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0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00)
―다행, 이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넌 드라코눔의 정령술이 아닌 다른 계통의 정령술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지. 진정한 이름이 있는데 전혀 모른다는…… 때문에 모래왕은 너와 계약을 강행할 수가 없었어. 그러면 남은 방법은 둘, 투란 네가 영혼을 파고들고 파헤쳐서 기억 못 하는 이름을 강제로 되살려 내는 것이랑 모래 미궁의 아크, 그 근원인 성궤를 찾아 처리하는 것이지. 어느 쪽이든…… 너한테 좋을 일이 아니라고.
연이은 설명을 침착하게 듣다가 투란이 다시 앞선 이야기를 점검하듯 묻는다.
‘몬스터 로드라도, 생명이 완전히 날아가나?’
―모래왕이든 뭐든 자연적인 정령과의 계약은 지닌 마력보다는 혼령의 힘이 더 중요하지. 혼령의 힘을 소모하는 상황에서, 마력이 어떤 성질이든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아. 그래서 드라코눔의 정령술은 일부러 마력을 부여하는 조건을 끼워 넣기도 한다고. 혼령을 직접 소모한다는 의미는, 생명을 그대로 갈아 넣는다는 거니까. 어떤 정령술이든 제각각 장점도 단점도 있다만, 모래왕 정도 되는 녀석과 계약은 웬만한 그릇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아. 한데 녀석은 탈출할 생각이 가득해서, 널 가둬놓고 영혼을 갈아버리더라도 이름을 기억해내라 시킬 궁리까지 했어.
‘그거 꽤 위험한 짓이었냐?’
문득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진정한 이름을 찾기 위한 영혼을 건드린다는 부분에 대해 굉장히 분개하는 중이란 것을 느끼고 물었다.
―꽤? 미치는 지름길이다, 그건!
격한 대답이 투란이 느낀 바가 진짜였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했다.
투란으로서는 ‘대체 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드라고니아는 격앙과 분개를 그대로 담아서 말을 이어 설명까지 하고 있었다.
―그냥 적당히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야! 진정한 이름은 영혼 깊이 새겨지고, 혼령의 힘을 이루는 기반이 되어준다. 그런 이름은 잊혀지기도 까다롭지만, 되살리기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워. 그 이름을 잊었다가 되살리려는 시도는 영혼을 갈가리 찢고 파헤치는 짓이야. 그 과정에서 입는 상처는 마음 깊이 남고, 영적인 흉터가 새겨진다. 몸이 아무리 강건해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중상(重傷)이라고! 진짜 계약을 원하는 정령이라면 자기 계약자가 그딴 상처를 입은 채이길 바랄 리가 없어! 혼령의 힘이 그 흉터를 메우기 위해 소모되니까, 정령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란 말이지. 그런데 모래왕은 그런 짓까지 상관없다는 듯이 떠들었잖아!
‘흐흠, 그 이름이 그렇게 대단하고 중요한 거였냐?’
뚱하니 투란은 파란 하늘에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해를 슬쩍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정한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열변을 토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언제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드라고니아를 되새기면서.
―중요하지! 그 이름은 저주의 소재로도 아주 잘 쓰이니까.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함부로 남에게 건너지 않는 것이 왜 마법사에게 기본 소양이겠냐!
‘기본 소양?’
얼떨떨하니 되뇌는 투란이었다.
딱히 진정한 이름이라고 누가 이름을 말하는 것은 본 적도 없지만, 마법사가 그런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숨긴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으니까.
하지만 저주의 소재로 이름이 쓰인다니…… 정말이라면 자기 이름을 재빨리 잊고 가명으로 사는 편이 훨씬 낫잖은가?
―축복을 받을 때도 필요하니까. 아무튼 호의와 악의, 양쪽으로 진정한 이름은 다양하게 활용된다고. 어쨌든, 모래왕 곁에서 미쳐버릴 생각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꼴이 되고 싶었냐?
‘전혀. 어쨌든 나도 모르는 위기에서 구해줬구나? 음, 고마워. 근데 계약이 아닌 두 번째 조건은 뭐야? 징표 이야기였어?’
벅벅, 툭툭.
사막 재규어 가죽을 쓴 머리를 긁적이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걷어차면서 걷기 시작하는 채로 투란은 이야기를 다음으로 넘기려 했다. 드라고니아가 성난 이유가 투란 자신을 위해서인 것까지는 기분이 좋은데, 너무 분개해서 지금 상황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중이었다.
