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6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54)
“네가…… 그와 닮은 운명을 지녔다고……?”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세린의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모래왕이 고요하게, 모래가 사삭 하는 소리를 섞어 바로 보태듯 말한다.
“투아란과 닮았지만 다르다. 투란의 운명은 오롯한 그 자신의 것. 혼동하여 착각하지 마라, 세렌.”
“누가 착각해! 아무도 투아란과 같은 운명을 지닐 수는 없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고아이기 때문에 진정한 이름도 모르고…… 드래곤의…… 용의 가호도 있다며? 그래서 모래왕, 네가 깊이 간직하고 있던 데저트 데몬까지 내줄 수 있었던 거야? 닮았어도 투아란이 아닌데?”
입가의 먼지와 함께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어딘가 두서없이 흩어지고 있었고, 세렌 자신을 더 흔드는 이야기인 듯했다.
투란은 그중에서 운명이란 한마디를 통해 그림 투아란의 전설, 그 시작 부분을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버려진 고아, 시궁창 쥐처럼 살았던…….’
그리고 도시에 떨궈져 죽을 듯했던 드래곤과 만남과 계약, 그로부터 그림 투아란은 천 년이 넘는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비루하고 힘겨웠던 어린 시절은 늘 이야기의 서두를 장식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금방 잊히는 부분이었다.
한데 이 고대를 살았던,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무는 듯한 공주님…… 이쯤 되니 유령인가 망령인가 구분도 하기 싫어지는 공주님은 전설의 시작 부분에 꽤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나처럼 주워 키워진 고아였을 리도 없는데?’
투란으로서는 세렌 공주의 상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 투아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그 시작 부분에 관심을 두고 조금이라도 집착을 드러내는 경우라면 대부분 비참한 처지를 겪는 아쉬움 가득한 고아…… 혹은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이든가.
―멋대로 단정 짓지 마라. 남의 처지에 대해서 섣부른 판단은 어리석은 짓이야.
드라고니아가 옆으로 새려는 듯한 투란의 생각을 제자리로 돌려놓듯이 중얼거렸다. 당장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듯한 그 말투에 투란도 동의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지금 저 공주의 사정을 파헤치는 일보다는, 모래왕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투란을 이리로 몰아넣었는가부터 따져야 하잖나.
‘너, 뭔가 짐작하고 있지?’
불쑥 묻는 듯했지만 투란은 드라고니아를 향해 빠른 대답을 보채고 있었다.
분명히 드라고니아는 모래왕이 뭐라 하자 거의 쌍욕을 퍼붓는 듯했으니까.
한데 이 물음은 잠시 투란에게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풍경을 보여 줬다.
미묘한 주저함,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드라고니아의 말이 천천히 투란의 뇌리로 스며들고 마음속으로 울려 퍼진다.
―투란, 저 공주는 맹약의 수호자로서 계약자의 권능을 전승받았다. 모래왕과 직접 계약한 경우가 아니야. 고대의 마법에서 모래왕 수준의 강대한 정령과 계약할 때, 계약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이용되던 이중 계약, 맹약의 징표…… 이 경우에는 그 성궤이겠다만, 징표를 매개로 두고 계약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야. 모래왕이 방금 말한 것처럼, 맹약의 수호자란 것이 공주의 진짜 자격이다. 그러니까…… 성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 공주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은 공주를, 수호자의 자격을 지닌 존재를 파괴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모래왕, 수호자를 지키기 위한 맹약의 존재랑도 싸워야 해. 그건 모래왕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막, 그냥 사막도 아닌 대사막이 품은 모래 미궁 안에서 모래왕과 싸운다? 드래곤도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싸워 이긴다 해도 수백 년은 걸릴 테니까! 하지만 수호자가 어떤 형태로든, 저 공주처럼 존재한다면 징표에 접근하는 더욱 쉬운 방법이 있다. 그래, 수호자를 설득해서 길을 열어 주게 하는 거지. 이쯤 되면 짐작이 되지? 안 되냐? 멍청이가아아! 너야, 너! 그림 투아란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흔해진 이름인 투란, 그 이름을 달고 있는 너라고! 심지어 그림 투아란처럼 버려진 고아이고, 진정한 이름을 들었어도 기억 못 한다는 불우한 처지! 그러면서도 이 사막의 재앙인 사룡을 제압한, 그림 투아란이 용의 이름을 허용한 괴물을 삼켜 버린 몬스터 로드이기도 한 너! 네가 바로 저 공주를 설득할 열쇠인 거야!
격한 외침이 가득한 이야기는 투란에게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라고니아의 이 추측이 가득한 이야기에는 투란의 상황이 이렇게 된 까닭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쑥 빠져 있잖은가.
