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1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08)
―이런 젠장할.
짧고 굵은 욕설이 투란의 마음을 음울하게 울렸다.
‘왜?’
드라고니아가 저리 욕하는 것이 언제였던가?
투란으로서는 이 상황이 왜 저렇게 욕할 만한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착한 곳의 풍경이 그리 이상한가?
키유나를 내려놓고 날개를 접어 해체한 투란은 다시 주변을 차분히 둘러봤다.
모래의 언덕, 평원 한곳을 점거하듯이 자리 잡은 깊은 구덩이, 사방 폭이 어림잡아도 칠, 팔십 미터는 될 듯하니 구덩이라 부르는 것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분지(盆地)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런 곳의 한복판에 노골적으로 누군가 만들었다고 여길 만한 돌기둥이 파손(破損)된 채로 서 있었다. 돌기둥 주변으로 맴돌고 있는 해자(垓字) 모양의 샘에 부서진 돌기둥의 파편이 군데군데 꽂혀 있지만, 샘물이 고여서 주변을 채우는 것까지 방해하지는 못하는 채였다.
그 샘은 돌기둥 아래에서 솟아나서 구덩이의 경계를 향해 잠시 흐르다가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물웅덩이 주변으로는 자연스럽게 풀이 돋아나 있었고, 몇 그루의 큰 나무가 퍼릇한 잎을 머금은 채로 자라나 있기도 했다.
이런 풍경은 이 사막에서 낙원(樂園)이라고 부르기 딱 좋은 것 아닌가?
환호를 올릴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욕이 나올 광경은 분명히 아니었다.
해서 투란이 두리번거리고 다시 한번 갸웃하는데, 소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저것이 샌드 드래곤의 봉인석. 저게 깨져서 샌드 드래곤이 풀려났어.”
키유나의 말에는 다시금 절망과 고통이, 억지로 억누른 듯한 낌새가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에 투란이 흘깃 보니 역시나 무표정했던 얼굴에 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투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은 그다음이라고 몸짓으로 말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소리 내지 않고 드라고니아와 떠드느라 바쁜 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드라고니아가 욕설 다음에 내놓은 말이 꽤 심각했으니까.
―투란, 저거 카엘의 봉인석이다. 여긴 정말로 사룡을 봉인한 곳이야.
‘돌이 깨져 있는데, 저게 봉인석이 맞다는 거지?’
―그래. 저건 깨지지 않는 석주(石柱), 분명히 그것이다.
‘깨지지 않는다는 돌기둥이 깨져 있다고?’
―그래! 빌어먹을! 젠장할!
‘진정하고, 그래서 정말로 키유나가 말한 대로 진짜 샌드드래곤이, 닮은 놈이 아닌 진짜 드래곤 로드가 용의 화신으로 삼았다는 놈이 사막에 풀려나서 팔랑거리고 날아다니고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아마도.
‘야, 봉인이 깨졌다고 해도 그 사룡인가 뭔가가 갇혔던 일이 대체 언제 적이냐?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어? 봉인이라는 거, 몬스터를 잡지 못해 감금해 놓는다는 거잖아? 정말 그림 투아란의 휘하였던 놈이라고 해도 그게 가능한 거야?’
―고르고니아 세 자매를 품고서 그런 말이 나오냐?
‘어? 아…… 하지만 얘네는 저런 마법의 봉인이라고 하기는 힘들잖아? 저걸 봐, 돌기둥인데 은근히 마력이 줄줄 새어 나오는…….’
―뭐? 마력? 헛? 어째서 봉인이 깨졌는데 봉인석에 마력이 남겨져 있지?
‘왜 또 놀라?’
남겨진 마력에 대해 드라고니아가 놀라는 것은 봉인의 돌기둥이 깨져 있는 광경을 보고 욕설하던 것과 비슷한 정도였기에 투란이 다시 혀를 차듯 물었다. 실제로는 조심스럽게 사막의 기묘한 녹원(綠園)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입을 꾹 다문 표정을 지으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꾸몄지만, 투란의 생각은 매우 바빴다.
정말로 고대에 봉인된 괴물, 그림 투아란의 사룡이란 녀석이 풀려난 것일까?
수없이 들었던 전설, 수없이 달랐던 이야기 속에 가끔 나오는 괴물들과는 아예 그 수준이 다르다는 그림 투아란의 몬스터가 투란이 헤매는 이 사막에 정말로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연이어 놀라느라 당황한 드라고니아의 착각일까?
―봉인석이 깨졌다는 것은 봉인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력의 잔류 같은 일은 일어날 리가 없어! 마력이 희미하게라도 잔류하고 있다면 봉인은 깨지지 않은 거야! 하지만 봉인이 깨지지 않았다면 봉인석이 부서져 있을 리가 없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음, 그러니까 잘 모르겠단 말이지.’
투란은 간단하게 드라고니아의 말을 정리했다.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말에 침묵하고 말았다.