모래 미궁에서 모래왕의 호의, 별로 호의 같지는 않은 도움을 받아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사막 위였다. 언제 또 무슨 일로 모래 미궁에 툭 떨궈질지도 모른다는 사막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아크의 휘광, 그 이상한 기사와 모래 망령의 중심핵인 것처럼 보이던 그 빛의 기둥…… 그 근원이 바로 휘광의 성궤, 그 아티팩트이고 그게 모래왕에게 사라진 계약자를 대신해서 약속을 상기시키는 중이었다는 거지. 그게 처리되면, 지금 그게 놓인 상황이 바뀌게 되면 모래왕은 더 이상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모래 미궁을 뒤지고 찾아서 치워달라는 이야기야. 하지만 저 아래에서 모래 미궁이 돼버린 고대 왕국의 잔해를 헤집으면서 그걸 어떻게 언제 찾는다고 자신할 수 있냐? 먹을 거라고는…… 그나마 넌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먹는 녀석이라지만, 보통은 굶주려 죽는 일이잖아. 그런 걸 태연하게 두 번째 방법이라고 들이대다니…… 아무리 오래 갇힌 상태라지만, 모래왕이란 녀석이 너무 뻔뻔하잖아.
‘흐흠, 그렇군. 그래서 내가 다시 미궁에 빠지면?’
투란은 여전히 달아오른 드라고니아에게 불쑥 물었다.
살살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모래왕이 다시 빠지면…… 그냥 놓아주지 않는다고 경고했던 것 같으니!
―아주 곤란한 처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빠질 생각을 하지 마. 발아래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날아올라! 사막의 모래바람 따위는 그냥 뚫고 날아가라고!
드라고니아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그 태도에서 투란은 알 수 있었다.
‘너, 다시 빠질 경우는 생각도 안 하고 막 내뱉었던 거냐? 모래왕한테?’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 아닌가!
뒷일 생각 없이 그 자리를 모면하겠다고 마구 질러대다니!
말을 하다 보니 ‘이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놈이었나?’ 하며 드라고니아의 상태를 다시 되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투란의 가슴 속에 피어날 지경이었다.
―벗어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영혼이 갈리거나 굶어죽을 때까지 미궁을 탐색하는 거였지? 그렇다면 마구 내뱉고 질러볼 만하잖아? 설마 마법배낭 속의 식량과 물로 영원히 미궁을 탐색할 수 있다고 생각해?
뻔뻔하다 못해 당당했고, 그래서 어쩔 거냐고 냉랭하게 핀잔까지 하는 말투!
이쯤 되니 오히려 투란이 살짝 질리는 기분이었다.
‘누가 뭐래? 잘했다고, 고맙다고! 그러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나 궁리하자고!’
두리번거려도 사방은 누렇게 빛나는 모래뿐인 풍경이었지만, 한번 더 둘러보면서 투란은 항복하겠다는 듯이 말하고 말았다.
한데 그리 말하고 나니, 이 황량하게 모래뿐인 풍경이 어째 모래 미궁보다 한 수 위인 난관으로 보인다?
‘야, 너네…… 드라코눔에서 여기 지도 같은 거 만들지 않았어?’
살그머니 마음 한구석에 피어나는 불안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투란이 물었다.
―이 대사막의 지도라면…… 감싸고 있는 윤곽은 정확하게 그려놨지.
‘네? 뭣이라고요? 잘 못 들었습니다?’
불퉁스러운 대답이 무슨 뜻인가, 겨우 그 의미를 깨달은 투란은 황당함을 가득 담아서 으르렁거리며 되묻고 말았다!
지도에 윤곽만 있다니, 누가 그딴 것을 지도라 부른단 말인가!
길잡이란 놈이 이 숲만 넘어가면 된다고 떠든 다음에 숲 안의 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랑 똑같은 이야기잖은가!
터무니없는 대답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투란은 살짝 정신을 다시 부여잡고 이어 묻고 있었다.
‘프, 프로브는……?’
―사막의 권세 때문에 10킬로 너머를 제대로 탐지 못하는 거는 똑같아. 너에게서 10킬로 넘는 거리를 두게 되면, 프로브의 마력이 급격하게 소모되면서 강제로 해체당하기도 하지.
‘그럼, 나 지금 길 잃은 얼간이 꼴이란 말이냐!’
―그럴 리가. 이 사막에서 최대 20킬로 반경을 수색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지. 얼간이가 그런 특권을 누릴 수가 있겠냐? 게다가…… 이 사막이 아무리 폭이 넓고 길어도 수백 킬로미터 단위야. 작정하고 벗어나겠다면, 높이 날아올라서 해가 뜨거나 지는 방향을 잡고 날기만 하면 된다. 드레이크의 날개라면 하루도 걸리지 않을 일이지! 괜찮아! 걱정 없어!
드라고니아는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듯 떠들고 있었다.
오로지 투란의 마음에만, 뇌리에만 울리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살짝 마음에 위로가 되기는 하는데…….
툭, 툭.
볼을 타고 땀이 흘렀다.
투란은 그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다가 갸웃했다.
‘왜 이렇게 덥지?’
―검은 가죽을 뒤집어썼잖냐. 햇살 아래에서 검은색이 흰 색보다 빨리 달아오르는 거 몰라?
‘그랬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걷기 시작하고 나서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처럼 하늘의 한복판에 우뚝 버티고 있는 해를 흘깃하며 투란은 낯을 구겼다. 눈부신 탓도 있었지만 여러 시간을 걸은 듯한데도 전혀 기우뚱거리지 않고 꼿꼿한 해님에 대한 불만, 의문이 솟아나고 있었다.
