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26
몬스터×몬스터: 외전 편 (7)
털썩.
사방을 내리깔고 볼 수 있는 정상의 암벽에 카엘은 주저앉았다.
곧바로 적색의 뱀 머리가 투덜거리는 말을 쏘아 냈다.
“뭐야, 더 자려고?”
주황색의 뱀 머리가 시잇, 하는 울림과 함께 물음을 더한다.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것이오?”
카엘은 잠깐 두 뱀 머리를 돌아보다가 지팡이를 짚으면서 은근히 팔에 힘을 주고 기댄 자세로 대답한다.
“잠이 모자라……. 깨어나긴 했는데 너희 이야기 따라가기 힘들다고. 지금도 너희가 하는 말이 바로 들리지 않고 떠들고 나서 조금 있다가 귀에 닿는 느낌이라니까.”
시잇시이잇, 적색 뱀 머리가 거친 숨결을 토하며 매우 불만스럽다는 기분을 드러냈다. 그사이에 주황색 뱀 머리는 냉철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명상을 해서 의식을 정상화할 필요가 있겠군. 카엘, 여기가 어딘지는 기억하는 거요? 깨어나면 이곳에 대한 기억을 열쇠 삼아 축적된 정보를 해석하도록 기억을 되살리기로 했다는 것, 기억나시오?”
“……그래, 이제 기억나. 여기는 춤추는 산맥으로 가는 길. 드라코눔의 방대한 경계 지역이잖아. 요정의 일족, 마수의 일족, 용의 혈족이 각기 삶의 터전을 꾸민 곳. 기억난다고. 그러니까 둘 다 잠깐 조용히 좀 하고 있어.”
카엘은 지팡이를 놓고 두 손을 맞잡으며 가만히 자신을 둘러싼 듯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손에서 놓여났지만 꼿꼿하게 꽂힌 것처럼 서 있는 지팡이를 감은 두 마리 뱀은 쉬이잇, 하는 길고 여린 숨결과 함께 그런 카엘을 지켜보듯이 침묵을 둘렀다.
‘어디 보자…….’
카엘의 눈길은 먼저 멀리 날고 있는 용의 혈족, 짐승에 가까운 지능을 지녔지만 그 형태는 한없이 드래곤을 닮은 녀석부터 훑었다. 불을 뿜고 비늘이 번들거리며 네발과 꼬리, 웅장한 날개가 인상적이기는 해도 그 정도 체격으로는 드레이크라고 하기는곤란했다.
‘마이너?’
갸웃하면서 카엘은 세워진 지팡이에 손가락 끝을 살짝 얹었다.
곧바로 ‘드라크본’이라는 품종명이 떠올랐다.
몇십 년마다 새로 등장하는 혹은 변덕쟁이처럼 갈아엎어지는 용의 혈족으로 이번 세기에 대세가 된 마수.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생김새와 크기로 인해 마이너 드레이크 혹은 리틀 드레이크라고 불렸지만, 그 뼈대와 가죽이 제대로 된 드레이크에 가까웠기에 드라코눔에서 공식적인 명명 절차를 걸쳐 품종명을 정했다고 했다.
카엘이 눈길 닿은 것에 대한 정보를 찾는 꼴을 보며 적색 뱀 머리가 말한다.
“너 잠든 다음에 나타난 품종이야. 저걸 아예 새로운 품종의 드래곤이라고 부르자는 말도 있었지. 세대가 바뀌면서 드래곤이란 이름을 여기저기 마구 붙이고 싶어 하는 풍조라고나 할까?”
“되풀이로군.”
카엘은 짧게, 씁쓸하게 말했다.
적색 뱀 머리는 바로 침묵했고, 주황색 뱀 머리가 그에 대꾸한다.
“밀레니엄이 채워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밖에 없소. 이제까지는…….”
“나중에. 조금 더 정신을 가다듬고 듣자고.”
말을 끊으면서 카엘이 중얼거렸다.
두 뱀 머리가 다시 쉬이잇, 하는 숨결과 함께 침묵했다.
지팡이에서 손을 떼며 카엘은 인포네트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감각을 끊었다.
그리고 오롯하게 자신의 오감만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을 둘러보면서 기억의 심연을 다독였다. 갑작스럽게 치고 올라오는 기억으로 인해 마음의 흉터가 욱신거리며 사고 기능을 떨궈 버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때문에 카엘은 가장 먼저 이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떠올렸는데, 가차 없이 마음에 새겨진 흉터가 욱신거린다.
어쩔 수 없었다.
‘팔천 년…… 그 정도 되려나?’
이 세상에 카엘이 대마도사의 이름을 새긴 것은 아무리 오래 거슬러 올라가도…… 900년 전, 결코 천 년을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카엘은 이 세계에서 주관적으로 8천 년에 달하는 시간을 겪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8천 년.
