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6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57)
푸스슷.
모래 원판 위에서 춤을 추는 작은 형상들이 꾸물거리며 모래알이 흩어졌다.
세렌 공주가 그 원판을, 원판이 뚜껑이 되어 덮고 있는 구멍 아래의 상황을 고스란히 작은 장난감 같은 모형을 통해 드러내는 원판 위의 움직임을 보며 속삭인다.
“정말…… 투아란처럼 싸우네.”
원판의 테두리에서 번져 나간 모래, 그 궤적의 끝에서 솟구친 듯한 모래왕의 인형이 바로 대답한다.
“닮은 운명만큼. 투아란의 유년기가 조금 덜 불우했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닮았지.”
세렌 공주가 흘깃 모래왕의 인형을 엿봤다.
원판 위에서 수많은 병사, 몬스터의 무리가 덮쳐 가는 중심에 놓인 돌개바람, 회오리 같은 투란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 없지만 세렌 공주는 표정을 그려 내고 있는 모래왕의 인형을 꼭 확인해야겠다는 것처럼 엿보고 말았다.
하지만 모래왕의 인형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비바람에 버티는 산악처럼 거기 우두커니 머물 뿐인 듯했다.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듯 눈동자를 움직이던 세렌 공주가 나직하게 묻는다.
“맹약을…… 저 투란이 이어 주길 바라?”
“투란은 맹약을 이을 수가 없다.”
간결하지만 확고한 대답이었다.
세렌 공주의 마른 입가가 뒤틀렸다.
“투아란이랑 다르게 진정한 이름을 모르니까?”
“투아란에게는 진정한 이름이 없었다. 드래곤이 세상의 풍문을 이용해서 그림 투아란이란 이름을 부여했지. 그때는 이미 모래왕은 맹약을 마친 다음이었다. 맹약이 끊어질 때까지, 모래왕은 다른 누구와도 계약하지 못한다.”
“투란이 진정한 이름을 알면? 저 맹약을 끊어 내면? 그때는 모래왕이 저 투란과 계약을 하는 거야?”
“대마도사 카엘이 말했다, 맹약이 해제되면 모래왕은 앞으로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잠들어야 한다고. 너무 오랫동안 이 세상에 묶여 있었기에 모래왕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휴식이라고 했다.”
담담하고 분명한 대답은 세렌 공주의 눈길을 모래 원판에 고정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나눈 몇 마디가 의미 없다는 듯, 혹은 지워 버리겠다는 듯이 세렌 공주가 다시 중얼거린다.
“정말 투아란처럼 잘 싸우네.”
“투란은 엘카야에게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사조차 예상할 수 없다고 한 운명의 도박이 시작될 것이다. 세레니아, 그대 또한 해방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나는……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엘카야는 원했다.”
모래왕의 말은 한층 더 단호했다.
반항하듯 외쳤던 세렌 공주는 흠칫했고 그냥 마른 입술을 꽉 다물어 버렸다.
그런 세렌 공주의 마른 눈동자 속에 불길이 치솟는 듯했고, 모래를 장식처럼 두른 손이 모래 원판을 휘저었다.
원판 위의 작은 형상들, 수십 수백은 가뿐히 헤아릴 수 있는 형상들이 뒤틀리면서 소용돌이 혹은 회오리의 형태로 표시되는 투란을 향해 몰려들었다.
모래 미궁이 원판 위에서 벌어진 작은 격렬함이 어딘가의 실체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흔들렸다.
무장한 병사들이 뒤엉켰다.
하나둘이 아니라 단숨에 수백이 뭉쳐 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수백이 새로 나타났다.
뭉쳐든 수백은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되었고 빈자리를 채운 수백은 창과 방패, 검을 내밀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격했다.
함성은 없었지만, 함성보다 더 큰 압력이 피어나며 병사들의 목표를 뭉개고 파괴할 듯이 뭉쳐 들었다. 그 압력을 자신의 힘으로 삼은 것처럼 거대한 형상, 병사가 거인이 된 듯한 형체가 어스름한 모래 소용돌이를 향해 방패를 내리찍었다.
둔탁하고 무거운 울림이 소용돌이와 방패 사이에서 울려 나왔다.
그 주변에 다가서던 몬스터, 병사의 형체가 순식간에 색채를 잃고 모래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그 흩어짐 속에 몬스터도, 병사도 아닌 그림자처럼 시커먼 형상이 툭 튀어나와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림자에 닿은 몬스터, 병사는 순식간에 모래로 변해 허물어졌다.
하나 허물어진 모래는 다시 거대한 기둥처럼 치솟았고, 뱀처럼 꿈틀거리는 몽둥이가 되어 그림자를 내리찍었다.