복잡한 상황을 이러쿵저러쿵 다양한 조건을 들먹이며 떠들어 봐도 결론은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고 이렇게 되었노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침묵이었다.
어딘가 민망해하면서도 부글부글 끓는 듯한 그 기분을 이해했다는 듯, 투란이 바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옮겨 간다.
‘모르는 일은 일단 재끼고, 키유나의 길 찾기를 마법으로 꾸밀 수 있겠어?’
―당장은 어렵다. 적당히 프로브를 교정하는 정도로 될 줄 알았는데, 오면서 너를 인도한 방식을 보자면 정말 밑바탕부터 구성을 바꾸고 다시 짜 올려야 해. 아무래도 마녀의 비술이 넓고 깊게 사용된 방식인 모양이야. 너는? 오는 동안 마녀의 마력을 직접 닿은 채로 겪었잖아. 몬스터 로드의 마력으로 흉내 낼 수 있겠어?
‘흐흠.’
투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날아오는 동안 줄기차게 키유나가 투란의 뺨을 두드리다가 결국은 손을 댄 채로 마력의 자극만 주는 식으로 방법을 바꾸기까지 했다. 덕분에 조금 더 세밀하고 노골적으로 마녀가 마력을 흔들고 사용하는가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과연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으로 그 흉내를 어느 정도 낼 수 있는가는 알 수 없었다. 홀로 해 보고 나서 얼마나 미숙한가를 따져 봐야 할 일이었다.
‘나도 당장은 어렵겠어.’
결국 투란도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숙여 샘물에 손을 담그면서, 그 속에 가늘게 헤엄치는 작은 고기 떼를 살피면서 투란은 깨진 돌 조각 하나를 쿡쿡 쑤셔 봤다. 물에 잠긴 채로 살짝 들썩인 돌 조각은 가볍고 여린 마력의 메아리를 일으켰다. 부서진 돌기둥도 이에 호응하듯 미묘한 마력의 요동을 드러냈다.
투란이 느끼기에는 봉인이 풀려서 갇힌 것이 달아나고 남은 마력의 잔재라고 하면 딱 어울릴 듯이 보였다. 마력이 이만큼 남아서는 지나가던 쥐나 토끼 정도라도 꽥꽥거리다가 풀려날 듯하니까. 하지만 이를 더 따지기보다 손으로 샘물을 한 움큼 집어 올려 입가에 대고 혀로 맛을 보고 나서 키유나 쪽을 보고 외칠 뿐이었다.
“물이 맑네. 마실 수 있겠어. 먹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어?”
해맑게, 여기 뭐가 봉인되어 있었네 없었네 따위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말투였고 모래 가득했던 풍경 속에서 파릇한 풀잎과 샘이 있는 곳에 도달해서 마냥 좋다는 듯한 외침이었다. 덤으로 마실 것 다음에 먹을 것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반쯤 칭얼거려 보는 듯한 낌새까지 실리기도 한.
어느덧 나무 한 그루 곁에 다가선 키유나가 바로 손을 뻗어 나무를 두드리면서 투란에게 대꾸한다.
“이 나무 열매, 껍질을 벗기면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여기 이거는…….”
금방 허리를 숙이며 길쭉한 풀 한 포기를 움켜쥐고 뽑아낸 키유나의 말이 이어진다.
“이 뿌리는 흙을 털고 먹으면 돼. 물에 씻어서 껍질째로 먹어도 되고, 껍질이 잘 벗겨지니 그냥 벗겨 먹어도 괜찮고.”
말과 함께 투란을 향해 뽑아낸 한 포기 풀이 뿌리째로, 흙이 엉긴 뿌리째로 던져졌다. 가볍게 이를 받아 든 투란이 냉큼 샘물에 뿌리를 담가 흙을 털고 씻어 낸 다음에 금방 입가로 가져가서 와그작거리며 씹어 먹었다.
“와아, 이거 단맛인데? 처음 먹어 보는 거야.”
감탄하는 투란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고요한 녹원 풀잎 사이로 퍼져 나갔다.
―지금 뭐 먹을 때냐?
드라고니아가 갑자기 분위기 바꿔 보려는 투란의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으적으적.
투란은 이름 모를 풀포기의 뿌리를 마저 씹으면서 천천히 키유나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주변에 걱정거리가 없으니 일단 마시고 먹고 쉬면서 천천히 여유를 즐기기보다는 말을 몸짓으로 대신하는 셈이었다.
키유나는 그런 투란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곁의 나무에 손을 대며 위를 올려다봤다. 나무가 키유나에게 호응하듯이 살랑거렸고 열매가 투툭거리며 두엇 바로 떨어졌다. 그 하나를 떨어지는 순간에 받아 들며 키유나가 조용히 쓰다듬었다.
투란이 보기에는 열매껍질이 꽤 거칠고 울퉁불퉁하면서 살짝 가시라도 돋은 듯한 모양이라 저러면 손이 긁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키유나의 손짓에 따라 껍질이 굵직하게 뚝뚝 떨어져 나가면서 연한 녹색의 속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었다.
