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
맑은 물, 온몸으로 들이켠 맑디맑은 물은 투란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투란은 점차 몸속이 개운해지면서 상쾌한 느낌이 가득 퍼지는 것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 상황은 팔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격류 속에서 숨을 못 쉬어 헉헉대다가 정신 줄 놔 버릴 만한 것이 아니던가?
한데 지금 투란은 오히려 머리 구석구석까지 맑게 개었고 코로 들이켜는 굵은 물줄기가 마치 바람이 돌돌 뭉쳐 들어오는 듯이 통쾌하기만 했다! 이렇게 정신이 말짱해지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할 정도로 여유마저 생겨난다.
‘심장!’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악마의 심장, 투란이 삼킨 몬스터의 본능이 냉정하게 몸을 구석구석 들쑤시면서 작용하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필요한 것, 해로운 것을 가늠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몸을 쾌적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리고 심장 속에 담긴 의식, 또 하나의 머리처럼 생각하는 투란은 보고 듣는 것을 냉정하게 검토하면서 이 물속에서 팔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허우적거리는 몸짓을 어떻게든 잡아 보려 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언젠가 봤던 헤엄치는 사람의 흉내를 내 보려는 듯한 노력이었다.
‘음, 그건 안 좋은 기억이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투란을 쓴웃음 짓게 했다.
자신이 헤엄을 못 치는 탓에 너무나도 멋지게 헤엄치는 사람을 정신없이 구경했던 기억, 결과는 벌거벗은 여자를 구경한 꼴이었고 어린놈이 밝히기부터 하네 뭐네 하는 나쁜 소문만 돌았다!
정작 투란 앞에 당당하게 벌거벗은 채로 나왔던 여자, 몬스터 헌터라던 그 여자는 투란이 순수하게 헤엄치는 것에만 관심을 둔 것에 시원하게 웃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갚을 빚이지.’
투란은 다문 입을 더 꽉 깨물어 다물며, 맑은 물거품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집중할 때인 것을 확인했다. 머리로는 과거의 순간이 스쳐 갔지만,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에 담긴 ‘투란’은 철저하게 지금 보고 듣고 겪는 일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상쾌한 물의 흐름은 투란이 아는 상식과 정상에서는 벗어난 것이었다.
방금 겪은 일을 돌이켜 보면 오래 지속될 가능성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찾아올,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응하기 위해서 투란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악마의 심장은 사람의 몸에 해로운 것을 이 물을 통해 걸러 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화시킨 양분을 적절히 몸에 배분했고, 활동에 장애를 일으킬 상처를 봉합하고 복구하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이 투란에게는 막연한 감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듯이 또렷해서 괴상망측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몸이 그렇게 살과 뼈와 피로 채워진 형상인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 신기한 몸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악마의 심장이 뿌린 넝쿨은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고 사람의 몸이 지녀야 할 수준을 가볍게 초월하는 강인한 구성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투란은 이를 ‘한 겹의 가죽이 모자라면 두 겹의 가죽으로 버티면 된다.’라는 꼴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살갗, 힘줄, 핏줄의 틈새를 잔뜩 채우는 미세한 넝쿨의 감각은 딱 그런 것이었으니!
이렇게 떠내려가면서 맑은 물이라는 갑작스러운 이득을 챙긴 투란의 여정은 예상보다는 조금 길게 이어져, 어딘가 지루하다 생각할 무렵에 끝났다.
콰아앗!
갑작스럽게 물줄기가 뭔가에 부딪쳤다가 흩어졌고, 투란은 자신이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깨닫고 몸을 웅크리며 다시 어디에 부딪쳐도 버틸 수 있게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은 바로 어디에 부딪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추락할 뿐이었다.
투란은 눈을 부릅뜨고 눈알을 굴렸다.
눈동자의 투명한 줄기가 그려 내는 허화(虛華)가 잠시 보였지만 그보다 분명하게 어떤 상황인가가 드러났다.
“으앗!”
소리치며 투란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가 손을 내민 쪽에는 절벽이 있었고, 그의 몸은 그 절벽과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둔 채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절벽에 매달리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니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와아아아아!”
손이 닿지 않았다.
투란이 눈으로 처음 확인한 순간에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거리였는데, 어느새 활짝 편 손 정도의 거리가 생겨났고 점점 그 폭이 넓어지려 했다.
아무도 잡아 주지 않은 채로 떨어져서 또 뭔지 모를 일을 겪어야 하는가? 운이 좋아 피했던 황색의 질풍이 이번에도 반겨 주는 일은 없을까?
“잡아!”
투란은 자신을 향해 외쳤다.
이치에 닿지 않는 외침이라고, 냉정한 심장 속의 ‘투란’이 대답하는 듯했지만 투란은 정신을 집중해서 한 가지 심상을 품고, 더욱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잡아아앗!”
