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7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70)
‘뭐 이런 머저리 같은…….’
어처구니없었지만 투란은 가만히 칼 맞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생각뿐 아니라 몸도 그 마음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이 맺혀 너울거리는 칼날을 향해 대뜸 완드를 들이댄 것은 생각보다는 그냥 반응했을 뿐이었다. 귓가에 ‘오빠, 아냐! 이 사람은……!’이라고 떠드는 말이 스쳐 가는 것도 투란은 뒤늦게 느낄 뿐이었다.
그 때문인가, 예상하기 힘든 결과가 나왔다.
뽀각, 사륵.
완드가 칼날에 찍혔고, 불꽃이 훅 날려진 듯이 사라졌다.
“음?”
“허엇? 이, 이놈 무슨 짓을!”
투란이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칼을 휘두른 쪽도 당황해서 주춤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투란을 옆을 지나 둘 사이를 가로막듯 선 라카샤가 다시 외치는데,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나지막하고 명확하게 들리도록 애쓰는 말투였다.
“그만! 아니라고, 오빠! 이 사람은 날 도왔다고!”
“뭐? 라카샤, 저놈이 완드를…….”
“빼앗은 거야. 날 쫓던 사람들한테서 빼앗고 물리쳤어.”
“물리쳐? 그놈들이 도망치던 중이라고? 날 막으러 몰려나온 것이 아니라?”
살짝 당황한 듯한 라카샤의 오빠를 라카샤의 어깨 너머로 흘깃하고 투란은 빈 손으로 벽을 짚었다. 짚자마자 움켜쥐듯이 힘을 주고 바로 벽 위로 튀어 오르다가 한 발로 벽을 밟으며 앉았던 자리의 반대쪽 건물 위로 튕겨 올라가는 투란이었다. 그리고.
“오누이끼리 얘기 잘해 봐요. 오해는 잘 풀렸으면 좋겠네. 아무튼 난 바빠서 이만!”
대충 흘리는 말을 남겨 놓고 살짝 칼날에 찍힌 자국이 선명한 완드를 든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시늉까지 하며 투란은 냉큼 둘의 시야에서 몸을 감추고 네모난 건물들의 지붕, 옥상을 건너고 가로질러 뛰었다.
―흥미롭군, 흥미로워. 하위 마법에는 확실히 통하는 디스펠이 각인된 완드가 맞다만, 대체 왜 이렇게 물러터졌지? 각인과 함께 내구성이나 견고함이 자연스럽게 부여되기 마련인데…….
내달리는 투란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이거 쉽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아니, 쉽게 고칠 수는 있나?’
투란도 들리는 말 따위는 무시하듯이 되는대로 묻고 있었다.
드라고니아가 살짝 그 물음에 관심이 생긴 듯 대답한다.
―글쎄다, 디스펠 각인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닌 데다가…… 그 완드, 아무래도 고대 유물인 것 같거든. 지금은 아예 사라졌다고 봐도 좋은 고대 계파의 마법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라면, 이제 와서 다시 만들지도 못할 테고 고치기도 어려울걸? 쉽게 말해서 요즘 세대의 마법에는 별 효과를 발휘 못 하는 완드란 말이지.
‘뭔 소리야? 아까 그 칼의 마법은 훅 하고 바로 날렸잖아.’
―그 칼, 그것도 고대 유물이었으니까. 아마 완드랑 같은 시절의 물품일 거야.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여기 로즈벨은 앙트 왕국의 북부에 자리 잡은 로젠베람 왕국에 속했을 거야. 그 칼은 로젠베람 왕국의 의장병에게 지급되는 의장용 도구였을 거야. 간단히 추측하자면 이 마을 주변의 폐허를 파헤치다가 나온 고대의 하찮은 마도구란 얘기지.
‘하찮다라…….’
