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01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897)
파스슷, 푸석푸석.
빛과 함께 흘러내린 모래 티끌이 자그맣게 피어올라 번져갔다.
모래 망령들이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 듯하다가 그 티끌에 이끌린 것처럼 방향을 잡는 광경은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특히나 자신을 노려보고 겨냥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꼴을 보는 투란에게는 한층 더 황당하고 스산한 광경이었다.
‘뭐야, 저거! 저거 무슨 마법이야?’
―저 안에 뭐가 있나 본데? 그게 널 느끼고 몰아붙이는 건가?
‘저기요? 이보셔요!’
―저거, 빠른데?
어이없어 하는 투란을 몰라라 하는 듯, 드라고니아가 빛의 기둥 쪽 광경을 투란의 시야에 훤히 비춰주며 말하고 있었다. 투란은 우글우글 느릿느릿 몰려오는 모래 망령 무리 너머의 그 광경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느릿하니 움직이며 모래 상자랑 겹쳐졌다 흘러나왔다 하는 괴상한 몰골의 모래 망령과 완전히 다른 뭔가가 여린 빛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무장하는 중?’
흐릿한 그림자처럼 여린 빛과 다른 밝기를 지닌 형체는 분명히 검과 방패를 그려냈고, 거기에 중갑을 두른 기사의 형체를 보다 또렷하게 배경으로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아랫부분을 보니 아예 망아지 모양까지 흐릿하니 피어오르는 것이 제대로 군마(軍馬)를 타고 무장한 기사의 형체를 만들 낌새!
투란으로서는 그래도 설마설마하는 사이, 기둥의 흐린 빛이 드리운 장막을 가르면서 군마가 뛰쳐나왔다. 무장한 기사의 형상이 모랫빛 강철의 질감을 또렷하게 드러내면서, 더 이상 잘못 볼 수가 없다고 눈동자에 강요하는 것처럼 질주해오는 말 위에 얹혀 있었다.
군마가 질주해오는 길목에서 느릿느릿 꿈틀거리던 모래 망령들이 곧바로 짓밟히며 흩어졌지만 금방 주변의 모래 티끌을 끌어모아 다시 그 형체를 꾸몄다.
달려오는 군마, 그 위에서 전의(戰意)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사.
느리지만 넓게 펼쳐진 채로 물결치듯이 다가오는 모래 망령의 무리.
투란은 자신이 숨은 언덕, 해자처럼 파인 구덩이와 곳곳에 뚫린 구멍으로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애초에 저 녀석들이 눈으로 보고 쫓아오는 것인지, 코로 냄새를 맡고 위치를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유령이 얽힌 이야기에서처럼 살아있는 자의 기척을 저절로 알아차리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상태로 어정쩡하니 그래도 한번 숨어볼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몰라?’
딴소리하는 순간부터 투란은 드라고니아도 이 상황에 낯설어 한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을 꺼내봤다.
―미궁에서 탈출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탈출로는…… 미궁을 감싼 최외곽의 구멍 중에 통로가 있고, 그 통로가 가끔 천장이 열리며 사막으로 올라갈 길이 돼준다는 것뿐이었어. 모래 망령 말고 저렇게…… 아크의 광휘를 머금은 기사가 칼 들고 말 탄 채로 덤빈다는 말은 없었다. 피하든 막든 빨리 결정해라.
드라고니아는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관찰하며 아주 빠르게 투란에게 말했다.
뇌리에 쏙쏙 박히고 마음에 푹푹 꽂히는 그 말에 투란은 한숨 쉬는 시늉을 했지만, 대답은 말 대신에 움직임으로 대신했다.
푹, 푹.
투란의 두 손이 언덕을 이룬 단단한 모래에 꽂혔다.
꽂힌 팔목에서 시작된 검은 색채, 붉은 줄기가 금방 투란의 어깨까지 번졌다.
꽂혀있는 팔뚝 언저리로부터 모래 티끌로, 시커먼 색채가 물컹거리면서 번져갔다.
모래 티끌이 가라앉았고, 투란을 중심으로 검은 결정질이 퍼지며 단단한 바닥을 다지기 시작했다. 바닥의 반경이 대략 십여 미터를 장악하는 때까지, 불과 한두 호흡의 시간이었다.
모랫빛 강철의 보호구를 뒤집어쓴 군마가 사슴이나 멧돼지처럼 투란을 들이박겠다고 시커멓게 변한 바닥에 발을 디딘 것도 그 짧은 시간 사이였다. 하지만 이미 변해 있던 바닥은 곧바로 군마의 발을 딛는 순서대로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늪처럼, 발이 빠지는 순간에 치솟는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군마의 네 발을 묶어버린 것!
한데 군마를 타고 있던 기사는 그런 상황 따위는 익숙하다는 듯, 곧바로 공중으로 튕겨나간 몸을 앞구르기 하듯이 굴리며 모랫빛 강철의 검과 방패를 들이대며 투란을 찍어 누르려 하잖는가.
‘너무 익숙하잖아? 말 못 타던 망령이었냐!’
어이없어 투덜거리면서도 투란은 이미 기사의 움직임에 맞서고 있었다.
