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2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20)
회오리치며 기둥처럼 우뚝 선 모래가 토해 내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래 속에서 다시 물줄기가 터져 나오며 기둥의 형체가 무너져 내렸고 녹원은 안개를 가라앉히며 햇살이 가득한 정원의 진정한 풍경을 드러냈다.
키유나는 그 반짝이는 물방울을 몸에 뒤집어쓴 채로 멍하니 앉아 모래 기둥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잠시 넋이 나간 듯, 말을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투란은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시늉을 했지만, 머릿속은 아주 바빴다.
드라고니아 또한 그런 투란처럼 분주하게 떠들면서 모래왕이 마녀에게 남긴 말을 분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망할 놈의 모래왕이 지금 우리 모두를…… 심지어 저 마녀까지 장난감처럼 이용하려고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냐?
냉정하지 못한 말투였지만, 투란은 이 말이 꽤 그럴듯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래왕의 이야기는 결국 요약하면 투란과 키유나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 힘쓰라는 결말이었으니까.
전의 만남과 비교해 보자면 나름대로 일관성 있기는 했다. 다만.
‘그렇기는 한데…… 꽤 필사적인 것 같지 않아?’
투란은 그 일관된 목표가 어딘가 기묘하다고 느끼면서도 한 가닥 납득할 구석이 있다고 여겨졌다.
―뭐? 필사적? 해방되지 않아도 죽는 일도 없고, 해방되는 것이 죽는 일도 아닌 놈인데 뭐가 필사적이야! 투란, 너 설마…… 모래왕이랑 계약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설마 키린이 불꽃왕이랑 어울리니까 너도 저 막 나가는 모래왕이랑 어울려 보자고? 정신 차려! 수백 년, 아니 거의 천 년 이상을 지상에 묶여 있는 정령이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완전히 해방되고 몇백 년쯤 뒤에 불러야 겨우 정령다운 모습을 회복할 거라고!
‘어? 정령다운 모습? 뭔 소리야? 지금 모래왕은 정령답지 않은 거야?’
―노골적으로 수작 부리는 꼴 보면 모르겠냐! 이건 거의 사룡이나 마찬가지인 마물이라고 봐도 된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겠군! 사룡 녀석은 본능과 어스름한 지능이 고작이지만, 이건 본능보다 지능이 먼저인 채로 사룡 이상의 영향력을 품은 경우니까…… 어린 애처럼 어설프게 반길 일이 아냐!
‘뭐, 딱히 반기는 거는 아니잖아.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녀석의 말은 키유나에게 힘을 회복해서 휘광의 성궤를 어떻게 하려 할 때 도우란 것뿐이니까. 그때까지 키유나에게 나랑 함께 다니란 말뿐이잖아?’
―저 마녀도 미친 상태잖아, 그런 마녀한테 널 감시하라 시킨 거라고!
‘어? 그렇게 되는 거냐?’
투란은 갸웃했다가 바로 피식 웃고 말았다.
키유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모래왕…… 이 나쁜…… 그렇게 오랫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으면서 이 땅의 생명을 돌보지 않다니…… 나쁜 정령…….”
이 나직한 속삭임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키유나는 모래왕의 무엇을 제안하며 시켰는가보다는 이제까지 사막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더 화내는 듯하니까.
드라고니아도 한 박자 늦게 그런 키유나의 태도를 알아본 듯, 혀를 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바로 모래 미궁으로 들어가서 욕이라도 퍼부을 분위기로구만.
‘그럴 수……도 있으려나?’
설마 그러기까지야 하겠나 싶었지만, 투란은 죽으려고 사룡을 향해 돌격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몇 년을 사막에서 헐벗은 채로 헤매고 있던 마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럴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투란의 마음속에 살짝 고민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무엇보다 투란의 배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소리가 알려 줬다.
꼬르륵.
“음, 뭐 좀 먹고 쉬어야겠어.”
가벼운 헛기침을 흘리며 투란이 살짝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저앉아 중얼거림을, 모래왕에 대한 욕설 혹은 원망 비슷한 말을 늘어놓던 키유나가 멍한 눈길로 투란을 바라봤다. 그 눈길을 물음이라고 여긴 것처럼 투란이 바로 말을 보탠다.
“샌드드래곤이랑 싸워서 많이 힘들어서 말이야.”
“아…… 그래, 사룡좌를 물리쳤지…… 그래, 투란이 그랬어.”
소녀의 입술 사이로 나온 몇 마디는 투란을 잠시 고민하게 했다.
키유나, 이 마녀는 정말로 제정신을 잃어버린 것인가?
마냥 저런 상태라면 모래왕의 기대는 지금 깔고 앉은 물결 속의 물거품처럼 흐트러질 뿐이고 투란도 얼마나 더 길 찾기를 배워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
차라리 키유나가 당분간이라도 제정신이라서 투란을 사막 밖으로 안내해 주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몰랐다. 혹은 드라고니아가 빛의 정령이 맴도는지 어떤지 애매한 바람의 미로인가 미궁인가를 간파할 수 있는 프로브를 꺼내 놓든가.
