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25
몬스터×몬스터: 외전 편 (6)
Chapter 2. 대마도사의 어느 날
—일어나!
—잠에서 깨어날 때요.
—잠꾸러기 노릇 그만하라고!
—약속한 대로 기변(奇變)이 일었기에 깨우는 것이오.
뇌리를 지끈지끈 울리는 소리는 결국 억지로 눈을 감고 버텨 봐야 잠이 벌써 달아난 것만 확실히 깨닫게 해 줄 뿐이었다. 그래서 그만 일어났다.
휑한 토굴 깊은 곳이란 증거처럼 흙벽이 천장까지 굽어진 채였고, 벽에 아무렇게나 꽂힌 서너 개의 횃불이 침상을 둘러싸고 이글거리는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림자가 제멋대로 일렁이며 누운 자리가 그저 커다란 쿠션 한 덩어리란 것을 과장하며 강조하는 것처럼 구김살을 드러내 줬다.
“……아직 몇십 년은 더 자도 되는구만.”
쭉 뻗은 두 다리 사이로 침상 앞에 놓여 있는 종탑 모양의 물체를 노려보면서 그는 깊은 숨결과 함께 불만을 토해냈다.
—저 오렌지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기변이라고! 아, 이변이라고 해야 알아듣기 쉽나?
—사육자가…… 죽어 가고 있소. 천안(千眼)의 왕(王)이 자리에서 사라졌고 말이오.
연이어 뇌리를 징징 울리는 소리에 그는 손을 내저으면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너네…… 말투가 왜 또 바뀐 거야? 무슨 변덕이냐?”
—변덕은 무슨!
—카엘, 대마도사로서 깨어나야 할 때요.
으르렁거림과 점잖은 대답이 함께 뇌리를 찔렀다.
“알았다, 알았어. 잠깐…….”
내젓던 손의 방향을 바꾼 카엘은 다시 손짓했다.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흙벽을 파내 꾸민 벽감 속에서 투명한 물병이 튀어나와 카엘의 손으로 날아왔다.
턱, 가볍게 물병을 잡고 카엘은 바로 입에 댔다.
꿀꺽꿀꺽…… 투명한 물병이 기울어지고 잔잔한 거품이 자잘하게 피어나면서 카엘의 입안으로 맑은 물줄기가 흘러들었다.
—허! 내다 팔면 한 모금에 금전 열 닢인데…….
—비정상적인 각성이었으니 엘리트 넥타르가 필요할 때이기는 하오.
하아아, 물병을 내리고 긴 숨을 내쉬면서 카엘은 인상을 구긴 채로 계속 뇌리에 말을 걸어오는 녀석들을 노려봤다.
하나는 시뻘겋고, 하나는 거기에 노란색을 섞어 조금 희석시킨 듯한 주황색이다.
카엘은 다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둘을 살피듯 뜯어보았다.
둘이라고 했지만 지팡이 하나를 함께 휘감아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는 뱀, 객관적으로 보면 쌍두사(雙頭蛇)라고 여기는 편이 이치에 닿는 몰골이었다.
—새삼 뭘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케헤헷!
—잠이 덜 깬 것이라면, 넥타르를 더 들이켜시오.
“시뻘겋고 길쭉한 그 몸 어느 구석이 아름다운데? 잠은 다 깼어. 더 자야 할 때니까 일어나기가 싫은 것뿐이지.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고? 야, 넌 조용히 하고 네가 말해봐.”
시뻘겋다는 말에 발끈하려던 적색의 뱀 머리는 쉿쉿거리면서 불만스러운 듯 혀를 날름거렸지만, 주황색의 뱀 머리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육자를 무엇인가가 죽이고 있소. 원래 사육자를 견제하던 천안의 왕은 종적을 알 수가 없고……. 때문에 춤추는 산맥, 브로큰 킹덤 쪽의 몬스터 영역이 완전히 혼란 상태로 접어들고 있소. 게다가…….
“잠깐! 천안의 왕이면…… 아헬리스가 목숨을 바쳐 소환해서 이 세계에 묶어 둔, 내가 아르고스의 이적(異蹟)이라고 했던 그 괴물? 그 녀석 말하는 거야?”
카엘은 눈을 살짝 감고 기억을 더듬다가 낯을 구기면서 묻고 있었다.
적색의 뱀 머리가 슬쩍 다른 곳을 보는 시늉을 했고, 주황색의 뱀 머리는 가만히 치켜진 눈길로 도도하게 나쁜 소식이지만 진실이기에 분명히 전한다는 분위기로 대답한다.
—그렇소. 그대가 대마녀 아헬리스의 소망에 부응해서, 전변(轉變)의 의식까지 치러 소환, 현신시켰던 대요마(大妖魔)…… 신화 속의 마물, 이 세상에서는 명실상부한 몬스터일 수밖에 없는 그 이적의 괴물을 말하는 것이오.