하나 그림자 주변으로 격렬한 파동이 피어오르며 눈에 보이는 광경이 흔들림과 동시에 모래 기둥이 터져 나갔다. 모래바람이 잠시 주변을 향해 거세게 몰아쳤다. 그사이에 그림자는 더욱 빠르게 내달리던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화살과 창이 소나기처럼 그림자를 향해 쏘아지며 모래바람을 꿰뚫고 지워 버렸다.
“아오오옷! 뭐가 그리 회복이 빨라!”
검게 물든 색채를 벗어 내면서, 튼튼하고 우람한 비늘 가죽으로 몸을 감싼 몰골로 그림자를 벗어 내고 모습을 드러낸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뭔가 다른 힘이 작용한 것 같은데?
투란의 뇌리에 드라고니아가 신중하게 속삭였다.
이를 가는 시늉을 하면서도 투란은 냉정하게, 소리 없이 되묻는다.
‘얼마나 남았어?’
―백 미터 같은 십 미터가 남았다. 실제 거리는 십 미터지만, 이 증폭된 환영은 실질적으로 백 미터의 간격을 겪게 해 줄 거야.
‘젠장! 잘 풀리는가 했는데!’
―그래, 너무 잘나가니까 훼방 놓는 모양이다.
‘어? 누가?’
―모래왕은 의무를 다할 뿐이니…… 아무래도 그 맹약의 수호자이자 계약자란 공주겠지?
‘뭔 공주들은 하나같이 다 미친년만 있는 거냐?’
―그건 대체 무슨 말이냐? 왕자라고 해 봐야 키린만 겨우 아는 네가 따로 아는 공주라도 있어?
‘미친년 하나 봤지! 나만 본 것도 아니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봤지! 옆집 티아라가 그 흉내 내는 바람에 좋지 못한 꼴도 당했다고!’
―무슨 얘기인가 궁금하다만, 지금 따질 일은 아니지? 어서 뚫고 나가라.
퍼억! 콰아아아!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몰아닥친 괴현상은 투란을 휩쓸려고 했다.
투란의 몸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난 격동이 곧바로 그 괴현상을 분쇄하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투란은 뭐가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으면서 덮쳐 왔는가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손, 모래로 이뤄진 손이 짝을 지어 넷이나 치솟아서 투란을 포위하고 덮어 누르려 한 광경이었다.
‘와아, 백 미터 거인 손아귀보다 더 큰 것 같은데?’
거대한 손이 차례대로 으깨져 나가며 모래가 되어 흩어져 가는 광경을 보며 투란은 비비 꼬인 기분을 담아 으르렁거렸다.
드라고니아가 냉정하게 짚는다.
―무리한 간섭으로 환영의 증폭도가 줄었다. 앞으로 이십여 미터, 단숨에 돌파한다고 마음먹고 힘을 줘 봐! 이 정도면 바로 꿰뚫고 지나갈 수 있어!
그 말에 따르면서도 투란은 슬쩍 물었다.
‘실제로 몇 미터인데?’
―10미터.
‘썩을.’
백여 미터처럼 여기게 해 준다는 환영은 확실히 약화한 듯했지만, 정작 거인의 손에 밀린 투란은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한 셈이었다. 그 상황에 짜증을 내면서도 투란은 냅다 앞으로 주먹을 내질렀고, 주먹으로부터 격동을 뿜어냈다.
우르릉.
격동이 닿은 풍경이 모래로 변해 사라졌다.
골고루 짓이겨진 탓에 갑작스럽게 열린 모래 동굴처럼 뚫린 길은 깔끔하게 십여 미터 너머를 보여 줬고 투란은 발목을 순식간에 카프리곤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단숨에 그 간격을 돌파했다.
뽀각.
발굽과 바닥의 견고함이 만나면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지금, 부러진 게 네 발목이냐?
‘아니거든?’
투란은 다시 사람의 발목으로 변화시키면서 발가락 끝으로 디뎠던 곳을 긁었다.
금이 가고 살짝 뜬 파편이 된 바닥의 부스러기가 발가락을 따라 흩어졌다.
이는 투란을 흠칫하게 했고 드라고니아가 신속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게 했다.
―모래의 영역이 아니다! 확실히 수호군단과 몬스터 패거리는 넘었어. 주의해라, 여기서부터는…….
“불이야! 왜 불이지?”
다 듣기도 전에 변해 버린 광경을 놓고 투란이 버럭 소리쳤다.
불길이 바닥을 붉게 물들이면서 치솟았고 투란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고니아는 투란에게 재빨리 요구했다.
―아픈 척해라! 뜨거운 척해!
“뭐?”