어쨌든 투란은 일단 물가 한구석에 마른자리를 찾아 골랐다.
담장이 치솟아 만든 미묘한 비탈, 물결이 흐르며 열어 놓은 작은 흐름 사이에 무너진 나무와 넝쿨이 쌓이면서 생긴 자리였고 열매와 뿌리가 뒤집힌 채로 고스란히 노출된 곳이었다.
이를 적당히 정리하니 서너 사람 앉을 자리가 금방 꾸며졌다.
열매와 뿌리를 모아 쌓아 둔 다음, 투란은 키유나에게 가볍게 손짓하며 먼저 먹기 시작했다. 멍하니 투란을 보던 키유나는 그저 얕은 물에 앉아 있는 듯하다가 유령처럼 느릿한 몸짓으로 겨우 일어섰다.
투란은 키유나가 다가와 앉은 것을 보면서 말없이 계속 먹어치웠다.
어느 정도 먹고 한 사람 몫은 적당히 남겨졌다 싶을 때, 투란이 말한다.
“키유나, 먹어야지?”
“그래.”
잠깐 멍하니 무슨 말을 들었나 하는 눈빛이었던, 그럼에도 어느새 무심한 표정이 되었던 키유나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열매 하나를 들고, 뿌리 하나를 들더니 한쪽씩 살짝살짝 갉아 먹듯이 입을 대고 있었다.
투란이 보기에는 먹는 중인가, 그냥 입맞춤하는 중인가 굉장히 애매한 모습.
모래왕을 향해 중얼거리던 조금 전의 모습이 오히려 제정신이고 지금은 완전히 넋이 나간 꼴 아닌가!
“키유나?”
왜 그러냐고 투란이 가만히 의문을 담아 불러 봤다.
키유나가 열매와 뿌리를 쥔 두 손을 툭 떨구고서 멍하니 새어 나오는 숨결처럼 되물어 오고 있었다.
“뭘 해야 하지?”
“응?”
이번에는 투란이 맹한 대꾸를 하고 말았다.
키유나의 입에서 힘없는 말이 흘러나온다.
“모두 죽었어. 나만 살았어. 죽어서 모두 모래 망령이 돼 버렸을 거야.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나는 죽어서 모래 망령이 될 수 있을까? 모래왕은…… 정말 모래 망령을 해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모래 미궁의 성궤는 전설이야. 사룡좌를 봉인했던 돌기둥처럼 증거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의 전설이야. 천년을 훌쩍 넘는 옛날…… 그림 투아란이…… 이 땅이 사막이 되기 전의 풍요로운 대지였을 때 선물했다는 보물이니까. 세상에서 그림 투아란의 보물이 파괴되고 사라져서 이제는 남은 것이 없잖아. 모래 미궁에서는 어떤 아티팩트라도, 어떤 마법이라도 금방 쇠퇴하고 쇠락해서 지워진다고 했어. 그게 정말 아직 멀쩡할까? 성궤가 정말로 모래왕을 구속하고 있는 걸까? 타락해서 사룡좌에게 협력해서 이 사막을 꾸미고 유지한다는 모래왕인데?”
“잠깐! 키유나, 누가 타락해서 뭐에 협력을 해?”
투란이 멍청한 표정으로 옛날이야기구나 하고 듣다가 바로 끼어들면서 외쳤다.
드라고니아도 그 순간에 투란의 뇌리를 울리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사막이 둘 중 하나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 둘이 함께 저지른 짓이었다고! 그거 말이 되잖아! 미친 마녀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좀 닥쳐 봐!’
투란은 골이 울린다는 표정으로, 키유나가 보기에는 키유나가 한 이야기가 너무 엄청나서 어처구니없어하는 모습으로 눈을 번뜩였다. 드라고니아를 타박하는 중이었지만, 키유나에게는 방금 한 말을 다시 확인하고 싶다는 확실한 태도인 셈.
키유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투란을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눈가를 찌푸리다가 다시 입을 열고 이야기를 잇는다.
“이 땅에 저주가 내리게 한 배신, 그 배신을 돌이킬 날이 올 때까지 그림 투아란의 이름을 기억하라. 사막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첫 이름이 투란 혹은 아란이 되는 까닭은 그런 전설을 이어 왔기 때문이야. 그리고…… 사룡의 폭거를 막아선 마법사 카엘, 그가 봉인의 석주를 세우고 모래왕을 잠재웠어. 그 은혜를 잊는다면 그 또한 배덕의 죄를 짓는 것, 두 번 다시 그 죄업을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맹세한 사막의 주민은 은혜를 베푼 마법사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둘째, 셋째의 이름으로 카엘을 전하기로 했어. 모래왕은 그렇게 잠들어서 다시 깨어나지 않을 자……였는데, 오늘 내 앞에 나타났어. 이거 꿈 아니지?”
