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89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95)
춤추는 산맥의 상식, 몬스터 헌터라면 칼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를 무조건 갖춰야 한다! 한 가지는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강철의 검, 다른 한 가지는 축성술(蓄聖術)의 각인(刻印)이 새겨진 은색의 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강철의 검으로 베고 쪼개고 쑤셔도 순식간에 그 상처를 메워버리는 ‘일그러진 존재’로 분류되는 몬스터를 만날 수 있으니까!
축성술의 각인에 가장 좋은, 나름대로 저렴한 소재는 은(銀)이었다.
덕분에 각인을 새기다보면 은색의 검 한 자루를 갖게 되는 것.
그 기본에 충실해서 투란도 알드바인에서 검 한 자루는 은각인을 새긴 것으로 골라 챙겼었다. 그리고 그 검은…….
‘배낭에서 칼 꺼내야 하나!’
망령이라 불리는 것에도 칼날이 먹히니, 당연히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닌가?
―몬스터 로드가 뭔 허튼소리냐? 망령이든 뭐든 몬스터에게 타격과 피해를 입히는 것이 고유마력의 기본성질이잖아! 지금 무슨 초보 헌터 흉내 내겠다고? 누가 보냐? 아무도 안 봐!
드라고니아가 핀잔과 잔소리, 으르렁거림을 바로 쏟아냈다.
‘아, 그렇기는 하지만…… 망령이라며? 그런 거한테 주먹이든 손톱이든 들이박고 싶지 않다고! 유령 따위는 정말 싫다고!’
투란은 움찔하다가 당당하게 몸에 소름 끼친다는 시늉을 하면서 대꾸했다.
그러는 사이에 투란의 발걸음은 모래먼지가 가득한 통로를 디뎠고, 손끝으로는 모래를 흘리며 먼지를 피워내는 벽을 더듬는 채로 움직였다. 모래 통로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나오고 보니 그냥 모래굴이었다.
굴 입구는 바로 언덕을 오르는 자리처럼 보였는데, 좌우를 둘러보니 언덕이 무슨 성채라든가 벽처럼 치솟은 채로 곳곳에 뚫린 굴에서 투란처럼 나오는 누군가, 혹은 뭔가를 일단 저지하려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해자?’
문득 성채의 구조를 떠올리며 투란은 이 모래 지형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가 갸웃했다. 무엇보다 언덕 너머로 높디높은 모래 천장을 향해 치솟은 여린 빛의 기둥이 뭔가 지키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 지형도 그렇게 방어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가 싶었다.
쉬이잇, 파팟!
잠깐 언덕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는 사이, 투란의 옆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사나운 숨소리를 내는 뱀이 있었다.
“음?”
어리둥절해서 투란이 보니 길이는 고작해야 1미터를 겨우 넘길 듯한 뱀이 독이 뚝뚝 떨어질 듯한 이슬처럼 맺힌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모래 바닥에 빗금을 팍팍 그어대며 반쯤 날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검은 비늘이 번들거리며 어스름한 풍경 속에서도 파릇한 눈알이 심상찮게 번뜩이는 모습이 독사의 위엄이라도 떨쳐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투란도 조금 제대로 상대해주기로 했다.
가볍게 손가락을 내밀었고, 뱀이 손가락을 물기 위해 도약하기 쉽게 높이도 맞춰줬다. 거침없이, 용맹하고 사나운 위엄을 과시하던 독사는 사양하지 않고 튀어 올라 투란의 손가락을 물려 했다.
허공에서 부드럽게 휘며 구불거리며 펼쳐지는 뱀, 그 목구멍 속으로 하얀 줄기…… 촉수가 꽂혀 들어갔다. 그대로 뱀의 몸이 빳빳하게 펼쳐지며 1미터짜리 길쭉한 막대, 단창처럼 꼿꼿해졌다.
뱀의 독니가 촉수를 무는 시늉을 했지만, 촉수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바람결에 멈춰질 뿐이었다. 독니는 물론, 거기서 뚝뚝 떨어지는 독액조차도 하얀 촉수에 닿지 못하고 그저 바람결에 스쳐 내려갈 뿐이었다.
칙, 찌직.
뱀의 몸 곳곳에서 검은 가시가 돋아났고 가죽이 벗겨지며 으스러졌다.
순식간에 뱀의 형체는 뼈만 남은 채로 촉수에 감긴 꼴로 남았다.
우두둑, 뱀의 뼈를 흩어버리면서 투란이 중얼거린다.
“배부르네, 사막 재규어 한 마리에…… 이놈은 뭐 하는 독사야?”
―사막 바이퍼. 독성을 보니 아직 어린놈이다. 다 자라면 한 십이 미터? 그 정도 되는 독구렁이지.
‘새끼라고?’
어이없어 하며 투란이 헛웃음을 흘렸다.
