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4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36)
Chapter 188. 맹세의 수정(水晶)
치이잇, 치익.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퍼져 나왔다.
물웅덩이, 혹은 고랑처럼 보이는 소울 풀이 옥좌에 접근하는 자…… 투란을 향해 위협하는 듯한 음향이었다. 단순히 겁주려고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녹색의 광채가 붉은 반점을 머금은 채로 가득 퍼져 나왔고 연기처럼 사방을 메우고 있기까지 했다.
더 이상 움직이면 뭘 하든 그냥 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위협이 느껴졌다.
말을 걸어오는 듯한 그 느낌에 투란은 조금 어이없었다.
“이제까지 덤벼 놓고 새삼 뭘…….”
듣는 귀가 없어 보였지만 들으란 듯한 중얼거림이 저절로 투란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이는 도발이었고 위협하던 광채는 거침없이 반응했다.
붉은 반점이 번뜩이며 길어졌고, 쏘아진 화살처럼 투란을 향해 뻗어 왔다.
녹색의 액체가 격렬하게 끓어오르며 붉은빛을 강조하는 배경이 되는 안개를 구름처럼 피워 올렸다.
하지만 붉은빛 화살은 투란에게 닿기만 했을 뿐, 살갗을 찢고 뼈를 부수며 피가 터져 나오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저 닿고 닿은 자리를 밝혀 주는 것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이 상황은 몇 걸음 더 붉은 수정을 향해 걸어 나가는 투란이 낯을 구기게 했다.
‘이건 뭐야?’
마음 한구석에 뭔가 스멀스멀 기어드는 기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살에 뭔가 닿았다는 느낌조차 없는 빛은 그렇게 밝혀 주며 머물기만 할 뿐이었는데, 정작 마음 깊은 곳을 향해 뭔가가 스며든 기분이 굉장히 불쾌한 것.
투란은 이 불쾌감이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억에 없지만 기억에 있는 듯한…….
모호하면서도 분명한…….
‘악마의 심장’이, 지켜보던 ‘투란’이 곧바로 투란에게 답을 해 왔다.
‘생각하는 머리가 하나 늘었어.’
‘기억이 갈라졌던 때랑 닮았어.’
‘전혀 겪은 일이 없는 기억이 생겨났네?’
연이어 내려지는 판단은 온전한 투란 자신이 생각한 결과였다.
드라고니아가 뒤늦게 터뜨린 외침은 투란의 생각을 바로 보강해 주고 있었다.
―빙의하려는 거야! 네 정신 안에…… 유령이 스며들려고 한다고!
복잡한 사정, 엄격한 말을 치우고 투란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설명이었다.
‘이런 젠자아아앙!’
한 박자 늦게 투란이 버럭, 입을 꽉 다문 채로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듯한 맹렬한 비명을 질렀다. 이 비명은 곧바로 투란의 마음 깊은 곳을 울렸고, 문장의 풍경을 두드리며 몬스터의 본능을 반응하게 했다.
투란의 검은 살갗이 유동(流動)하고 요동(搖動)쳤다.
출렁거리는 살갗에서 빛을 쏘인 부분을 중심으로 작은 가시가, 금방 작은 혹이 되듯이 돋아났고 혹은 길쭉하게 늘어나며 애벌레처럼 꾸물거렸다. 애벌레는 보통 벌레랑은 다르다는 것처럼 금방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머리를 갖췄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왜 메타모픽 서펜트야?
드라고니아가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
실 가닥 같은 작은 애벌레, 그런 형상을 한 뱀의 무리가 투란의 몸에서 잔털처럼 뻗어 나오는 중이었다.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몸의 반 토막을 남겨 둔 채로, 그냥 머리가 여럿인 전설적인 뱀도 아니고 잔털처럼 돋아난 수백, 어쩌면 수천이 될지도 모르는 괴기한 몰골을 꾸미다니!
언데드의 영핵이 투란의 몸에 스며들면서 몸을 차지하겠다고 침투하는 상황에서 이게 대체 무슨 대응인가!