―저러는 거 보면 완전히 제정신인데…….
돌연 드라고니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왜? 무슨 마법인데?’
투란은 키유나의 손이 마력을 머금었다는 것까지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력으로 구체적으로 뭘 했는가는 알 수 없었고, 그 광경은 그저 열매를 쓰다듬었던 것뿐이었다.
―마법이 구성되기 전 단계, 순수한 마력을 근력과 절삭력으로 변환시켜 쓴 거야. 아무 생각 없이 할 짓은 아니다만…… 정말 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인 것처럼 여겨지긴 했다.
‘너도 못 하는 짓이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만? 뭘 하든 너를 거쳐야 하지.
‘윌 라이트 마력으로 말이야, 못 해?’
―할 수는 있다만, 할 필요가 없지. 엄청 주의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니까.
왠지 심하게 툴툴거리면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드라고니아였다. 투란도 지금은 눈앞의 마녀, 소녀인 키유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딴생각하는 꼴을 들통나기는 곤란했기에 가만히 다가가면서 ‘이게 무슨 맛이지?’라고 혼잣말하면서 껍질이 사라진 열매를 바라봤다.
“먹어.”
키유나가 조용히 두 손 모아 열매를 내밀며 말했다.
“어? 어…….”
살짝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이다가 투란은 열매를 받았다.
뿌리를 던져 줬으니 이건 키유나가 먹을 줄 알았는데, 마저 건네주다니 투란이 느끼기에 꽤 상냥하잖나.
―뭘 감탄하냐? 시알라 남매도 열매 딸 일 있으면 곧바로 하나씩 건네줬잖아?
‘그건 껍질째였잖아. 독인가 아닌가 확인도 안 된 경우였고…… 아, 그러고 보니 멜란드는 급하게 껍질째로 먹고 나서 바로 토했던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열매를 핥고 깨물면서 투란은 문득 섬세한 부분에 있어서 이 마녀, 소녀의 모습인 키유나가 시알라 남매들보다는 더 상냥하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이런 판단이 마땅치 않았는지, 드라고니아가 바로 툴툴거린다.
―하지만 이 마녀는 자기 입으로 맛보지 않은 것을 줬지. 거기 독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없잖아! 왜 못된 소리를 하냐.’
아삭, 아삭.
달콤한 열매였고, 조금 깨물자마자 안이 텅 비고 즙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듯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꿀꺽거리면서 그 즙을 마시고 나서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투란이 묻는다.
“이게 무슨 열매야? 이 나무 처음 보는데, 뭐라는 나무지? 아, 아까 뿌리도 맛있었는데…….”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키유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툼바, 툼바 열매. 포텔, 포텔 뿌리.”
“툼바, 포텔…… 흐흠, 역시 들어 본 적 없네.”
아삭, 아삭. 꿀꺽, 꿀꺽.
나무와 풀 이름을 되뇌다가 투란은 남은 것을 마저 먹어치웠다.
키유나는 여전히 고요한 눈길로 그런 투란을 바라봤다.
그 눈길이 조금 기묘해서 투란은 등골 한구석이 살짝 서늘하다 느꼈다.
―너 말고 딴생각하는 중인 모양인데? 너 처먹는 꼴 보고 다른 누군가가 생각난 것 같은걸?
‘어? 그럼 다행인데!’
마녀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떠올리려던 투란이 숨을 돌이키며 후욱 내쉬면서 방긋 웃었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기분이 좋다는 시늉인 셈이었다.
키유나가 그런 투란의 표정에 살짝 입가를 꿈틀거리면서, 정말 아련히 먼 다른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한다.
“역시…… 투란은 툼바랑 포텔을 잘 먹는구나. 카엘도 그랬는데…….”
“응? 어, 난 처음……?”
움찔하고 흠칫해서 투란이 말을 더듬었다.
키유나는 고개를 돌렸고, 조용히 나무를 보며 중얼거림을 이어 갈 뿐이었다.
“투란 아저씨, 꼬맹이 투란, 카엘…… 카엘 아줌마, 귀여운 아란…… 모두 여길 좋아했는데…… 용의 축복이 아직 남은 곳이라고 좋아했는데…….”
‘음, 나 아니구나.’
같은 이름으로 아저씨, 꼬맹이, 아줌마가 연이은 것을 들으면서 투란은 살짝 안도했다. 이 사막 어딘가에 사는 다른 사람 이야기인 모양이니까. 이런 곳에도 여전히 투란과 카엘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는 것은 속이 좀 쓰린 이야기지만, 어쨌든 키유나가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진 셈.
―어째…… 전부 죽은 것 같다만?
‘야아아, 이상한 말 하지 마앗!’
투란이 위를 올려다보면서 드라고니아에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모두 죽어 버렸어. 나 때문에…….”
드라고니아의 말은 듣지도 못한 키유나가 멍하니 이리 말하고 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