡아다 이 산에 던져놓은 거네? 어우…… 그 배 속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데드워커가 된 거라니…….’
한숨도 탄식도 나오지 않았다.
투란은 저 데드워커, 언제 죽었는가도 모를 몬스터 헌터의 사체(死體)를 어떻게 불태울까를 잠시 고민했다. 나름 활발하게 움직이는 꼴이 악마의 심장 같은 시시한 것으로 인한 데드워커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충분히 화력(火力)만 높다면 대부분의 데드워커는 태워 재로 만들 수 있는 것, 버닝 데드 같은 특별한 경우만 아니라면 불길이야말로 데드워커를 제압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한데.
―포석에서 못 벗어나는 모양인데?
드라고니아가 조금 놀란 듯이 말하고 있었다.
투란은 자신에게 밀려왔다가 묘한 변화만 일으킨 힘이 오그라들면서 그 위를 걷던 데드워커가 허우적대는 꼴을 보며 함께 놀랐다.
데드워커 서넛 중 하나로 셀까 말까 고민하게 하던 반 토막이 포석 위에서 부스러지며 사라졌고, 나머지는 포석 밖으로 걸음을 딛지 못한 채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으스러진 살점 아래로 뼈를 드러낸 채, 이빨을 부딪치며 살아있는 투란에게 다가오고 싶어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가는 지형에는 발을 못 딛고 포석 위에서만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덮어썼으면 나도 저렇게 될 뻔했나?’
새삼 마력장벽으로 밀어내며 바닥에서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투란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거야. 도대체 저건 무슨 마법인가 모르겠군.
드라고니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으음, 그건 지금 따질 때가 아니야. 저 소리가 뭔가부터 따져야지.’
골짜기 저편에서 뭔가 험악하게 울리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그 소리에 투란은 고개를 쳐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얗게 보이던 하늘 같던 틈새에 금이 가며 새파란 하늘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너지네?
드라고니아의 짧은 말에 투란은 헛웃음부터 흘려야 했다.
뚜껑 혹은 지붕이었고 아주 튼튼해서 부서지려면 한참 걸릴 줄 알았던 얼어붙은 눈덩이들이 골짜기를 타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데드워커들을 가둔 포석, 벽의 형태가 오그라들면서 사라지는 상황은 마치 쏟아지는 눈더미를 피하겠다는 듯이 보일 지경!
‘싣고 가버린 거냐?’
데드워커들까지 사라지는 광경을 확인하고 투란은 소리 내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너도 피해야겠는데? 굴?
드라고니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파고 내려온 굴을 흘깃한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스톰라이더의 날개, 시험해봐야지.’
우두둑, 조금 전에 끌어모아 하나로 뭉친 정수가 투란의 등에서 날개를 뿜어냈다.
키드득, 쇳소리를 내며 날개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