카엘이 구겨진 낯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더욱 구겨졌다.
그 낌새를 느낀 적색 뱀 머리가 슬쩍 눈길을 제자리로 돌리며 주황색 뱀 머리를 향해 쉭쉭거리는 울림을 담아 핀잔했다.
—뭔 말을 그렇게 거창하고 장황하게 하냐? 간단히 그놈 맞다, 하면 될걸!
주황색 뱀 머리는 보다 깔끔하고 냉정하게 그에 대꾸한다.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마도사 카엘을 위해 기억을 되살려 준 것뿐이다. 카엘, 무엇보다 온전히 정신부터 차려야 하오. 전할 소식은 이게 끝이 아니고, 사육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남았으니 말이오.
“……알았어, 정신부터 차리고 보자.”
빠득, 이를 가는 소리를 낸 카엘은 몸을 그대로 떨구듯이 다시 침상에 누웠다.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에 물거품이 쿠션 한 덩이의 침상 안에서 피어올랐고, 금방 카엘의 몸을 삼켰다.
깨어날 때부터 걸친 것이라고는 고작 반바지 한 벌에 불과했던 카엘이 커다랗게 부푼 물방울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이제야 자신이 잠들기 전에 잠깐 했던 고민이 떠오르고 있었다.
홀랑 벗고 잘까, 그래도 누가 들어와 보면 추하니 한 꺼풀 아랫도리는 덮고 잘까?
굉장히…… 한심한 고민이었다.
누가 못 들어오도록 미리 여러 가지 처방을 해 놓고 한 고민이었으니까.
대마도사, 대마법사란 위명(威名)에 걸맞은 교묘하고 가혹한 마법의 처방을 뚫고 카엘의 잠든 모습을 엿보겠다 들어올 자라면 벌거숭이를 보든 속옷 한 장을 두른 꼴을 보든 아무 관심도 없었을 테니, 그 고민의 한심함이 한층 더 깊이 카엘을 한숨짓게 했다.
하지만 고민의 끝에 불쑥 치솟은 기억의 한 자락, 바로 연상되어 떠오른 누군가의 목소리는 카엘이 애초에 왜 그런 고민을 했는가를 되새기게 해 줬다.
“홀랑 벗고 자? 변태잖아! 우와아, 카엘 아저씨 진짜 변태인가 확인하려면 잘 때 구경해야겠네!”
쾌활하고 명랑한 금발의 소녀가 주점의 주정뱅이 취객, 낡은 아저씨 같은 눈길과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레오니아…… 그래, 너희 때문이었지.’
“남자 자는 꼴을 구경하겠다니, 변태는 너잖아!”
그렇게 핀잔하며 열심히 레오니아를 변태로 몰아가던 녀석, 검은색인가 짙은 갈색인가…… 늘 오락가락하는 머리 색깔과 외모였지만 한번 만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휘둘러 대던 쥴. 지금도 마르테인이란 이름을 감추고 살까 궁금했다.
“애송이냐? 대마도사가 잠드는 공백의 시간이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되지도 않는 투정은 부리지 마라. 소름 돋아서 보는 내가 힘들잖아!”
피식, 카엘의 입에서 새 나온 숨결이 새로운 거품 방울을 내며 흩어졌다.
레오니아와 쥴을 동시에 타박하면서 우람한 체격을 과시한 채로 대마도사 카엘을 향해 ‘꼭 드러누워야 하나?’라며 투덜거렸던 카엘, 카엘 룬 벨카인.
소꿉친구처럼 정겹게 떠오르는 셋의 모습은 금방 대마도사 카엘의 뇌리 한구석을 날카롭게 찔렀고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이 연놈들이 일 저질렀나?’
뱀 머리 둘이 동시에 치켜 올라오다가 살래살래 저어졌다.
—아냐.
—살아온 세월이 있잖소, 감정적으로 사고 칠 나이는 몇백 년 전에 지났지.
푸우훗.
침상에서 거대한 물방울로 변한 쿠션 한쪽이 카엘의 숨결을 따라 부서져 내렸다.
카엘은 물방울에서 머리만 내민 꼴로 고개를 갸웃하며 두 마리 뱀이 감긴 채로 바닥에 꽂힌 지팡이 쪽을 보며 물었다.
“아니라고? 아헬리스가 남긴 아르고스의 이적을 어떻게 하고 티탄 클래스 중에서도 그 더러운 성질만큼 죽일 방법이 없는 사육자를 야금야금 조여 죽일 수 있는 녀석이 하이로드 셋 말고 또 있을 거라고?”
—쯔읏! 그게 언제 적 이야기야! 자다가 시대가 변한 줄도 모르다니!
적색 뱀 머리가 혀를 차며 으스대는 말을 했다.