날 수는 있다지만 그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한쪽 귀퉁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방향을 놓치고 하염없이 한참을 나는 멍청한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저 해가 기울어지기를 기다렸는데, 저놈의 해가 저러다가 그대로 달이라도 되려는가 꿈쩍도 않는다!
‘여기…… 해가 저물기는 하는 거지?’
문득 여러 개의 해가 둥실거렸던 풍경을 살짝 떠올리면서 투란이 물었다.
드라고니아가 조금 흠칫하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낌새와 함께 대답한다.
―저물어, 보통은…….
‘보, 보통은?’
더듬는 시늉까지 하며 투란이 놀랐다.
―신기루 현상이 가끔 일어난다더라고. 눈에 보이는 해가, 사실은 이미 저물어버린 것인데 낮의 잔영이 남았을 뿐인 경우가 있다고 말이야.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아아!’
몇 시간을 걷기 전에 모래왕에게 수작 걸었다고 당당했던 드라고니아를 떠올리면서,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냐고 윽박질러 따지듯이 외쳐보는 투란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몇 시간 지난 탓에 꽤나 상식적인 평소의 태도가 된 듯, 덕분에 조금 움찔하며 켕기는 속내를 애써 덮는 낌새를 흘리면서 드라고니아가 이야기한다.
―10킬로미터 너머를 보여주지 않는 권세의 부수적인 효과라고, 그리 말해지는 현상이다. 하늘 저 너머의 풍경을 사막 위에 비춰주는 현상, 그걸 신기루라고 하는데 그게 상식을 넘어서 해까지 비춰주는 경우라고 말이야. 그래도 계속 지속되는 현상은 아니고, 하루나 이틀? 길어봐야 며칠이면 사라진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야, 이놈아아앗! 너네 여기서 헤매다 죽은 녀석 있지? 그 시체도 못 찾았지? 그렇지? 여기 오면 다 죽는 거지? 애초에 날 때부터 여기 있는 짐승이나 몬스터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 그렇지?’
뒤죽박죽, 으르렁으르렁.
투란이 터뜨리는 울분에 드라고니아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그 울분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드라고니아가 재빠르게 말한다.
―여기는 발 디디면 꼭 죽는 그런 곳이 아니야. 그런 곳에 원주민이 있겠냐? 그저 춤추는 산맥이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곳일 뿐이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대마경 따위랑 비교하면 그냥 좀 성격이 특이한 수준이라고.
가만히 들으니, 여태 나오지 않았던 기묘한 한마디가 섞여 있었다.
‘원주민은 뭐야?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고?’
후욱, 숨까지 고르며 묻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가 ‘어?’ 하는 묘한 반응부터 드러냈다. 그야말로 ‘여태 이야기 하지 않았나?’라는 미묘한 그 낌새!
‘사막 아래, 모래 미궁 말고! 사막 위에 대해서 말해봐! 모래왕이랑 엮인 일에 대해서 싹 잊고, 제대로!’
투란은 바로 으르렁거리며 엄격하게 외쳤다.
소리 없는 외침이었지만 드라고니아를 민망하게 한 모양이었다.
너무 격한 감정에 휩싸여서 모래왕에 대해서, 모래 미궁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다가 정작 이 사막의 환경에 대해서는 그냥 ‘별로 위험한 것 없으니 가자!’라는 이야기로 정리한 듯하니까.
―흐흠,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대사막이 돼버리고 모래 미궁이 되어 가라앉아버린 몇몇 나라가 있었다고 했지? 그 나라의 주민이었지만 나라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물던 이들이 뒤늦게 돌아와서 사막에 자리 잡았었지. 반쯤은 자의였고, 반쯤은 타의였다고 하더군. 드래곤로드의 저주로 인해 격변하던 세상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시절이야. 그들에게는 고향으로의 귀환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나? 아무튼 그런저런 사정으로 이 대사막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는 거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사막 밖이 낯설게 된 이들,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잖아.
‘그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지 않고, 윤곽뿐인 지도가 아니라 자기들에 사는 곳이 새겨진 지도를 가졌을 거라고?’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 사막에서 길잡이를 할 수 있는 이들이지. 신기루라든가 사막의 맹수라든가, 모두 대응하는 방법도 착실히 갖춘 채로 말이다. 하지만 투란, 여기는 인간이든 짐승이든 번성해서 수가 늘기에는 벅찬 곳이야. 원주민을 찾기 전에 사막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고.
‘어느 쪽이든, 최소한 대책도 없이 해 저물기만 기다리는 것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그리고 나는 이십 킬로미터를 둘러볼 수 있는 마법을 부리는 드라고니아랑 이렇게 떠들고 말이지. 잘 좀 찾아보라고.’
목이 칼칼해지면서, 햇살 아래 일렁이는 모래 티끌을 보며 투란은 저물지 않는 해를 한번 더 노려봤다.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