검에는 방패로, 방패에는…… 방패로.
투란의 두 팔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줄기가 또렷하게 불거지며 시뻘겋게 요동치는 용암을 흘려냈고 용암은 곧바로 두 개의 방패를 형성해내는 광경이었다.
터엉!
용암의 색채가 순식간에 검게 번들거리는 결정질로 바뀌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단순히 귀만 자극한 것이 아니었고, 주변의 모래 티끌이 거센 바람에 휘말리듯이 날려가는 충격파였다.
‘뭐야, 왜 짜릿하지?’
검게 물든 너머로 모래 티끌이 밀려나가는 꼴을 확인하면서, 방패를 형성해 막아낸 팔뚝 깊이 찌릿찌릿하니 파고드는 충격을 느끼면서 투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그마 로드의 형상으로 이뤄진 방패가 어째서 이런 충격파를 걷어내지 못했는가? 그 안에 맥동하는 힘은 분명히 모랫빛 강철의 검과 방패에 담긴 힘을 제대로 퉁겨냈는데!
―힘의 질이 달라. 이 녀석의 힘은…… 망령의 성질이 짙다. 벽이라든가 바위도 멋대로 들락거리는 그런 유령의 속성이라고. 물질적인 역동이라면 마그마 로드를 멋대로 투과 못하겠지만, 이건 마그마 로드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단번에 미칠 정도까지는 아니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뭐? 미쳐?’
―아크의 광휘를 머금은 망령 기사라고. 데쓰나이트랑 비슷한 거야.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것도 일종의 데쓰나이트라고 부를 만하려나? 아무튼…….
터엉, 카앙, 터텅, 카캉!
드라고니아의 말이 이어지는 사이에도 모랫빛 강철의 검과 방패가 투란을 연이어 후려쳐왔고, 투란은 어쨌든 방패를 더욱 넓고 두텁게 꾸미면서 막아냈다. 그 요란한 소리 너머에서 기사를 등에 태우고 왔던 군마는 머리만 남은 채로 나머지가 검은 늪에 빨려들어 사라진 몰골이 돼버렸다.
―망령이 깃든 검은 영격(靈格)에 타격을 줄 수 있어. 네가 느낀 짜릿함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혼령으로 느낀 거야. 네가 몬스터 로드이고, 마그마 로드가 애초에 자연현상을 기반으로 한 대단한 녀석이라 그냥 짜릿한 정도로 끝났을 뿐이니까 방심하지 마라.
카앙! 키이잉!
모랫빛 검과 시커먼 결정의 방패가 맞닥뜨린 채로 서로를 긁었다.
뒷골이 곤두서는 느낌에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말을 반쯤 흘려듣는 채였지만, 오래 싸워서 좋을 일은 없다고 확신할 수는 있었다. 저 멀리서 굉장히 느리게 다가오는 모래 망령 무리가 바싹 붙을 때까지 이 데쓰나이트 비슷하다는 녀석이랑 이러고 있기 싫기도 했고!
터엉! 쿠웅!
방패와 방패가 격돌하는 사이, 투란은 발을 움직였다.
발끝에서 일어난 파문이 출렁거리며 기사의 발목을 덮고 휘말고 잡아당기며 균형을 흐트러뜨리려 했다.
기사는 모랫빛 철갑에 휩싸인 다리를 거칠게 흔들며 발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검은 파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이었지만, 그 다리부터 시작된 힘은 제대로 결정질을 두드린 채로 새로운 충격파를 퍼뜨리고 있었다.
콰드득.
아직 버티는 듯했던 군마의 머리통이 격돌하는 파문과 충격파에 이지러지면서 완전히 형체를 잃고 사라져버렸다.
끼익, 키잉!
결정질 바닥이 뒤틀렸고, 시커멓게 꼬인 송곳이 돋아나며 거센 창이 된 채로 기사를 찔렀다. 방패와 검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그 창을 피하고 걷어내는 사이에 기사는 몸을 틀며 검은 결정의 창에 관통되는 것을 피했다.
‘와, 잘하네?’
기사로서의 기량을 칭찬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 투란의 의지는 잔뜩 치솟은 검은 창대에 새로운 가시송곳을 돋워냈고, 곧바로 허공을 가득 메우는 그물을 치듯이 교차하며 뻗어가는 가늘고 긴 창을 연이어 뻗어내며 기어코 기사의 검과 방패를 넘어 그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우득, 까드득.
모랫빛 철갑이 일그러졌고, 모랫빛 검과 방패도 우그러졌다.
뜨거운 붉은 광채가 검은 창대와 가시, 송곳의 형상 곳곳에 머금어졌다.
촤르륵.
모랫빛 형상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시뻘겋게 변해 쏟아져 내렸다.
―투란, 망령이 모래를 움직이는 거야. 모래가 녀석의 본질이 아니라고.
혀를 차는 말투로 드라고니아가 말했다.
그 말과 함께 투란도 느낄 수 있었다.
