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6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59)
아크휠이 번뜩였다.
회색의 형상 위로 다채로운 광채가 맺혀졌다.
시커먼 얼굴의 구멍이 뒤틀리며 그 광채가 사라졌다.
다시 아크휠의 끈 모양 위로 무지갯빛이 세차게 번뜩였다.
회색의 형상이 온갖 색채의 경연장처럼 물들어 버린 듯한 순간, 그 얼굴의 구멍이 뒤틀리며 광채가 소용돌이처럼 맴돌며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결국 몇 번의 번쩍임, 미친 듯한 시커먼 구멍의 대결은 ‘엘카야’가 검은 그림자의 형체로 되돌아가다가 다시 칠해지다가 하는데…….
‘싸우는 건가?’
멍하니, 뭘 할 수가 없어 구경꾼이 된 투란은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크휠이 회색의 형상인 ‘엘카야’를 열심히 채색하려 했지만 ‘엘카야’는 그 모습을 거짓이라면서 지우려 했다. 그 결과 아크휠은 다시 얌전히 손목에 걸려 늘어진 끈 모양인데, 색채는 하얗게 유지되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싸워서 ‘엘카야’가 이긴 듯하지만, 그렇다고 아크휠이 힘을 잃고 늘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정원의 풍경, 저 환영은 회색의 형상을 채색하고 남은 광채들이 더욱 짙게 물들여서 한층 더 현실적인 실체처럼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투란이 보기에 아크휠에게 회색의 형상인 ‘엘카야’를 그려 내는 것은 마지막 남은 놀잇감처럼 보였다. 왜 ‘엘카야’가 그것을 거부하는가는…… 트루세이어니까 싫어한다는 간단한 생각으로 납득해 버릴 수 있었고.
―어이없지만,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
한숨처럼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공감해 주고 있었다.
쓴웃음을 꾹 누르면서 투란은 신중하고 진지하게, 아크휠이나 ‘엘카야’가 눈치채지 않도록 소리 없이 물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성궤가…… 어디 있는 거야? 바닥 파야 하나?’
둘이 다투는 틈에, 주변에 전혀 관심 없는 사이에 해치우고 튀자는 마음가짐이 한가득 담긴 말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투란이 여기서 최초의 트루세이어와 빛의 정령인지 아티팩트인지 모를 아크휠 사이의 툭탁거림을 감상하며 멀뚱거릴 까닭이 전혀 없잖은가. 오로지 이 자리에 오게 된 원인, 모래왕을 맹약으로 묶고 있는 성궤만 해결하면 당장 작별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인데!
―마법의 궤짝 따위는 전혀 없다. 이 기둥 사이에 있는 거라고는 저 아크휠뿐이야. 강대한 마력을 극단적일 정도로 섬세하게 휘두르면서 과거의 환영으로 모래 가득한 시체 주머니를 덧씌워서 모래왕을 돕는…… 트루세이어까지 본래 성질 그대로 재현하려는 미친 녀석뿐이란 거지.
드라고니아가 굉장히 비관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왠지 자신의 낯빛이 썩는다는 기분 속에서 투란은 발아래를 흘깃했다.
‘그럼, 이 바닥을 파야 하겠네? 설마 저 지붕을 깨면 그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일은 없겠지?’
드라고니아가 살짝 움찔하다가 바로 대답한다.
―기둥과 지붕은 따로 나눠 있지 않아. 저게…… 한 덩어리야. 지붕을 깨나 기둥을 깨나 같겠다만, 깨뜨려서 뭐 나올 것 같진 않군. 바닥은…… 모래왕의 힘, 그 권능이 가득해서 잘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듣다 보니 투란은 어딘가 한가한 분위기가 넘치는 상황인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온몸에서는 여전히 다가오는 것에 대비해서 사룡의 격동이 맴돌고 있었는데…… 모래왕이 발목까지 붙들려고 힘을 쓰는 것에 대항해서, 더욱 치명적인 어떤 것이 다가오면 단숨에 뿌리치고 날아오르며 기둥과 지붕을 모조리 날려 버릴 태세까지 갖춘 상태인 채로 하는 짓이 구경꾼이라니!
‘뭐든 좀 찾아내라고!’
투덜거리면서 투란도 사룡의 감각을 확장해서 주변을 관찰하고 탐색하기 위해 집중했다. 성궤라 들었음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목적에 충실한 셈이었다.
달리 보면 여태껏 투란이 이 자리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던 아크휠과 모래왕이 딴짓하는 사이를 노리는 셈이기도 했다.
한데 드라고니아는 더 이상 찾을 것이 없다는 듯, 생각에 골몰한 듯이 중얼거림을 잇고 있었다.
―어째서지? 여기에 오면 바로 알 것처럼 밀어 넣었잖아. 여기에 오지 못하도록 몬스터에다가 수호군단까지 동원해서 막기도 했어. 한데 도착하고 나니 왜 저 환영을…… 제대로 그려 내지도 못하는 환영을 들이대면서 투란 너를 냅두는 거지? 너한테 여기서 대체 뭘 하라는 걸까?