보통 짐승의 새끼라면 상당히 장난꾸러기라도 낯선 것에 대해 조심스럽기 마련이잖은가? 이렇게 보자마자 달려들다니…… 심지어 지금 투란은 사막 재규어의 가죽을 홀랑 뒤집어쓴 채가 아닌가!
‘사막 재규어, 이 녀석 엄청 약한 놈이었나? 뱀 새끼도 그냥 무시할 정도면…….’
살짝 씁쓸한 투란이었다.
강한 짐승의 가죽은 보다 약한 녀석들을 겁먹게 해서 물러나게 할 줄 알았는데, 새끼 뱀이 저리 덤빌 지경이라니.
―사막 바이퍼는 다크림보랑 성질 더럽기로 쌍벽이라 할 만하지. 그냥 이 뱀 품종이 몰상식한 것뿐이야.
드라고니아가 위로라도 하는 듯했다.
투란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으니.
‘뭐? 그럼 다 자라면 십이 미터나 되는 놈이 뭘 보면 그냥 달려든다는 얘기냐?’
―그렇지.
어정쩡해진 드라고니아의 대답.
‘다크림보보다 더 심하잖아! 그건 그렇게 자라지는 않는다며?’
―뭐, 그렇다만…….
다시 맹해진 대답에 투란은 혀를 차며 일단 언덕으로 오르려 했다.
저 멀리서 치솟는 빛의 기둥, 여리지만 거기 뭔가 있어서 이 근방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찰싹.
막 언덕에 발 딛고 촉수를 회수하려는 순간, 손가락 끝 촉수가 멋대로 휘더니 투란의 이마빡을 두드렸다.
“응?”
자신의 손가락, 자신의 촉수가 멋대로 움직인 것은 투란의 걸음을 바로 멈추게 했다. 유렐리아의 촉수가 왜 갑자기 멋대로 움직였는가, 어째서 투란의 의도에서 벗어났는가?
뭔가 생각하기 전에 투란은 등골에서 황금모피의 일부가 치솟고, 눈가가 시큰거리면서 메듀시아의 눈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세 자매가 동시에 뭔가 항의하려는 듯한 낌새, 그리고 충족되지 못한 본능 속에 각인된 의지가 또렷하게 투란의 마음에 드리워졌다.
‘아…….’
―뭐야? 무슨 일이야?
경계심을 높인 드라고니아의 물음이었다.
설마 아직 고르고니아가 제멋대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 못했기는 드라고니아도 투란과 마찬가지였던 모양.
‘별거 아냐. 후우…… 셋이 얼굴 맞대지 못했잖아. 아직 칸막이 놔둔 채라고. 음, 일단…… 마법 칸막이를 울타리로 옮겨서 셋을 감싸줘. 그 반짝반짝 정원 안에서는 세 자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영향을 주지 못하게. 알았지?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투란은 이마를 문지르면서, 촉수가 된 손가락과 아닌 손가락이 주는 미묘한 촉감의 차이에 희미한 웃음을 저절로 떠올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드라고니아에게 요청했다.
―그래.
다른 말없이 드라고니아도 바로 응했다.
투란은 문장의 풍경, 그 속에서 찰랑이며 변화는 빛의 정원을 감상했다.
그리고 세 자매가 기묘하게 어울리는 광경도.
* * *
스테노아는 지친 듯이 툭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메듀시아가 그런 스테노아에게 바싹 붙으며 팔짱을 끼고 받쳐주는 자세를 꾸몄다.
유렐리아가 그런 두 자매의 뒤에 붙으며, 스테노아를 받쳐 들고 메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촉수 다발을 움직였다.
촉수로 된 작은 의자에 스테노아가 앉은 채로 메듀시아에게 기대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메듀시아는 한 팔을 스테노아에게 두른 채로 유렐리아의 촉수 한 가닥을 쥐고 볼에 부비고 있었다. 함께 있다 보니 유난히 커 보이는 유렐리아는 그런 둘을 가만히 품에 보듬은 것처럼 서서 느릿느릿 새의 발을 움직이며 빛의 정원을 밟고 걸었다.
바람결이 빛의 정원을 맴돌았고 세 자매를 휘감은 울타리가 더욱 찬란하고 휘황하게 빛을 흘리며 견고해졌다. 빛은 이제 감금이 아니라 보호를 위해 세 자매 주변을 움직이는 듯한 분위기를 띠었다.
메듀시아의 몸에서 뱀의 흔적이 사라졌고, 얼굴은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고정되며 검은 머리카락과 검게 늘어진 옷차림이 부드럽게 살랑대는 모습이었다. 그 미모의 얼굴 한복판에서는 변함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 테두리를 지닌 채로 반짝이는 중이었다.
스테노아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없어졌으니, 이제 마음 놓고 자매들에게 기댄 채로 잠만 자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몸에 둘러진 황금모피에서 일어나는 금빛이 파동이 쉼 없이 두 자매에게 흘러들고 있기도 했다.