투란으로서는 이 무슨 헛소리인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잠깐 주춤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뜨겁게 몰아닥치던 불길은 순식간에 서리를 흩날리는 한파(寒波)로 물든 바람으로 돌변해 버렸다. 갑작스럽게 새빨갛던 불길이 새하얀 서리 바람으로 격변해 버리면서 닥쳐오는 차가움이 투란을 덮쳐 와 그대로 얼음덩어리를 만들려 하는 셈!
“뭔 일이냐고오오!”
버럭 소리치면서도 투란은 더욱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고, 가차 없이 격동을 일으키며 맞서 갔다.
서리 바람은 곧 투명해졌고 투명한 물결처럼 흔들거리다가 사라졌다.
다시 불길이 일어나는 광경이 펼쳐지는 대신, 주변의 풍경이 요동치면서 투란 앞의 한 지점에 뭉쳐 들다가 퍼져 나오는 듯했다.
그 속에서 아주 살짝 선명하게 드러난 형체가 있었다.
“어? 야, 저거!”
―아크휠…….
투란이 본 것에 대해 드라고니아도 확실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더 뭔가 따지기 전에 투란은 냅다 손을 내밀며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거대한 격동이 투란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일렁이는 손의 형상을 그려 냈고, 그대로 변화하는 풍경을 움켜쥐고 짓이기듯이 뭉쳐 버렸다.
사라져 가던 형체, 원래는 완벽한 원형이었다가 지금은 몇 번 꼬인 뒤틀린 고리로 보이는 것이 꿈틀거리면서 기둥과 지붕만이 남겨진 풍경의 중심에서 나타났다.
하얗게 나풀거리는 끈, 투란에게 아크휠은 그런 끈으로 이뤄진 고리처럼 보였다.
사룡의 권능, 격동을 이용해 잠시 그 형체를 포착하고 꽉 누르면서 투란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부숴야 하나? 부숴도 되나? 부서지기는 하냐?’
성궤를 어떻게 하려고 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고대의 정령인지 아티팩트인지 헷갈리는 아크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룡의 격동, 비록 투란이 일으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 권능에도 아무런 피해 없이, 그저 광파변질이라는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 다시 힘을 쏟아 내는 듯한 기괴한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부술 수 있기는 하고? 풀어놓지는 말고, 아크휠의 영역을 줄이고 가둔다고 생각해 봐. 사룡이 호응해 주면 아크휠의 힘을 저 고리 모양 끈, 본체 안으로 몰아넣고 잠깐이라도 봉쇄할 수 있을 거다.
드라고니아가 말했고, 투란은 다른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 했다.
강렬한 격동 속에 아크휠이 주변에 뿌려 내던 무지갯빛을 끈 안으로, 고리 안쪽으로만 축소하는 듯했다. 그대로 유지되면 공중에 떠 있는 이상한 마법의 끈이 될 듯했는데, 그런 아크휠의 안에서 불쑥 흘러나온 검은 형체가 사룡의 격동을 물러서게 했다.
그 느낌은 투란에게 낯설면서도 당연했다.
사룡의 힘은 당연하게 새로 생겨난 검은 형체…… 작고 가냘픈 손목을 존중해서 물러서야 할 듯했다.
‘이건 또 왜 이래? 젠장, 지금 저 끈을 풀어 줄 수는…… 어?’
갑작스러운 빛의 맥동이 투란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사룡이 본능적으로 저 기묘한 손목의 형체를 존중하듯, 아크휠 또한 그 힘의 영역을 축소하고 있었다. 퍼져 가려던 빛의 파동이 얌전히 고리 안으로 응축되면서 무지갯빛 끈이 선명해지는 대신에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지우고 있던 것.
―저건…… 누구지?
드라고니아는 손목이 팔로, 어깨로 이어지면서 차분하게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내는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투란도 궁금했다.
아크휠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것이니, 저 아티팩트인가 정령인가는 당연히 존중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투란이 삼켜 버린 사룡은 대체 왜인가?
본능 속에 각인된 이 존중은 대체 뭔가?
그러는 어느 순간부터 사방의 풍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여섯 개의 기둥이 뚜렷하게 형태를 갖추며 주변을 둘러쌌고, 거기 얹힌 지붕이 아담한 자태를 드러냈다. 기둥 바깥쪽으로 가득했던 수호군단, 몬스터와 병사들의 형체를 대신해서 숲과 산을 축소한 듯한 정원의 풍경이 환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투란은 아크휠을 팔찌처럼 손에 건 그림자 여인이 한쪽으로 사뿐사뿐 걷는 광경을 봐야 했다. 더불어 그 여인이 외치는 말도 들었는데…….
‘이거 사념전언?’
―그러네?
투란만큼이나 뚱하니 드라고니아가 웅얼거렸다.
여인은 ‘투아란’이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답도 사념의 파동을 통해 선명하게 들려왔다.
‘엘카야’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