‘그래, 나도 그게 궁금…….’
한숨 쉬며 소리 없는 대꾸를 하려던 투란이 흠칫했다.
아크휠과 툭탁거리던 ‘엘카야’가 얼렁뚱땅 마무리를 짓는 듯 보였는데, 갑자기 하얀 끈이 감긴 검은 손을 투란에게 내밀고 있었다. 손잡으라는 동작이 아니라 손가락질하는 모습이었고, 회색의 윤곽을 드리운 검은 얼굴에서 일렁거리는 거품 같은 파문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너는 누구냐? 어째서 샌디아(Sandia)의 힘을, 용의 이름을 허락받은 드레이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냐? 너는…… 그림 투아란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황스러운 기분이 무럭무럭 투란의 배 속을 채우며 치솟아 올랐다.
“샌디아?”
―샌드(Sand)의 애칭인가? 설마 더스크라이더를 저리 부르는……?
드라고니아도 투란만큼 당황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지금 투란이 몸에 두른 격동을 두고 하는 말임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잖은가. 게다가 ‘엘카야’는 손가락을 당겨진 활처럼 투란에게 겨냥한 채로 ‘샌디아’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룡좌. 용의 이름을 허락받고 그에 어울리는 화신의 형상을 갖추었기에 그리도 불린다. 그 힘이 드리우는 광경을 본 이들은 공포와 외경을 담아 더스크라이더라 부르기도 하지. 그 힘을, 권능을 사용하려 한다면 용의 맹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에게는 그림 투아란이 지녔던 그 맹약의 흔적이 없어. 그럼에도 너는 사룡좌의 권능을 두르고 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거지?”
“몬스터 로드, 처음 봐요?”
맹하니 듣던 투란은 뚱하니 중얼거렸다.
묻는 시늉은 했지만, ‘엘카야’의 장황한 물음에 대해 매우 당연한 일을 왜 모르냐고 그저 핀잔만 하는 웅얼거림이었다. 결국 ‘엘카야’가 사룡을 ‘샌디아’라는 괴이쩍은 애칭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고 나니 허탈한 기분도 꽤 담긴 볼멘소리이기도 했다.
‘엘카야’가 검은 얼굴을 흔들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대체 저런 검은 형체 속에서 어떻게 사람 목소리를 내는가 의아할 지경인데 거기에 감성까지 풍부하게 실은 채로 외친다.
“몬스터 로드는! 뒤틀린 섭리의 그림자를 거짓된 형상으로 두르고 날뛰는 자! 용의 맹약으로 닿아야 할 권능을 사용할 수 없어! 사룡은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아! 그림 투아란이 아님에도 왜 네가 그런…….”
울컥, 투란은 갑자기 울화가 치솟았다.
“몬스터 로드라고! 옛날 옛날 옛날, 천 년인지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 모를 옛날 옛적에 살다 죽었다는 드래곤 로드 그림 투아란보다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태어난 몬스터 로드, 투란! 카엘도 아니고 아란도 아니고 그란도 아니고 투란! 사룡은 내가 봉인째로 삼켜 버렸어! 삼킨 몬스터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몬스터 로드잖아!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야앗!”
도대체 왜 여기 와서 투란이 저런 이상한 그림자, 트루세이어에게 추궁받아야 한단 말인가. 트루세이어란 것을 염두에 두다 보니 울화를 터뜨리면서도 몇 마디 말을 굉장히 조심해서 피하는 몰골로 대꾸하기까지 하고!
내친김에 참을 수 없는 몇 마디가 더 투란의 입술을 너머 튀어 나갔다.
“이상한 거는 새카만 너잖아! 넌 대체 뭐냐고! 너의 진실, 너의 정체는 대체 뭐냔 말이야! 왜 나한테 뭐라 그래!”
투란이 너무 대담했던가, ‘엘카야’가 주춤했고 그 손목에 걸린 아크휠이 광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얌전한 무지갯빛 광채가 아니라, 단숨에 불을 지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며 번져오는 빛의 파도였다.
투란이 일으키는 격동이 그 빛의 파도와 만다며 경계를 만들었다.
‘으앗! 실수했나?’
투란은 너무 과감하게 질러 댔나 살짝 후회했다.
―잘한 것 같다만?
드라고니아는 아주 흥미로운 듯이 말했다.
‘뭐? 어?’
무슨 말인가 흠칫하면서도 투란은 곧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엘카야’의 변화를 깨닫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카야’는 자신의 몸을 감싸며…… 시커먼 형체인 탓에 두 팔로 감싼 모습이 살짝 두드러진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 보일 지경인 몰골로 중얼거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은…… 거짓이야. 나는 엘카야…… 내가 엘카야? 아크휠,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이건 내가…… 내가 나 맞아? 여긴 어디지? 왜 이러고 있지? 아크휠, 너는…… 엘카야에게서 떨어질 수 없잖아? 여긴 너 혼자 있나? 이 몸은…… 몸인가?”
