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7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63)
‘좋아, 걸어가자!’
드러누운 채로 한 줌의 모래를 손에 쥐어 눈가로 들어 올리면서 투란이 중얼거렸다.
소리 없는 그 중얼거림에 드라고니아는 곧바로 기겁한 듯이 되묻는다.
―뭐? 얀마! 그게 무슨 뜬금없는……!
푸스슥, 바람결에 따라 흘려 낸 모래는 사막의 부드러움을 간직한 것처럼, 섬세하고 고운 먼지 가루처럼 날려갔다.
입가에도 닿는 그 흩날림을 보며 투란이 말을 잇는다.
‘데저트 데몬은 모래왕이 챙겨 갔나? 줬다 뺏다니…….’
―그게 그렇게 줬다 뺏고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거든? 그저 모래왕의 지원을 잃고 형체가 모호하게 된 것뿐이다.
완전히 말을 돌리는 수작에 드라고니아가 한숨짓는 것처럼 대꾸를 하고 말았다.
‘잉? 뭔 소리야?’
투란이 다시 손을 펼치며 살짝 얼룩진 모래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되물었다. 데저트 데몬이 어떻게든 남겨져 있다면 이 손에 뭔가 있을 듯한데 없어 이상하다는 듯한 태도였고, 드라고니아가 혀를 차는 시늉과 함께 바로 답을 한다.
―제대로 말해 줄 여유가 없었다만, 그래도 눈치는 채야 할 것 아니냐? 정령이자 아티팩트, 그러니까 소유자의 마력을 통해 성장하고 유지되는 경우라고 말이야. 정령의 계약 또한 그런 기반을 지녔으니까. 아티팩트가 된 정령일지라도 처음 건네받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인 형태이고, 최초의 씨앗일 뿐이다. 모래왕이 지원을 했기에 데저트 데몬이 미궁 안에서 완성된 형태와 기능을 잠시 보인 것뿐이고, 그 지원이 사라진 다음에는 밑바탕부터 네가 키워야 한단 말이지.
‘다른 정령수 키웠을 때처럼? 휘드라곤이나 셰이아처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키워진 채가 아니라?’
―그래, 전혀 키워지지 않은 최초의 씨앗부터, 당장 형태를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서서히 키워 나가야 해.
‘야,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뭘 어떻게 키워?’
―테라트에게 데저트 데몬을 지원하도록 해 봐. 모래왕만큼 또렷하게는 아니라더라도 네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정도까지는 형태를 갖출 수 있을 테니까.
‘으? 테라트!’
핀잔하는 말에 투란이 투덜거리듯이 흙의 정령수를 불렀다.
곧바로 투란의 손에 들러붙은 모래 얼룩이 꿈틀거렸고 새끼손톱 끝자락 같은 크기로 뭉쳐 들었다. 부서지고 흐르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작은 손톱 조각을 보며 투란은 데저트 데몬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작고 여려서 희미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얼굴에 덧씌우고 온몸을 감쌌던 데저트 데몬이었다.
‘이거…… 언제 그때만큼 키우냐?’
―한 사오 년?
‘야, 짧게 잡은 거야? 길게 잡은 거야?’
―물론 길게 잡았지. 집중해서 키운다면 줄어들 기간이다만.
‘너한테 맡기마! 할 수 있지?’
―이 게으른 녀석이!
‘그편이 너도 좋잖아?’
히죽거리면서 투란은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와 다리가 모래에 찰싹 들러붙은 것처럼, 혹은 반쯤 파묻힌 것처럼 놓인 꼴을 보면서 투란은 윗몸에 들러붙은 모래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살갗에 닿는 순간의 부드러움과 다르게 손으로 문지르면 어째서인가 까칠한, 부드러운 채로 까칠한 묘한 느낌이 짙어졌다.
그 느낌을 잠시 음미하듯이 눈을 감은 채로 투란은 데저트 데몬에 대해 잊어 갔다.
더불어 모래 미궁과 모래 망령, 모래왕에 얽힌 모든 일을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잠시 잊기 위해서도 투란은 노력했다.
드라고니아는 왠지 진지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투란의 태도에 핀잔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고요한 사막의 풍경 속에 덩그러니 떨궈진 돌멩이처럼 앉아 있던 투란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맨살에 붙어 얼룩져 있던 모래가 밀려나는 대신에 두툼해지면서 옷감처럼 번져갔다.
―샌드 리저드?
드라고니아가 바로 갸웃해서 중얼거렸다.
후욱, 숨을 골라 내쉬면서 투란은 가만히 몸을 덮는 모래를 확인했다.
찰싹 달라붙은 옷감처럼, 마법의 무장처럼 모래는 투란을 감싸고 덮었다.
모래로 이뤄진 차림새를 하고 투란은 이리저리 자신을 둘러봤다.