‘유니콘홀드를 무너뜨리다가 떨어진 거잖아? 그것만 아니면 훌훌 떠날 수 있었는데?’
꽤 날카롭게 짚었다고 생각하는 투란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한층 더 사나우면서도 냉랭하게 말한다.
―미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하게 모래왕이 정리해야 할 일이었지. 그런데 그리로 가라 권한 것이 누구지? 성채의 절벽이 무너지자마자 어디로 떨어져 내렸지? 모래왕이 어떤 속성의 정령인가 잊지는 않았지? 그리고 지금 너는 어디서 뭘 하는 중이냐?
‘음, 모래왕의 수작에 완전히 놀아난 셈이냐?’
연이은 물음에 하나씩 답을 떠올리면서 투란은 이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사룡 앞으로 가게 된 까닭, 키유나와의 만남까지도 어쩐지 모래왕의 수작이었는가 하는 생각마저 슬그머니 솟구치는데…….
곧바로 드라고니아가 가혹한 말투로 보탠다.
―이 넓디넓은 사막에서 티끌이나 다름없는 인간 둘이, 하나는 길잡이로 하나는 사룡을 제압할 자로서 우연히 만난다? 모래왕이 버티고 있고, 모래 미궁이 언제라도 구멍을 열어젖힐 대사막에서?
‘심하게 당한 거네?’
왠지 헛웃음이 배 속에서 끓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투란이 중얼거렸다.
모래왕과 세렌 공주는 그런 투란 앞에 멈춰진 풍경처럼,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든 존재처럼 멀뚱거리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냥 그대로 계속 멈춰진 채라면 한 대씩 때려 주고 싶은데…….
‘그러면 날 공주 앞에 데려다 놓고 뭘 어쩌자는 거지?’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투란의 마음에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아까부터 오간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모래왕은 투란이 그림 투아란과 다르지만 닮았으며 어떤 자격을 지녔다고 말하는 중이고, 세렌 공주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지를 못하는 분위기를 팍팍 풍겨 내고 있었다.
―저 공주가 저런 몰골이 된 까닭과 관련이 있겠지. 맹약의 수호자이니, 어쩌면 그 맹약에 저렇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더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조건이 담긴 성궤를 어찌할 경우, 모래왕의 맹약이 해제되면서 저 공주도 저런 몰골에서 해방…… 이 경우에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투란 네가 필요한 상황이겠지. 성궤로 향하는 열쇠로서 말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인가는 예상하기 어렵다.
‘저 공주님이…… 어쨌든 살아 있는 공주님이 자살하겠다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인 거냐?
복잡한 부분을 걷어 내고 투란은 조금 움찔하고 서늘한 기분이 바늘처럼 돋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새삼 세렌 공주를 다시 건너 봤다.
사유와 사고, 그 가속이 끝났고 투란 앞에서 다시 모래왕과 세렌 공주의 대화가 이어졌다.
“모래왕은 기억한다. 앙트 세레니아 티아크가 한 약속, 모래왕은 분명히 기억한다. 공주여, 그대 스스로 했던 약속을 잊었는가?”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으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잖아!”
묵직한 모래왕의 물음, 날카로운 공주의 대답.
“그렇다면 보아라, 공주여. 그대 앞에 선 자를.”
“투아란이 아니잖아!”
슬쩍 비켜서는 모래왕으로 인해 투란의 모습이 공주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고, 공주는 더 날카롭게 앙칼지게 외치고 있었다.
모래 먼지 풀풀 휘날리는 광경 속에서 투란은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난감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투란의 얼굴에서는 데저트 데몬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다가 다시 위에서 채워지는 기묘한 꼴로 꿈틀거리며 억지로 가면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모래왕은 투란의 처지에도, 공주의 반항 같은 외침에도 꿈쩍없이 그 무겁고 느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림 투아란은 죽었다. 그리고 공주는 약속했다. 언젠가…… 용의 저주를 끊고, 투아란처럼 데저트 데몬을 부리며 이 자리에 선 자에게 문을 열어 주겠다고. 공주여, 투란에게는 약속된 자격이 있다.”
“투아란이 아니잖아!”
“그는 투란이다.”
“그 이름은 이제 너무 흔하다고! 아무나 쓰는 이름이잖아!”
가만히 듣고 있는 투란에게는 한층 더 끼어들기 애매하고 이상할 뿐이었다.
‘뭘 어쩌란 거야?’
―열쇠가 왔으니 열란 말이지.
왠지 한층 냉소적으로 심하게 비꼬는 듯한 드라고니아였다.
‘모래왕이 억지로 열지 못하는 건가?’
―그럴 수 있었다면 널 여기 처넣었을 리가.