주변을 채우는 빛의 파도, 그 중심에 선 ‘엘카야’.
투란의 눈이 불안하게 껌벅였다.
‘야, 미친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이 미쳐도 미친 짐승보다 위험한 것이 상식!
하물며 아크휠을 휘둘러 대는 괴이한 그림자 같은 저 ‘엘카야’가 미친다면 이 모래 미궁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인가…….
―멀쩡한 트루세이어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걸?
드라고니아는 오히려 걱정을 덜었다는 말투였다.
‘야, 멀쩡하지 않은 트루세이어가 왜 나은 건데? 게다가 저 끄나풀, 저거 왜 저리 발광(發狂)하냐고!’
―음? 분명 발광(發光)하는 중이다만…… 어떤 변질을 일으키려는가는…… 투란! 뭐든 해라! 대항해!
정답게 상황을 따져 보려던 대화는 격한 으르렁거림으로 이어져야 했다.
‘너도 미친 것 같아! 늦었잖아!’
―투덜거리지 말고!
투란이 이리 다급한 까닭은 격동으로 아크휠의 광파가 스며드는 탓이었다.
흔들고 뒤틀고 밀어내려 해도,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빛이 격동의 영역 안으로 스며들며 밝히고 채워 넣고 있었다. 허공조차 물들이려는 듯한 그 은은함, 끈질김, 치밀함이 마치 사룡의 권능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언제라도 침투해서 번질 수 있었다고 자랑하는 듯했다.
그 위협을, 그 빛이 몸에 닿을 때의 결과를 투란은 사룡이 마음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며 비춰 주는 감각을 통해 훤히 엿볼 수가 있었다. 살갗부터 녹아내리고 흩어지면서 아름답게 뚝뚝 떨어지다가 빗방울처럼 흩날리는 진물이 돼 버린다는 것!
덕분에 오한(惡寒)이 투란의 등골을 쭈뼛하게 할 지경이다.
―젠장, 생각해 보니 아크휠이 사룡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네. 모래왕이랑 저 물건, 앙트가 사막이 되기 전부터 사룡이랑 어울리던 것들이잖아!
드라고니아도 사룡의 권능을 무시하는 듯한 빛의 파도에 충격받은 듯, 뒤늦게 깨달은 듯이 한탄했다. 한데 투란은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서 이 의견에 반박이 치솟는 것도 느꼈다.
‘아니, 이건…….’
―뭐? 사룡이 허락하고 있다고? 그게 무슨!
투란의 느낌, 그 감지를 공유받자마자 드라고니아가 당황했다.
투란은 그 느낌을 조금 더 깊이 파헤쳤고, 곧바로 사룡으로부터 대답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말이 아니라 순수한 감각적 지각(知覺)을 통해 알려 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본능적인 대응이 이뤄져야 하는 까닭.
‘약속, 용의 화신으로서 한 약속. 아크휠이 저러는 까닭은 사룡이, 더스크라이더가 투아란이 아닌 다른 자에게 휘둘릴 때이니까. 드래곤의 숙적이 사룡을 농락할 때이니까……?’
아크휠에게 사룡을 제압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용의 화신, 용의 이름을 허락받은 자로서 사룡은 그 권한을 존중해야 했고 아크휠의 침투를 격동으로 뒤틀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몬스터 로드답게 몬스터의 본능을 휘둘러야지! 네가 휘둘리면 어쩌자는 거야!
상황을 알자마자 드라고니아가 바로 으르렁거렸다.
투란도 그 의견에 적극 동감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사룡의 본능을 지배하기 위해 다툴 시간이 없잖은가!
당장 스며 오는 광파는 번개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차분히 마른 헝겊을 스며 오는 물결만큼은 빨랐다! 사룡의 격동이 이뤄 낸 장막은 완벽하게 마른 헝겊 노릇을 하는 중이고, 용의 화신답게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썩을 것이!’
‘천칭’이 투란의 울화에 호응하듯 맥동했다.
투란은 밀려오는 빛의 파도를 노려봤고, 자신의 안에서 그에 대항하는 빛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투란의 눈가에 뱀의 비늘이 번졌다.
투란의 눈썹 언저리가 황금빛 털로 채워졌다.
등골과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살랑이는 촉수 가닥이 외투처럼 둘러졌다.
밀려오던 빛의 파도를 향해 투란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 보랏빛이 영롱하게 눈동자에 맺히며 붉은 광채를 흘려 냈다.
빛의 파도 속에 이질적인 편광(偏光)이 스며들었다.
아크휠의 광파가 고스란히 새겨진 석재(石材)가 투란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석화(石化)?
드라고니아가 어이없어하면서도 감탄한 듯 되뇌었다.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