소울 풀에서 나와 투란에게 뻗어 온 영핵은 투란의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정신에 간섭해서 마음속에 새로운 기억, 사고, 감정을 불어넣으려 하는 중이었다. 이에 대응해서 투란은 자신을, 서로를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불완전한 자아(自我)를 억지로 키워서 방패로 내미는 중인가?
드라고니아는 이런 추측을 금방 지워야 했다.
수천의 잔털, 뱀의 머리에는 불완전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텅 빈 채로 ‘나는 누구?’라고 웅얼거리는 듯한 갓난아이만도 못한 미숙한 자아가 자리를 뺏길 준비를 하고 있잖은가!
―어쩌려는 거냐? 정신 방어 마법을 준비할 때까지 위장 자아로 버티려고?
묻고 있지만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정신을 보호할 마법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한번 훌렁 날려갔지만 메듀시아의 본능에서, 이런 영핵의 침투에서 ‘악마의 심장’과 함께 온전한 투란의 마음을 보존하게 해 줄 주문은 지금 쓰지 않더라도 필요했기에 망설임도 없었다.
‘위장 뭐?’
투란의 대꾸는 짧고 모호했다.
마치 지금 하는 짓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채로 일단 저질러 보는 중인 듯한 낌새가 넘쳐나고 있었다.
이는 드라고니아를 멈칫하게 했고 다른 질문을 쏟아 내게 했다.
―대체 뭘 어떻게 대응하려는 거냐?? 위장된 정신을 소울 풀에서 튀어나오는 영핵에 대응하는 방벽으로 삼으려는 것 아니야? 그래서 뱀 머리에 아무 기억도 생각도 없는 에고(Ego)를 담아 생성한 거잖아? 그러고 있으면서 뭘 하는지 몰라? 모르면서 대체 무슨…….
‘본능이야, 메듀시아의 본능대로…… 음, 잘 처리되고 있는 것 같네?’
투란은 어느새 여유를 지닌 대답을 하고 있었다.
덩달아 짧은 순간 동안 머뭇거리는 듯했던 걸음이 가볍고 빠르게, 몇 걸음 남지 않은 붉은 수정의 옥좌를 향해, 이 밀실의 기둥을 향해 내딛어지고 있기도 했다.
이런 투란을 노려보는 듯, 붉은 수정이 더욱 강렬하고 빠른 맥동을 시작했다.
소울 풀의 고랑이 더욱 맹렬하게 끓어올랐고, 붉은 반점이 녹색 거품 속에서 잔뜩 피어올랐다. 녹색의 안개구름 사이로 붉은빛이 바늘처럼 맺혀지자마자 투란을 향해 한가득 쏘아졌다.
투란의 몸에서는 더욱 왕성하게 잔털이 피어올랐다.
영핵의 광채가 닿을 때마다, 닿는 곳마다 잔털의 뱀 머리가 살랑이며 맞이하는 상황이었다.
드라고니아가 이 괴이한 격돌을 지켜보면서 당황과 염려를 함께 담은 중얼거림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렇게 사고하는 자아가 늘어나는데…… 투란, 너 괜찮은 거냐? 차라리 마력 장벽을 통해 격리된 영역을 만들어서 대항하는 편이 낫지 않아? 몬스터 로드의 힘만으로 전부 버텨 낼 수 있겠어? 이러다 너도 모르게 또…….
‘괜찮아. 전에 헷갈렸을 때랑 달라. 지금은 유렐리아의 촉수처럼 뱀 무리를 움직일 수 있어. 그때도 온전한 나는 마음 한쪽에 아주 멀쩡했잖아. 스테노아가 있으니까, 지금은 유렐리아까지 있어서 메듀시아가 흔들리면서 한눈팔지 않아. 아주 멀쩡하고 괜찮아. 그러니까…… 저 뻘겋게 반짝거리는 거, 제어 수정이 몬스터랑 들러붙은 꼴이 맞지? 이제 두들겨 팰 테니까, 상황 잘 지켜보라고.’