투란이 투덜거림에 드라고니아가 더 삐뚤어진 말투로 대꾸했다.
이대로 계속 두고 볼 수도 없었기에 투란은 가볍게 헛기침부터 했는데, 입가에서 데저트 데몬이 풀풀 모래 먼지를 섞어 뿌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왕의 형체가 모래를 서걱거리며 흘리듯, 공주의 마른 입가에서 먼지가 흩날리듯 투란도 거기 끼려면 숨결 속에 티끌 정도는 섞어야 한다는 것처럼!
때문에 잠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투란은 꿋꿋한 마음가짐으로 아예 한 손 들고 흔드는 채로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저기요? 여기 좀 잠깐…… 나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건지 좀 알려 주면 안 될까요?”
사르륵, 사악.
투란의 말에 모래왕이나 공주보다 먼저 데저트 데몬이 반응했다.
단숨에 투란의 어깨로, 팔뚝을 넘어 흔드는 손을 감싸는 움직임이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모래뿐이라도 벽을 칠 듯했다.
‘얘는 또 왜 이리 예민해?’
투란으로서는 어이가 없지만, 모래왕에게는 당연하고 공주에게는 짜증 나는 일인 듯했다.
“데저트 데몬! 투아란이 아니잖아! 살아 있는 아티팩트라면서! 주인을 정하면 바꾸지 않는다면서!”
“죽지 않은 동안, 주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바꾸지 않는다. 데저트 데몬은 주인이 죽으면 새로운 주인을 섬길 수 있다. 모래왕은 분명히 기억한다, 공주는 그 또한 기억하지 않으려는가?”
어딘가 준엄한 말투.
슬슬 아이를 꾸짖는 어른처럼 보이는 모래왕이었다.
한숨이 절로 투란의 입가에서 먼지와 함께 흘러나왔다.
손으로 그 먼지를 흩어내면서 투란이 다시 소리 내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어쩌라고. 날 왜 이리 데려왔냐고. 그냥 가도 되냐고오오…….”
여기에 모래왕이 뭐라 하려는 듯, 느릿하게 투란을 향해 머리를 돌리는 움직임을 보이니 공주가 더욱 빠르게 마른 눈가의 넝마 같은 눈알을 투란에게 고정하면서 외친다.
“넌 죽어! 투아란이 아니면 죽는다고!”
“에, 뭐라고요?”
투란은 맹하니,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기에 눈을 부릅뜨는 척하면서 대꾸하고 말았다. 해명을 원하는 눈길도 꾸며서 열심히 모래왕을…… 푸스스 흘러내리는 탓에 애써 꾸민 얼굴 형태가 무슨 표정인가 전혀 알아보기 힘든 그 낯짝을 노려보는 척까지 했다.
모래왕은 무슨 태도이든 상관없다는 듯, 무겁게 말을 흘릴 뿐이었다.
“자격을 갖췄다, 강하다. 모래왕은 투란이 죽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공주님?”
투란이 이번에는 공주를 보며 살짝 불렀다.
왜 죽는다고 단정 짓는가, 더욱 자세한 설명을 간절히 원한다는 표정이 바로 투란의 얼굴을 꾸미고 있었다. 세렌 공주가 이런 낯짝에 힘을 얻은 듯이 거센 외침으로 바로 대꾸한다.
“성궤는 드래곤이 제작했어! 왕국의 마법사들은 그저 구경만 했다고! 그래서 투아란이 아닌 자가 손을 대면…… 죽어! 정당한 자격이 없는 자가 함부로 성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 놨으니까! 이름이 뭐든, 운명이 닮았다고 해도 죽는단 말이야!”
투란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모래왕이 곧바로 여기에 보태듯 반발하듯 말한다.
“자격이 없는 자를 징벌한다, 성궤는 자격을 갖춘 자를 해치지 않아. 공주여, 이미 대마도사를 통해 확인했고 알고 있잖은가?”
날카롭고 사나운 대꾸가 곧바로 공주에게서, 그 마른 넝마 같은 눈알이 불타오르는 듯한 광채를 머금는 채로 터져 나온다.
“그래, 대마도사 카엘이 말했지! 그림 투아란만큼 강하지 않다면, 어설프게 자격을 갖춘 자는 죽을 거라고! 세상 어디에 그림 투아란만큼 강한 사람이 있지? 대마도사조차도 그 많은…… 고블린과 트롤과 오우거에다가 우르카인지 오르카인지 하는 일족까지 끌고 왔지만 성궤를 열지 못했잖아!”
“공주여, 대마도사는 자격을 갖춘 자를 데려오지 않았다.”
모래왕이 살짝 덧붙여 말했다.
그사이에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으르렁거림을 들으면서 맹하니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카엘이라고? 왜 이 모래 미궁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