때문에 카엘은 긴 수면기를 벗어날 때마다 시간부터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마음에 새겨진 흉터, 기억의 잔해가 늘 쿡쿡 쑤실 수밖에 없었고.
피식, 카엘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이 그려졌다.
“응? 왜 그래?”
적색 뱀 머리가 먼저 물었다.
“괜찮은가?”
조심스럽게 카엘의 상태를 점검하듯 혀를 날름거리며 주황색 뱀 머리도 물었다.
“아, 괜찮아. 그냥…… 만 년이나 지나다 보니 왠지 울화도 짜증도 희석되었나 싶어서 말이지.”
카엘은 살짝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자신의 동반자, 두 마리 뱀을 돌아보았다.
쉬이잇, 적색 뱀 머리가 카엘이 아닌 옆의 주황색 뱀 머리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얘가 드디어 미쳤나? 정신 능력이 망가진 거 아냐? 재웠다 다시 깨워야 하나, 진단 좀 해봐.”
주황색 뱀 머리는 시이잇, 하는 숨결을 한숨처럼 토해 내면서 대꾸한다.
“카엘이 아니라 네가 진단이 필요하겠다. 지금 카엘은 아무 이상 없어. 그저…… 세월에 단련된 마음가짐이 더 이상 기억에 휘둘리지 않는 견고함을 드러낸 것뿐이지.”
두 마리 뱀을 보며 카엘은 피식 새는 웃음을 한 번 더 흘린 다음에 말한다.
“바로 앞에 사람 놔두고 그딴 소리 할래? 닥치고 좀 있어. 세계에 이변이 나타났는가 보다, 내가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쪽이 더 신기하니까.”
두 마리 뱀이 조용해졌고, 카엘은 바람결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꽤나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고 문득 알아차렸다. 자신의 주변에는 마력 장벽이 강렬하게 전개된 채이고, 이러기 위해 무슨 생각을 한 것이 아니란 것. 너무 자연스럽게 숨을 쉬듯이 몸을 지키기 위한 마력 장벽을 펼쳐 놓은 셈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중에, 구름을 눈 깔고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사람을 찢어 버릴 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이렇게 짓누를 수 있는 마력 장벽을 꾸며 놨다는 상황에 카엘은 다시 한 번 되뇔 수 있었다.
‘대마도사…… 나는 대마도사 카엘 디아크.’
동시에 기억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으스스하고 섬뜩한, 너무나도 거대하고 웅장한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기억을 되새길 뿐이지만 여전히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 강렬한 의지는 기억이란 매개체를 넘어서 카엘의 영혼을 울릴 정도로 강력했다.
“좋아, 인정하지! 그래, 네가 나와 대등한 존재란 것을 인정하겠어! 그러니 너도 내가 이 세계에 대한 권리를 지녔다는 것을 인정해라. 이 세계가 나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 인정해라. 내게 이 세계를 파멸시킬 권리가 있고, 이 세계를 재앙과 멸살로 징벌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언제 인정받고 일 저질렀다고…….’
카엘의 입가가 뒤틀렸다.
드래곤이 일 저지를 때 누구 눈치 보고 뭘 따지는 경우라니, 차원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를 관통하는 지식을 탐색하고 축적한다는 두 마리 뱀조차도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 세계의 파멸을 유예시키고 싶나? 내 징벌을 회피하게 하고 싶나? 이 세계의 구원자가 되고 싶나? 그렇다면…… 찾아와. 그림 투아란을 찾아서 내게 돌려줘. 그럴 수 있겠나, 대마도사? 네가 약속한다면, 나는 영겁의 시간이라도 기다려 줄 수 있다. 약속할 수 없다면 내가 세계에 내리는 징벌에 간섭하지 마라! 이 세계의 멸망을 늦추려 하지 마!”
‘그딴 소리를 하면 뭔지 몰라도 찾아 준다고 할 수밖에 없잖아, 이 미친 드래곤아!’
그때나 지금이나, 카엘은 한숨과 함께 똑같은 생각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그 순간을 더듬고 검토해도 역시 실수였다.
그림 투아란이 뭔지 먼저 확인부터 해야 했는데…….
설마 드래곤씩이나 되는 놈이, 그냥 생김새가 닮았다고 그렇게 불리는 경우도 아니고 진심으로 세계를 파멸시키고 모두를 몰살시키네 어쩌네 하는 진짜 드래곤이란 녀석이 죽은 사람 하나 살려 내라고 그 생떼거리를 부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애초에 죽게 내버려 두질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카엘은 그림 투아란이 뭔지, 누군지 따위는 알아볼 생각도 없이 그냥 드래곤이 심각하게 여기는 중요한 아티팩트라도 잃어버렸나 보다 하고 그 난동과 어마어마한 생떼거리부터 다독이려고 약속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약속을 떠올리면서 카엘은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로 머릿속이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마리 뱀은 카엘의 눈길에 다음 나올 말이 뭔지를 바로 간파한 듯, 재빠르게 쉿쉿거리는 숨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합창하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마! 기억이나 해내라고!”