말을 맺을 무렵에 투란은 커다란 손톱을 들이대며 붉은 수정의 맥동하는 자태를 후려치듯 할퀴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짙게 엮여서 새빨간 먹구름이라도 된 것처럼 수정을 휘감으며 투란에게 맞서 왔다.
소리도, 충격도 없었다.
사룡의 형상을 빌려 온 손톱은 허공에서 맴도는 구름과 안개를 흩어 놓은 채로 수정에 닿지 못했고, 수정의 맥동은 애써 휘몰아 낸 짙은 안개와 구름에 손톱자국처럼 갈라진 틈새를 잠시 드러내야 했다.
투란이 다시 할퀴려 하는 사이, 붉은 수정의 맥동이 훨씬 빠르고 강해졌고 구름은 암석처럼 뭉쳐 들었다. 덩달아 투란이 딛고 있는 발아래에서 검고 붉은 안개에 이끌린 석재가 뭉클거리면서 치솟아 투란의 발을 덮고 발목을 휘감으며 다리를 묶겠다는 것처럼 움직였다.
‘꽤 재미있는 괴물이네?’
살짝 감탄했다는 듯, 진지하게 다채로운 눈빛을 번뜩이면서 투란은 할퀴기 위해 굽혔던 손을 활짝 펴며 움켜잡으려는 형태로 바꿔 버렸다.
수정을 감싼 암석, 구름과 안개의 덩어리는 더욱 짙어지면서 한층 더 단단한 장막을 만드는 것으로 투란의 바뀐 손짓에 대응하려 했다.
이에 드라고니아가 놀라 외친다.
―야, 야! 정체가 분명하질 않은데 대뜸 삼키려 하지 마! 유령 싫다면서!
‘유령 아니고 다크미스트라며? 뭐, 아무거나 비슷한 괴물이 제어 수정 속에 숨어 있겠지. 어떤 마도구를 방패 삼든, 몬스터 로드에게서 피할 수는 없어! 악마종이 만든 몬스터 병기라도!’
―대체 뭔 자신감이냐고! 다크미스트는 정신을…….
한층 더 염려가 가득한 외침을 드라고니아는 매듭짓지 못했다.
투란이 커다랗게 키운 손아귀에서 뻗어 나가는 격동, 수정의 맥동을 단숨에 사라지게 만든 격동은 사룡의 힘인 듯했지만 그 안에 새롭게 얹혀 있는 의지의 힘…… 마력으로 변환된 그 힘은 분명히 윌 라이트였다.
갑작스럽게 뒤엉킨 몬스터 로드의 기량과 드라코눔의 독보적인 마력 형질은 드라고니아가 예상하지 못한 위력을 드러내며 하던 말을 잊게 했다.
순식간에 수정을 감싼 구름과 안개가 암석 같은 견고함을 잃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냥은 사라질 수 없다는 듯, 그 파편이 뭉클거리며 투란의 주변을 휘돌면서 어떻게든 투란에게 닿으려 했다. 사방에서 쏘아지듯 뻗어 온 붉은 빛, 영핵이 이 안개와 구름의 파편과 닿으면서 스산한 울림이 귓가에 들릴 정도로 또렷하게 퍼져 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듯 투란의 몸에 스며들려다가 뱀의 머리 속에 갇혀 버린 영핵, 수천을 가볍게 셀 수 있는 영핵에서 수많은 외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기까지 했다.
그 외침은 대부분이 말로 드러낼 수 없는 심상치 않은 감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굳이 말로 바꾸려 한다면 저주, 욕설에 가깝고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그냥 길 가다 만난 짐승에게 시비 걸려서 욕을 먹는 중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매우 억울하고 아주 분한 기분이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치솟을 듯한 상황.
하지만 투란은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냉정했다.
투란의 손과 발에서 돋아난 붉은 고리, 핏빛의 고리 무늬는 투란보다 더 냉정하게 수정의 구름과 포석의 안개에 대응하고 있었다. 핏빛 고리에 닿은 검고 붉은 안개, 구름은 단숨에 허공에서 지워지는 듯했고, 그 과정을 겪는 투란은 한층 더 냉정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삼켜진 몬스터의 정수에 대해, 투란이 감상을 내놓고 드라고니아가 분석을 덧붙였다.