허우적대던 손 대신에, 심장과 가까운 왼손이 힘껏 내뻗어졌다.
맨살이 드러난 팔뚝 위로 울끈불끈 파란 핏줄이 솟구쳤다.
핏줄이 손목을 타고 손끝으로 꿈틀거리며 도드라지더니, 손가락 끝에서 뿌리 같은 형상으로 뭉쳤다.
투란의 보다 강렬한 외침이 터졌다.
“잡아앗!”
손끝이 터지면서 퍼릇한 빛을 띤 핏줄, 힘줄 같은 넝쿨이 거칠게 뻗어 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뻗은 넝쿨은 나아가며 꼬였고, 활짝 펼쳐진 형상이 손을 닮은 이유를 설명하듯 절벽을 후벼 팠다. 가느다란 실 가닥이 뭉쳐진 넝쿨이 절벽에 꽂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후벼 파는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가늘디가는 실 가닥이라도 그 끝이 수십, 수백 가닥으로 흩어져 뭔가를 긁으면 결국 엉겨서 달라붙을 틈과 만나기 마련이었다.
투란은 손끝에서 뻗어 나간 넝쿨이 팽팽해진 것을 느꼈고, 손에 힘을 줬다.
떨어지던 그의 몸이 절벽으로 당겨지듯 달라붙었다.
쿠웅!
귀가 얼얼하게 울리는 소리는 투란이 무슨 커다란 나무통에 부딪친 듯이 퍼졌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왜 났는가 따질 겨를은 없었다. 몸을 덮친 충격을 버티면서 두 손을 휘둘러 절벽에 더 강하게 달라붙어야 했으므로!
노력은 겨우 결과를 이뤄 냈다.
힘껏 발버둥 친 보답이라는 듯, 투란의 손가락이 절벽을 파고든 것이다.
추락이 겨우 멈추고 나서, 투란은 일단 축 늘어졌다.
잠깐이었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얻은 바가 있었다.
‘상상한 대로 되었네!’
늪에서 악마의 심장이 넝쿨을 뻗는 꼴을 퍼뜩 떠올리고, 자신의 몸속에서만 맴돌려고 하는 줄기를 밖으로 뻗어 내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기묘하게 투란의 가슴에 자리 잡은 악마의 심장이 거북해하고 싫어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투란은 자신의 의지를 앞세워 상상한 것을 실행했다.
“몬스터에게는 약점이 있지. 사람이 보기에는 이치에 닿지 않은 이상한 거라도 몬스터에게는 당연한, 그런 부분이 약점이야. 몬스터 로드는 이성으로 그 약점을 극복해서 몬스터를 부리는 것이고! 그래, 그러니까 몬스터 로드의 몬스터는 원래 몬스터보다 강한 거 아니겠어?”
‘개수작이라고 했는데…….’
뜨내기 몬스터 로드가 과시하며 허풍을 떨 때, 어쩌다 함께 오게 되었다는 몬스터 헌터가 비웃으며 그랬다.
몬스터의 힘을 완전히 이끌어 내는 몬스터 로드는 아주 드물다고.
게다가 그런 경우는 대부분 부적이 새겨진 장신구를 잃어버린, 폭동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 내 부적!’
돌연 투란은 이를 갈았다.
샤오콴 마을의 명물 대장장이 샤오덴 할배의 일을 도우며 몇 달 동안 꼬드겨서 겨우 손에 넣은 쇠나무 목걸이였다. 몬스터 로드의 정신을 지켜 주는 필수품, 심지어 보이드 엠블럼의 악랄한 상태에서도 죽지 않도록 해 준다는 효능이 있는 ‘투신(鬪神)의 가호’를 새긴 것이었다.
‘젠장, 쇠나무 조각도 구하기 힘든 거였다고!’
쇠처럼 단단하다고 이름조차 ‘쇠’인 나무에다가 뭔가 새기려면 대장장이의 재주가 필요했고, 효험 있는 부적을 파기 위해서는 어쨌든 사제(司祭)의 손길이 닿아야 했다. 그래서 마을을 들락이는 사제까지 부추기려고 더욱 샤오덴 할배에게 정성을 쏟아야 했던 투란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껏 새겨 만든 부적 목걸이를…….
빠드득.
투란의 입이 억센 소리를 내며 꽉 다물렸다.
보이드 엠블럼을 전이받으며 빼앗겼다.
어설픈 거짓말에 속은 셈이었다.
문장의 전이조차 방해할 정도로 효험이 있네 뭐네 하는 수작에 넘어갔으니!
‘되찾고 말겠어!’
투란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팔을 당기며, 발로 절벽을 긁었다.