마그마 로드의 초열(焦熱)로 단숨에 녹여버린 모래, 그 안에서 뭔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 뒤틀린 힘이 되어 결정질의 바닥 너머로 튀어나갔다. 그 힘은 곧바로 모래 티끌을 휘감으며 돌개바람의 형체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다른 모래 망령보다 훨씬 빠르게 빛의 기둥으로 날아갔다.
투란이 녹여낸 모래를 그대로 용암의 일부로 섞고 갈아 없애며 다시 살폈지만, 역시 군마와 마찬가지로 기사의 몸뚱이, 철갑, 검, 방패의 흔적은 없었다.
붉게 흐르던 것이 순식간에 검게 식어갔다.
‘이러면 헛짓거리인데…….’
낯을 구기며 투란이 돌개바람의 행적을 흘깃했다.
잠깐 사이에 빛의 기둥은 모래 티끌을 흘려내는 채로 찰랑이며 돌개바람을 받아들이더니, 다시 흐릿한 그림자처럼 기사의 형체를 꾸미고 있었다.
―망령을 삼킬 생각은 전혀 없는 거냐?
갸웃하면서 드라고니아가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낌새가 가득한 그 물음에 투란은 움찔했다.
‘야, 유령이나 망령이나…… 그런 거 삼키는 거 아냐!’
―유령이 그렇게 싫으냐?
무슨 금기처럼 말하는 투란에게 드라니아가 바로 물었다.
‘다들 싫어하잖아!’
꽥 소리치듯, 하지만 소리 없이 외치고 투란은 곧바로 움직였다.
투란의 허리 아래가 바로 검은 바닥 안으로 빠져들었다.
넓게 펼쳐졌던 검은 결정질의 바닥이 부풀면서 우람한 근육질의 어깨, 팔뚝, 몸통을 꾸미며 치솟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몸뚱이의 머리를 대신해서 투란의 윗몸이 얹힌 꼴이었다.
약 7, 8미터의 신장과 그에 어울리는 체격.
하지만 두 손은 바위를 깨는 대형 망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머리 대신에 사람의 윗몸을 얹은 거인의 형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욱, 쿠욱.
모래에 발목이 파묻혔지만 괴이한 거인은 걸어 나갔다.
다가오는 모래 망령 무리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며 마울처럼 주먹이 내리찍혔다. 어느 틈엔가 어깨가 보다 두터워졌고 팔은 보다 길어진 채로, 거인은 꼿꼿이 서서 걷는 모습으로 발목 언저리를 망치처럼 내리찍는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퍼억, 퍼엉!
모래 망령이 충격에 휩쓸려 흩어졌고, 연이은 돌풍의 파동에 밀려나갔다.
하지만 무리는 흩어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모래 티끌을 끌어당기며 형체를 이루며 다시 거인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쿠웅!
거인의 두 주먹이 바닥이 아니라 서로를 마주 때렸다.
주먹과 주먹이 격돌하는 충격은 사방으로 흘려나가는 거센 충격파를 노골적으로 휘날렸다.
모래 망령 무리가 다시 휭 날려가는 사이, 군마가 방패와 기마창을 든 기사를 태우고 달려들었다.
‘딴 놈인가?’
기사의 자세, 돌격해오는 무기가 살짝 바뀐 꼴을 보며 투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괴이한 거인의 두 주먹은 그냥 기사의 군마와 방패를 휘둘러 칠 뿐이었다.
터엉, 퍼억!
두 팔이 길게 뻗은 채로 나란히 움직인 것을 기사와 군마는 피해내지 못했다.
방패가 울렸고, 군마가 옆으로 튕겨나갔다.
기사는 군마의 등자를 박차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창으로 거인의 머리, 투란의 가슴을 내리찍으려 했다.
파득, 파다닥!
홰치는 듯한 움직임이 투란의 허리춤부터 터져 나왔다.
날개 한 쌍이 거인의 쇄골 언저리에서 치솟아 기사의 창을 비껴내고 기사를 후려쳤다. 격투 전에 매우 익숙한 스톰라이더의 날갯짓이었다.
거의 동시에 거인의 어깨에서 거뭇한 촉수가 튀어나왔고 기사의 허리, 다리를 휘감아버렸다.
―별 소용없……군.
추측을 말하려는 듯했던 드라고니아가 확정짓는 말꼬리로 마무리했다.
붙들린 기사의 몸, 모랫빛 철갑에 단단하게 감싼 몸통이 곧바로 허물어지며 돌개바람의 형상이 되어 다시 날아가 버렸으니까.
‘칫.’
투란은 혀를 찼다.
녹여서 뭉개 돌아갔으니, 그냥 붙잡고 있으면 새로운 몸을 만들지 않겠거니 했는데 무력화되는 순간에 모래 망령의 기사는 그냥 빛의 기둥으로 회귀하는 선택을 드러낸 것이다.
망령이 빠져나간 뒤, 모래 덩어리는 그대로 부스스하니 흘러내렸다.
주변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투란은 새삼스럽게 모래 망령이란 호칭의 의미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모래는 그저 망령이 움직이는 소재일 뿐이고, 모래가 없으면 이 미궁의 망령들은 그냥 웬만해서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유령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튀자.’
결단은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