잠꾸러기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고 물색없는 소리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웃는 말이었다.
—지금은 하이로드가 아니더라도 강대한 영향력을 지닌 자들이 꽤 등장한 상태요. 애써 잡아 놓은 균형이 언제 깨질까 애매하다 여긴 것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났으니…… 거의 백여 년에 가깝다고 해야 맞겠지.
주황색 뱀 머리가 차분하게 부추기듯 말했다.
아직 현재의 정보를 완전히 모르는 상태로 너무 앞서가는 추측은 하지 말라고 충고한 셈이었다.
카엘은 한 녀석이 비웃고 놀리려 하는 상황에서 다른 한 녀석은 그저 점잖게일 뿐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정된 잠은 아직 한참 더 남았지만,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는 것.
예정된 시기에 잠에서 깨어났다가는 때를 놓치면 안 될 일들을 전부 놓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
“……너희, 능력은 완전히 회복했나?”
불쑥 묻는 말과 함께 카엘은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걸어 나왔다.
물방울이 안개로 변하면서 그의 몸을 휘감았다.
적당한 바지, 적당한 셔츠, 적당한 장화, 적당히 몸을 휘감는 로브까지 해서 차림새를 갖춘 카엘이 두 마리 뱀이 쌍두사처럼 엉킨 지팡이를 잡아 올릴 때까지 대답은 없었다.
“못했냐?”
한숨처럼 카엘이 중얼거렸다.
—야, 그게 우리 탓이냐!
—드래곤이 이렇게 깊이 한 세계에 간섭하는 경우는 원래 없으니 말이오.
시뻘건 뱀 머리가 쉭쉭거리며 화를 냈고, 휘휘 고갯짓하며 오렌지 빛깔 비늘을 반짝이는 뱀 머리는 차분하게 사실을 짚었다.
카엘은 잠시 흙벽과 천장을 노려보는 자세로 서 있었다.
뚝뚝 떨어질 듯한 흙벽이 그 눈길을 받아 꾸물거리듯이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에 널린 횃불의 빛을 이용해 더욱 정교한 굴곡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포네트(Info-Net)는 정상 가동 중이네. 낯설게 변한 시대라도 아직 쓸 만한 거지? 너네는…… 여전히 반경 오 미터 이내를 파악하는 데 하루 걸리나?”
—……놀리는 거지? 지금 약 올리는 거지? 시아아앗!
—그다지 차이가 없기는 하지만, 탐지 범위는 일 미터 확장되었고 분석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줄었소.
“……뭐?”
카엘이 놀란 소리를 내며 손에 든 지팡이를 들고 두 마리 뱀을 눈가로 올려 바라봤다.
적색 뱀 머리가 쉬잇거리는 소리를 흘렸고, 이는 이제까지와 다른 말을 전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사육자 쪽 일은 난데없기는 했지만 깨울 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 변화를 기점으로 이것저것 묘한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났지. 그리고 나랑 저 오렌지가 예정된 시각을 포기하고 널 깨우기로 결정한 것은…… 더스크라이더가 봉인째로 자취를 감춰 버렸기 때문이야.”
곧바로 주황색 뱀 머리, 오렌지라 불린 쪽에서 잇는 말이 나온다.
사념파(思念波)에 의한 대화를 그만해도 될 정도로 카엘의 감각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는 듯,
“사룡은 예상보다 빠르게 마력의 아바타를 만들어 냈소. 그건 이 시대의 수많은 격변, 이변의 영향 탓이니 상정 범위 내로 볼 수 있지. 하지만 그 아바타가 활동하고 몇 년 되지도 않아서 봉인이 해제되니 어쩌니 하지도 않고 봉인째로 실종된 것은 우리가 예상한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잖소. 카엘 디아크, 그대가 깨어날 만한 일이 아니오?”
귀를 울리는 차분한 소리는 카엘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며 몸의 신경계가 뇌수(腦髓)를 자극하는 감각을 되살려 주었다.
카엘은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배꼽 높이의 지팡이, 여차하면 몽둥이처럼 검처럼 휘두를 수 있는 지팡이 끝에 찍힌 바닥은 곧바로 단단한 암석으로 변화했고, 흙벽의 형질이 유리처럼 변해 갔다.
높은 창공(蒼空)이 유리 벽 너머로 비쳤다.
드넓은 대지가 카엘이 딛고 선 암벽 아래로 드리워졌다.
멀리 가죽 날개를 펼치고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형상이 보였다.
맹수의 몸과 깃털 날개를 빠르게 움직이는 형상도 있었다.
드라코눔의 변경, 그 너머로 검은 산맥이 지평선 한끝에 살짝 걸린 듯이 카엘의 눈가에 잡혔다.
‘아, 여기서 자고 있었지.’
쓴웃음이 카엘의 입가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