“다시 듣고 싶은가? 카엘 디아크, 너는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했다.”
“맞아! 여태 못 지킨 까닭은 아직 너 자신을 완전히 회상하지 못한 탓이지!”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드래곤이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그 긴 시간이 카엘 네가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회상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아주 자아아아알 알고 있었지!”
“꿈을 통해서 많은 기억을 되찾았다, 앞으로 몇 번…… 몇백 년만 인내하면 카엘, 그대는 완벽해진다.”
쉬잇, 시아앗.
아옹다옹하던 두 녀석이 장단 맞추는 꼴에 카엘은 헛웃음과 함께 콕 찌르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벌써 1만 년 까이 됐지?”
이를 기다렸다는 듯, 두 마리 뱀이 다시 혀를 날름거리면서 떠들었다.
“당연하지! 넌 원래 대단해서 그렇다니까!”
“인내심을 가져야 하네, 카엘.”
“겨우 만 년 정도라면 오히려 적게 걸리는 거라고!”
“진정한 그대의 격이 그만큼 높고 대단하기 때문에 드래곤도 받아들인 것이잖은가.”
계속되는 말을 더 듣기 싫다는 듯, 카엘이 손짓했다.
고요함이 다시 금세 주변을 채웠다.
마력 장벽에 눌린 바람이 여전히 살갗에 부드럽게 닿아 왔다.
카엘은 다시 ‘드라크본’이라는 마수를 찾아봤다.
멀리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니 사냥에 성공한 듯했다.
그 발톱에 붙잡힌 것이 불붙은 커다란 곰이기는 했지만, 꼭 풀 뜯어 먹는 사슴이나 소, 양만 잡아먹으란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저 정도면 춤추는 산맥에서는 몬스터 취급이겠지?”
중얼거림이 저절로 카엘의 입술을 넘어 새 나왔다.
적색 뱀이 갸웃하는 시늉을 하며 쉿쉿거리는 대답을 한다.
“취급이 아니라, 저게 그 산맥 경계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몬스터가 될 거다. 드라코눔의 경계 안에서는 네 덕분에 마수의 형질을 어떻게든 보존하겠지만.”
주황색 뱀이 보태 말한다.
“용의 혈맥을 지녔으니 혼돈의 영향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당연한 현상이잖소. 하지만 카엘, 그 또한 변화할 시기가 된 듯하오이다.”
“응? 춤추는 산맥에 그런 변화가 가능해졌다고?”
카엘이 흠칫하며 되물었다.
춤추는 산맥은 그 이름대로 끊임없이 지형이 변화하고, 환경이 뒤바뀐다.
변화의 시간이 눈 깜박하는 짧은 동안이 아닌 탓에 바로 알기 어렵지만, 몇 년이면 그 변화를 또렷하게 볼 수 있기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춤을 추는 상황이 어지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곳, 때문에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춤추는 산맥을 지켜보는 자라면 ‘거긴 여전하군.’이란 말을 입에 담게 된다. 변화하는 것이 당연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처럼, 마경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한데 그 변화하는 곳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니!
“사육자의 세력이 줄어드는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육자의 엷고 광범위한 힘의 영향을 줄이면서 정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뭔가가 나타났다. 덕분에 사육자의 영향에서 벗어난 몬스터들이 다퉈 가며 그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서 안정적인 서식을 하려 대이동을 시작했다. 춤추는 산맥의 안쪽이란 몬스터에게도 가혹하고 끔찍한 곳이니 당연한 선택이기는 하잖나.”
주황색 뱀은 최대한 추측을 자제하듯이 말을 보탰다.
적색 뱀이 쉬잇거리다가 핀잔하듯 재빨리 덧붙인다.
“파워 서클이야. 분명해!”
“파워…… 분명하다는 근거는?”
카엘은 설렘을 억누르면서 짐짓 냉정한 척 묻고 있었다.
주황색 뱀이 가늘게 눈을 흘겼지만 적색 뱀은 신났다는 듯이 얼른 대답한다.
“네가 드라코눔의 파워 서클을 그려 냈을 때랑 비슷하니까! 혼돈을 정제하고 섭리를 확대시키는 그 현상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무리는 몬스터일 수밖에 없으니까! 카엘, 이번에는 정말 일찍 깨어나게 된 걸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을 거야!”
“그건…… 두고 보자고.”
흠칫하면서 카엘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몇 번, 제대로 수면기를 끝내지 못하고 일찍 깨어났던 적이 있지만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과연 이번에는 기대해도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