버릇처럼 가죽 반바지만 입고 훌렁 벗은 꼴에서 벗어나 제법 누런빛의 까칠한 옷을 걸친 모습을 기대했는데, 샌드 리저드의 능력으로 두른 모래는 알몸 위에 두툼한 칠을 한 듯한 몰골만 꾸몄을 뿐이었다.
‘이놈, 칼도 창도 만드는 녀석이!’
살짝 울컥한 투란의 기분이 또렷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드라고니아가 이제는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무장 생성의 주문만 써도 될 일을 굳이 몬스터의 능력을 활용하겠다고 하니 괜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음? 잠깐만.’
투란은 대답보다 먼저 두 손, 두 발에 집중하면서 샌드 리저드의 형상을 더욱 뚜렷하게 몸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래를 두른 날카로운 리저드의 손톱, 발톱이 형성되면서 머리 모양도 사람이 아닌 리저드의 모습과 닮아 갔다. 덩달아 등골을 타고 두툼한 꼬리까지 모래를 삼키듯이 돋아났다.
그리고 잠시 투란은 샌드 리저드의 형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꼼짝도 않았다.
호기심이 짙어졌지만 드라고니아는 집중하는 투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투란이 꿈틀거리며 손끝 발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래가 흔들거리며 샌드 리저드의 형상을 덮듯이 두텁고 굴직하게 휘감았다. 금방 꼬리가 뭉클거리며 등으로 밀려 올라가며 배낭처럼 뭉쳤고 손톱 발톱의 날카로움이 두툼한 장갑이나 신발의 마무리처럼 뭉툭해졌다. 샌드 리저드의 비늘 무늬에 따라 맺혀 뭉친 듯했던 모래가 조금 더 부드럽게 퍼져 나가며 비늘 가죽을 제련해서 이어 놓은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어느새 머리 부분도 샌드 리저드 머리 가죽을 벗겨 만든 투구를 쓴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파핫!
입으로 참았던 숨을 토해 내는 투란은 웃고 있었다.
‘좋아, 이제 좀 마음대로 움직이네.’
―샌드 리저드는 그런 옷차림은 만들지 않았잖아? 왜 굳이…….
‘칼과 방패를 만들고 모래는 그냥 처발라 놨지. 뭐, 굳이 인간이 입는 모양을 갖추지 않아도 쌓아 뭉치고 붙여만 놔도 효과는 같으니까. 영리한 짓이지. 사람이 할 짓은 아니잖아? 벌거숭이 꼴로 모래 바른 몸매를 드러내면 미친놈이라고.’
히힛 하면서 투란이 떠들었다.
그 소리 없는 말에 드라고니아는 한숨부터 내쉬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그래서 버젓이 쓸 수 있는 마법을 옆으로 치워 놓고 순수하게 몬스터 로드답게 몬스터의 능력만으로 옷차림과 무장을 만들어서 어쩌려고? 그대로 사막을 걸어 나가겠다고? 아까 하던 얘기가 그런 뜻이었냐?
‘음, 뭐…… 사실 아직 얼떨떨하니까.’
―얼떨떨하다니?
‘깨자마자 모래 미궁이고 모래왕이고 엮이다 보니까, 내가 정말 일 년도 아니고 이 년씩이나 자고 있었나 의아하고 이상하거든. 뭐랄까, 그렇게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중이니까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이 사막에서 제법 써먹을 수 있는 몬스터라면 이 샌드 리저드잖아. 사룡은 뭔가 좀 험악하게 사방을 때려 부수는 기분이라 좀 그렇고…… 남들 앞에서 마구 휘두를 능력은 아닌 것 같고, 뭐 그렇게 저렇게 생각하다 보니 샌드 리저드 정도가 그럴듯하잖아. 사막을 걷기에 딱 어울리고.’
중얼중얼 변명처럼 늘어놓으면서 투란은 사박사박 모래를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발아래에서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는 샌드 리저드의 능력으로 끌어모은 모래 차림새에 섞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내딛는 걸음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도 않았다.
가죽 장화 모양의 모래가 모래를 밟은 탓인 것처럼.
그런 투란의 기분을, 그 바탕이 되는 기억을 드라고니아는 금방 공유받을 수 있었다. 그랑츄의 발목 아래를 얻어 춤추는 산맥 깊은 곳을 걷기 시작할 때의 뿌듯함…… 조금 더 강해져서 편해졌다는 즐거움.
거대한 힘을 휘두를 때의 감각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사물을 대하는 느낌을 투란이 즐기고 있다…… 이를 알고 드라고니아는 쓴웃음 짓는 낌새만 살짝 흘리고 더 뭐라 하지 않았다.
모래왕이 대사막에 거대한 영향력을 드리웠으면서도 결국은 지나가던 몬스터 로드나 다름없는 투란에게, 운명의 손길이 인도한 낯선 이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던 것과 다르게 투란은 작고 하찮아 보이는 몬스터의 힘과 능력으로 이 사막을 헤쳐 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가볍게 즐길 수도 있는 것.