위로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매달린 채, 또 물결이 찰랑이며 올라와 실어다 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 하물며 다음에 올 것이 물결이란 보장도 없잖은가? 오히려 또 이상한 색채의 질풍이 몰려와 험악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투란은 서두르면서도 침착하게 눈에 바싹 붙은 절벽을 살폈다.
열 손가락이 깊이 박힌 걸로 봐서, 절벽은 그렇게 단단한 편은 아닌 듯하지만 일단 박힌 다음에 손가락을 꽉 물고 있는 꼴이 아주 무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덜 단단하고 덜 무른 절벽을 빨리 이용해야 했다.
천천히 투란은 굽어진 손목에 기대면서 팔을 펴고 당겨 봤다.
그러자마자 두근거리는 심장이 팔다리를 튼튼하게 해 주는 넝쿨을 잔뜩 채우고 받쳐 줬다.
‘힘이 모자라지는 않네.’
가늠해 보니 한쪽 팔에만 힘을 줘도 몸을 버틸 만했다.
살짝 안도하면서, 투란은 한 팔을 접은 채로 한 손을 빼냈다.
이제 위에 꽂든, 뭔가 잡든 해야 하는데…….
“헐!”
투란은 눈에 들어온 자신의 손톱을 보고 놀란 소리를 내야 했다.
손가락은 분명히 그의 손가락,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한데 거기서 굵게 굽어져 나와 앞으로 손가락질을 해도 그 끝이 다 가려질 정도인 손톱은 대체 뭔가? 혹시 다른 몬스터라도 엉겁결에 악마의 심장이랑 함께 삼켰던가? 그것이 위기의 순간에 튀어나왔나?
아니, 무엇보다 한 번에 두 가지 몬스터를 삼키는 게 가능은 한 일이었나?
곧 투란은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기억한 것…….
투란의 가슴속, 심장으로부터 기묘한 심상이 흘러나와 알려 준 것이다.
손톱이 자라는 뿌리에 넝쿨의 극히 미세하고 섬세한 실그물이 짜여 들어가서, 손톱의 성장을 부추기며 원하는 형태로 다듬어 내는 방법이었다. 사람의 손가락은 절대로 그렇게 손톱을 키우지 않을 테고,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점박이 개처럼 생겨 사람처럼 걷는 어떤 마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손톱의 구조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성장시킬 방법만 있다면 사람도 할 수 있는 짓이고.
한데 도대체 누가 그 마수의 손톱이 지닌 ‘구조’를 기억했는가?
이 의문도 금방 답을 얻었다.
―흡수한 것들의 기억…….
악마의 심장이었다.
투란이 보이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몬스터 엠블럼으로 삼킨 것이 아닌, 거대한 절벽 같던 물고기를 만나기 직전에 이빨거머리을 씹으며 몸으로 흡수했던 악마의 심장이 지닌 ‘기억’이었다.
늪에서 허우적대기 전, 마수의 몸에 잠시 기생한 악마의 심장이 그 ‘기억’한 내용을 흡수한 개체—투란의 심장—에 전해 준 것.
투란이 몬스터 로드로서 형성한 악마의 심장은 매달리기 위해 허우적대던 그 상황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본능적으로 그 ‘기억’에 따라 손톱의 구조, 성장에 간섭했던 것이다.
‘그런 일도 되는 건가? 아니, 그런데 왜 넝쿨은 뻗지 않으려 해?’
악마의 심장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도 낯설지만, 늪을 헤엄치기 위해 한껏 뿜어내던 넝쿨을 새삼 뻗지 않으려 주춤대던 것도 이상하잖은가? 그러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핑계마저 대기도 했다!
투란은 숨을 고르며 좀 더 침착하게 자신을 가다듬고 심장에 주의를 기울였다.
악마의 심장에서 곤혹스러운 느낌이 흘러나왔다.
―왜 그랬지?
투란이 사람으로서 품은 의문을 악마의 심장에 담긴 투란의 의식도 똑같이 품고 있었다. 그저 아직 투란이 알지 못한 악마의 심장이 지닌 본능 그대로 상황에 대처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일 뿐이다.
“몬스터를 믿는 게 아냐. 몬스터 로드는 자신의 문장을 믿는 거지!”
새삼 떠오른 떠돌이 몬스터 로드의 허풍을 되새기면서, 투란은 일단 절벽을 후벼 파며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제치고 따져 볼 수는 없으므로.
하지만 투란은 이 순간을 뇌리에 꽉 새겨 놓고 있었다.
부적을 빼앗겨 버렸으니 자신이 언제 폭동을 저지르든가 아니면 광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탓이었다.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투란은 오직 자신의 정신력과 문장에 의지해서 돌파해야 했다. 어떤 짓을 저지르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