돌연 던져진 물음과 함께 키유나의 멍했던 눈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꿈이라고 하면 바로 드러누워서 깰 때까지 잠이라도 잘 듯한 낌새!
“아냐.”
한숨처럼 투란은 대꾸하고 말았다.
“그래…… 진실이야. 모래왕의 말은 진실인가 아닌가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투란의 말은 진실…… 아니, 투란이 나랑 똑같은 말을 들었다는 거겠지? 그 말이 거짓인가 진실인가 모를…….”
키유나가 다시 두서없는 생각에 빠진 채로 떠들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가 투란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모래왕이랑 사룡이 옛날 옛적에 무슨 짓을 했냐고 따져 봐야 별 의미도 없으니까.
그보다는 투란에게 중요한 것은 사룡을 패잡았든 말든 바람의 미로, 사막의 괴팍한 풍경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었다.
‘야, 프로브로 이제 어느 정도 길 찾기 안 돼?’
―된다만, 어느 정도 실험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은 실험 못 해. 사룡이 남긴 여파가 아직 사막을 흔들고 있으니까. 마력이든 뭐든 그 여파가 좀 가라앉은 다음에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어.
‘흐흠, 사룡의 감각이면 꿰뚫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문득 투란은 문장의 풍경 속에서 매우 느긋하게 날갯짓하며 저 아래 심연 위를 비행하는 채로 자유를 누리는 시늉을 하는 중인 사룡을 떠올리며 물었다.
―글쎄? 마녀의 말대로라면야…….
드라고니아도 갸웃하며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에 대해 투란이 미묘하게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뭔가 해 보려 할 때, 키유나가 갑자기 응어리지고 단단한 한마디를 세게 토해 내서 투란을 멈추게 했다.
“모래왕.”
“응? 모래…… 에엑! 왜 또?”
투란이 꿍얼꿍얼 꽥꽥댔지만, 이미 형태를 갖춘 모래 인형은 바닥을 뚫고 기어 나와 서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갖췄지만 크기는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작았지만, 명백하게 모래왕의 힘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다.
―뭐야, 왜 또 나와?
어이없다는 듯한 말은 드라고니아도 하고 있었다.
할 말 다하고 푹 꺼지듯이 흩어져 사라지더니,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다시 튀어나오나…… 왕이란 호칭의 위엄이라든가, 모래 미궁과 모래 망령이 얽힌 깊은 사연을 생각하면 반나절도 안 된 사이에 저리 다시 튀어나오는 것은 너무 가벼운 짓이 아닐 수가 없었다.
모래왕은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모래 단추같은 눈을 투란에게 겨냥한 채로 말문을 열었다.
“모래왕이 묻는다, 눈보라 치는 산에서 죽지 못한 자들의 성채를 거쳐 왔는가?”
“응? 죽지…… 성채? 어, 비슷한 것을 스쳐 오긴 한 것 같은데?”
투란이 멈칫하다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유렐리아랑 엉켜서 좀 부딪히기는 했으니까.
“그 성채가 모래왕의 영역으로 기울어졌다. 가까이 있는 모래 미궁이 성채의 힘에 유혹당해 끌려가고 있다. 미궁이 성채에 닿으면 망령이 성채의 영역에 휩쓸린다. 그렇게 되면, 모래 망령은 영원히 해금(解禁)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모래왕의 축복이 왜곡된 저주가 사라진다 해도, 성채의 소유물이 되고 만다.”
“네?”
투란은 눈을 껌벅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전혀 알아듣질 못하겠으니까!
한데 키유나는 마녀답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무슨 성채인데? 어째서…… 아니, 어떻게? 모래 망령은 정말 해방될 수 있는 거였어? 모래왕, 정말로…… 사막의 저주에 감금된 망령들이 해방될 수 있는 거야? 성채에 끌려갈 수가 있는 거야?”
마구 나오는 키유나의 이야기는 역시 투란이 따라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때문에 그냥 한 귀로 듣고 적당히 기억하며 흘려버린다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헐? 그 성채가 모래 미궁의 저주까지 무시할 수 있다고? 언데드를 가두고 조작하는 수준이 아니잖아! 정말 전설에 나오는 마법의 성이라고 해야겠네.
드라고니아는 상황에서 빗나간 감탄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투란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모래왕은 정말로 모래 망령을, 미궁을 헤매는 망자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중이고 그게 어떤 까닭으로 뒤틀린 채이며…… 해방을 원한다는 것.
그리고 왠지 그 일에 투란이 지나온 행적이 엄청난 훼방을 놓는다는 것!
‘내 잘못이냐!’
먹어 버린 열매와 뿌리가 배 속을 걷어차는 느낌이 투란을 언짢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