전설적인 존재의 무게 따위는 저리 내버리고 투란은 지금 한없이 가볍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을 뿐이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멈춰 있던 몸을 푸는 것처럼.
‘멀구나?’
걷고 나서 얼마 지나기도 전에 투란은 맹하니 묻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빛 달빛이 하염없이 반짝이며 비춰 주는 사막은 서늘하면서도 광막하게, 멀리 아른거리는 지평선 너머가 더 이상 모래가 아니란 것을 알려 주면서도 뻔뻔한 광활함을 과시할 뿐이었다.
그 위에 발자국이라도 남기고 걸었다면 얼마나 왔는가 돌아보면서 많이 걸었다는 뿌듯함이라도 느끼겠지만, 투란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돌아봐도 뭔가 제자리에서 멀뚱거리고 있었잖나 싶은 생각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해서 드라고니아는 피식거리는 말투로 투란의 짧으면서도 긴 소감이 담긴 물음에 느릿느릿 답을 해 준다.
―멀지. 그나마 가장 빠른 방향일 뿐이지. 아크휠의 환영이 보여 줬던 것은 사막이 아닌 곳을 사막처럼 꾸민 것이 아니었잖아. 그저 방향을 알지 못하게 하고 사막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풍경을 보여 줬을 뿐이었지. 힘내 봐,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닷새나 엿새 정도면 유적 도시가 어렴풋이 보일 테니까.
‘그래, 나들이하기 좋은 거리네. 그런데 말이야, 모래 미궁도 없고 모래왕도 간섭하지 않는 사막인데 뭐 이렇게 다니는 것들이 없냐? 녹원이 안 보여도 냄새 정도는 바람결에 실려 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까운 곳에 녹원이 없으니까 냄새도 없지. 게다가…… 아직 눈치 못 챈 모양인데, 모래 미궁이 받쳐 올리던 부분이 없어지면서 지금 이곳저곳에서 큰 구덩이가 생기면서 사막 전체에 큰 변화가 있는 중이야. 그나마 너는 그 변화가 적은 곳으로 모래왕이 밀어내 줬고. 가는 길에 외곽으로 피신하는 뭔가와 만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은 하고. 모래 지렁이 같은 놈이 너처럼 조그만 것이라도 잡아먹겠다고 수백 미터를 작정하고 가로질러 오기도 했잖아.
‘음…… 뛰어 볼까?’
터벅거리며 듣던 투란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 지루함을 떨쳐 내기 위한 궁리를 해 봤다. 아무 변화 없이 계속 걷는 것은 잠깐 사이에 아주 질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가는 속도를 올린다면 뭔가 새로운 기분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모래를 두드리는 발걸음이 커지면, 뭐든 튀어나오기 쉽기는 하겠군. 그러면 확실히 지금처럼 심심하지는 않을지도?
슬그머니 권하는 듯한 드라고니아였다.
투란은 그 속내를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뛰다가 심심해지면 투란이 날아오를 것이고, 그렇게 날면서도 밤하늘 아래의 누런 사막이 그늘진 듯한 풍경만 보면 한층 더 답답해서 더욱 빠르게……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유적 도시에 도착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
쓴웃음이 절로 나게 하는 속셈이지만, 투란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이 텅 빈 듯한 모래의 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어 버리는 듯하니까.
걸음마다 뭐가 나올지 몰라 속이 바싹바싹 마르는 듯했던 곳과는 전혀 다르지만, 멍청한 기분이 싫어져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은 뭐가 튀어나오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문득 투란은 사막의 풍속에 대해 키유나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사막 주민은 노래를 하고 걷는다고 했던가?’
―자기한테만 들리는 노래라고 했지. 누군가를 찾을 때는 방어 태세를 갖춘 다음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말이야.
드라고니아가 조금 더 보충하듯 말했다.
투란은 그 말속에서 ‘방어 태세’란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다.
‘시끄럽게 굴면, 심심찮게 뭐가 나온다는 뜻이겠지?’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뭐, 여기서 뭐가 나와 봐야 사룡만 하겠어?’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잖아.
‘음? 으흠…… 도망칠 준비를 잘하면 되겠지.’
―야! 그냥 드레이크의 날개를 펴고 바로 유적 도시로 가라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구경 좀 하고 가자고.’
―이 사막에 대체 뭔 볼 것이 있다고! 볼만한 것은 몽땅 지겨울 정도로 봤잖아!
‘아니지, 볼만한 것이 아니라…… 이 사막에서 만나면 곤란한 위험한 것들만 지겹게 보고 겪었지! 난 만만하고 쉬운 놈을 원해! 그런 녀석을 만나 보고 싶단 말이야! 샌드 리저드보다 더 쉬운 놈들을 말이야!’
―왜? 그런 것을 만나 어쩌겠다는 거냐?
‘음? 글쎄…… 있기는 한가?’
키득거리면서 투란은 달리기 시작했다.
발아래로 제법 착실한 울림이 퍼져 나가도록, 세차게 모래를 밟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