유렐리아는 스테노아를 묘하게 안아들고, 메듀시아가 자신에게 기대도록 하며 느릿느릿 바람결을 둘러치면서 정원을 산보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이는 세 자매의 풍경…….
‘마법 바꿨어?’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세 자매의 모습을 보며 투란이 갸웃한 채로 고요하게 물었다. 드라고니아도 평소와 다르게 문장의 풍경을 울리는 소리 대신에 마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아니, 유렐리아가 제멋대로 뒤틀었다. 이젠 내가 아니라 유렐리아가 저 마법의 주체가 돼버렸어. 어쩌면…… 네가 직접 저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지.’
뜻밖의 말이었다.
저 빛의 정원은 별빛무리를 부리는 것과 같은 마법이 아니었던가?
‘너, 괜찮냐?’
투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써 모습을 감춘 마법인데, 투란이 그걸 만지작거릴 줄 알게 되면 드라고니아의 진정한 모습이 들통 날 수도 있잖은가. 여태 숨겨왔는데 이렇게 괴상하게 그 마법을 잃게 된다면…….
‘난 문제없지. 저 녀석들에게 건 마법의 주도권이 넘어갔어도, 내 쪽은 전혀 이상이 없거든.’
드라고니아가 우쭐하는 낌새로, 살짝 으스대기는 말투까지 써가며 대꾸했다.
투란은 어이없어 피식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면서 투란은 다시 세 자매에게 집중했다.
‘투란-고르고니아’의 아케인 패턴을 다시 마음에 떠올렸고, 세 자매가 서로의 힘을 연계하는 과정을…… 서로의 존재를 보태며 ‘투란-고르고니아’로서 겨우 온전히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방 투란은 깨달았다.
셋의 장점과 단점, 셋의 본능에 새겨진 상호보완의 여러 단계.
홀로 무엇인가를 어찌하기보다 셋이 끊임없이 연계해서 이뤄내야 하는 힘의 특성…… 라미아와 타우루스의 시조 노릇을 어찌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이해, 사물에 어떤 식으로 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초적이며 근원적인 지식.
단숨에 한없이 흘러들어온 듯한 그 새로운 지식을 통해 투란은 고대에 세 자매를 불러낸 마법이 소환술이라는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유렐리아의 바람막이 정말 뚫기 어렵다는 것과 그걸 뚫으라고 준비된 벌레 무리에 대한 의혹이 한층 더 깊어지기도 했다.
* * *
“푸핫!”
숨을 깊이 토해내면서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금방 탁한 모래 먼지를 머금은 숨을 들이쉬는 채로 투란의 의문이 되풀이되었다.
‘대체 그 벌레는 뭐였지? 진짜로 유렐리아가 몸을 지키는 바람막까지 뚫을 수 있는 거였나?’
―몬스터 로드의 고유마력도 거침없이 뚫었잖아. 아무리 늑대의 문장이었다 해도 그걸로 오러를 활성화시킬 줄까지 알았던 너의 방어는 부술 수는 있어도 그렇게 스며들며 파고들 수는 없는 수준이었어. 그런데 지금 그걸 따질 때는 아닌 것 같다만?
‘음?’
―여기서 나갈 길부터 찾으라고! 괜히 도감 꺼내놓지 마라. 이 미궁 안에서 가진 물건 털리지 않으려면 아예 꺼내지 말라니까.
‘에? 크으응.’
툴툴거리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투란은 허튼소리로 여기지 않았다.
주변의 모래가 살랑거리면서 움직이는 꼴이 어딘가 섬뜩하니까.
슬그머니 사막 재규어의 가죽에 얹히며 움직이는 엷은 모래 무늬는 마치 유령이 더듬어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으니까!
‘이게 모래 망령?’
배낭을 꺼내면 바로 덮쳐서 채갈 듯한 위험한 움직임이라고 모래의 흔들거림을 노려보는 채로 투란이 물었다.
―아냐. 그냥 정상적이지 못한 모래일 뿐이지. 미궁 안의 모래는 반쯤 살아있고 반쯤 자연스러운 채니까. 그런 것까지 지나치게 경계하지 마라.
‘음…… 지금 막 생각났는데…… 어쨌든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기왕 유렐리아도 얻었잖아? 그러니까…… 폭풍으로 위를 갈아버리고 뒤집어서 나가면 안 될까?’
투란은 눈을 아주 위험하게 반짝이면서 모래로 채워진 천장, 미궁의 뚜껑을 노려보면서 의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미친 소리 하지 마! 모래 망령을 사막 너머로 풀어놓을 참이냐! 절대로 하지 마!
너무 놀란 듯, 드라고니아의 외침은 한 박자 늦은 채로 나오고 있었다.
그 외침에 움찔하며 투란이 바로 묻는다.
‘그게 무슨 얘기야? 망령이 사막 너머로 풀려나다니?’
사아아…….
주변의 모래티끌이 흔들거렸고, 언덕 너머의 빛의 기둥은 더욱 희미하게 주변을 어스름하게 만들며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