‘다크미스트…… 돌이든 수정이든 빨갛든 시커멓든, 원래는 같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같아질 수가 없는 모양인데?’
―한쪽이 한쪽을 지휘하는 것 아닌가?
‘바닥 돌이나 복도의 몬스터 시체를 움직이던 쪽이 다크미스트였지? 수정을 먹어 치운 쪽은…… 다크미스터가 성장하고 적응해서 더 강력해진 것…… 바탕색까지 붉게 변했는걸? 정말 레드미스터라고 불러야겠잖아.’
―같은 품종이 새로운 상황을 만나 원상태를 유지한 쪽과 새로운 적응 형태를 만들어 낸 쪽으로 갈라진 셈이로군. 그냥 갈라진 것도 아니고, 서로의 상하 관계까지 명확해진 모양이다. 투란, 레드미스트가 분명히 다크미스트를 지휘……아니, 지배한다고 해야 하나? 너한테 쓸려 나간 용량을 천장 쪽 기둥에서 흡수한 다크미스트로 다시 채워 넣는 것 아니냐?
드라고니아가 엿보는 상황을 투란도 알아차렸다.
수정에 깃들어 붉게 변한 다크미스트, 이제는 레드미스트인 몬스터는 투란에게 먹히고 흩어지는 만큼 사방에서 다크미스트를 끌어들여 채워 넣고 있었다. 붉게 맥동하는 수정이 다크미스트를 레드미스트로 바꾸면서, 희생을 강요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다크미스트, 설마 이 요새를 다 채울 정도는 아니겠지?’
―그 걱정보다…… 소울 풀이 수정에 제어당하는 부분부터 걱정해야 할 듯한데?
‘무슨 걱정? 이제 금방…… 윽!’
―뭐냐? 뭐야!
몬스터 에센스를 삼키던 투란은 갑자기 날카롭게 찔러 오는 마력에 놀랐고, 드라고니아는 수정 깊은 곳에서 느닷없이 솟구친 그 마력에 경악했다.
소울 풀이 요동치며 그 마력에 호응했다.
요새 깊은 곳에 감춰져 있었던 듯한 마력은 웅장하고 거대했다.
거기에 호응한 소울 풀, 그에게서 흘러나온 영핵은 곧바로 녹색 거품의 형상을 뒤틀면서 기묘한 형체를 꾸미기 시작했다.
거품으로 된 병사가 거품으로 이뤄진 무장을 한 채로 허공을 둥실거리면서 투란에게 다가오는 광경은 금세 이뤄졌고, 눈살을 가득 찌푸린 투란은 사방을 가득 채운 그 광경에 이를 갈면서 나직하게 한탄했다.
“유령 싫다니까…… 완전히 옛날얘기에 나오는 희끄무레한 유령이잖아! 왜 이러냐고, 나한테 왜 이래!”
―제어 수정이 제 기능을 찾아서 저 모양인 것 같다! 투란, 제어 수정을 장악해야 해! 억누르려 하는 다크미스트를 레드미스터로 강화하고 적응하게 만든 마법이 너를 덮치려 하는 거야!
드라고니아가 상황을 분석하고 외쳤다.
투란은 불만 가득한 대꾸를 소리 없이 터뜨려야 했다.
‘지금 날 덮치는 건 마법이 아니야! 유령이잖아! 눈에 훤히 보이는, 옛날얘기에 나오는 그 유령이라고!’
거품으로 이뤄진 언데드 병사들이 밀실을 가득 채우면서 투란의 소리 없는 외침을 잘 들었다는 듯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 벙긋거림마다 일어난 파문에는 웅장하고 거대한 마력이 호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투란은 유령 군단에 짓이겨지는 몰골이 되어 밀실에 스며 오는 다크미스트, 이를 이용해 버티려는 레드미스트의 정수를 열심히 삼켜야 했다.
그사이, 한순간에 찾아온 정적이 밀실을 지배했다.
갑작스럽게, 은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