투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적한 곳에 살짝 내려서 앉으며 그 하찮은 완드를 내려다보니,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푹 패인 칼자국이 선명하지만 쩍쩍 갈라질 낌새는 없었다. 만약 투란이 오러를 부여해 완드로 살짝 잔재주를 부렸다면 불이 꺼진 칼을 단숨에 빼앗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물론 처음 이 완드를 들고 나타난 녀석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그 마법 표식이 새겨진 원판! 그 조그만 원판도 그럼 고대 유물이었겠네?’
―아마 그럴걸. 걸려 있는 마법은 마력 방패라든가 마력 장벽을 펼치고 밀어내기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만, 역시 고대의 술식 형태가 많이 엿보였지. 그리고 그건 아마 칼이나 완드랑 다르게 그 여자만…… 아니, 그 오빠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아무튼 특별한 혈통을 계승한 경우에만 작동시킬 수 있었을 거야.
‘응? 혈통이라니? 무슨 말이야?’
―로젠베람은 혈족이 강한 세력을 이룬 나라였다. 귀족 계층에서는 자신들의 혈통이 아닌 자가 자신들이 계발(啓發)한 힘을 계승(繼承)하거나 부여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지. 그래서 그들이 남긴 유물은 그들의 혈통을 꽤 짙게 물려받은 경우가 아니면 쓸 수 없다고 했어. 거기서 예외로 취급되는 것이 의장병의 도구로 지급되는 그 칼이라든가, 법의 집행자에게 지급된다는 디스펠 완드 정도야.
가만히 듣던 투란은 맹해졌다.
앙트의 북쪽이라서 앙트에 속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나라의 유적이었던 도시…… 그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하더니 주변을 파서 나오는 물품이란 것도 예상하지 못한 성질머리라니.
‘신기한 나라였구나. 그렇다면 이 완드는 상아탑 마법사에게 꽤나 재미있는 실험 소재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만, 뭐야 팔아먹을 궁리라도 하는 거냐? 강도짓을 완전히 마무리 짓겠다는 거야?
‘아니, 그냥 이야깃거리지. 느닷없이 나타나서 로열클래스 들이대지 말라고 했잖아. 슬슬 이야기를 하면서 비컨을 이용해야지. 이 완드면 좋은 이야기 감이라고.’
드라고니아가 어이없어 핀잔했지만 투란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브린의 거처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온 티야 나겠지만 그래도 이 주변을 혼자 제법 둘러본 시늉을 할 참이었다. 그렇게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다가 투란이 갸웃하며 묻는다.
‘라카샤…… 아까 그 여자랑 오빠가 따라오지는 않았겠지?’
―음? 그쪽은…… 그 오빠란 자는 너도 그 패거리 중 한 명이라고 하면서 여자를, 자기 누이를 닦달하는데? 속지 말라고 말이야. 뭐, 딱히 여자가, 라카샤가 그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그 말은 그 오빠란 놈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날 찌르려 했단 말이네? 호오, 다음에 보면 스쳐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게 해 줘야겠군!’
―흐흠, 한데 라카샤란 여자도 너한테서 뭔가 묘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다? 별이 반짝이는 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나쁜 냄새라도 맡은 표정이랄까?
‘뭐? 나쁜 냄새?’
투란은 냉큼 자신의 팔뚝과 겨드랑이에 머리를 들이대며 킁킁거렸다.
모래바람에 시달린 탓에 아직도 짙은 모래 먼지의 자극만 코를 찌를 뿐이었다.
‘안 나잖아!’
그 꼴이 어이없는지 드라고니아가 살짝 투란의 시야에 라카샤의 표정을 비쳐 줬다.
―이런 표정이면 냄새 탓이라 할 만하잖아?
멈칫하면서 투란은 저편 높은 곳에서 프로브가 내려다보는 라카샤의 얼굴을 시야 구석에서 확인하며 살펴봤다.
직접 눈동자가 마주치지 않은 탓인가, 이번에는 별빛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대신 투란은 라카샤의 낯빛이 그 오빠란 작자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햇살에 그을린 오빠의 땀내 가득한 낯짝이랑 다르게 핏기가 맴도는 하얀 살갗이 다채로운 머리 색의 좋은 바탕처럼 보였다.
그리고 투란이 갸웃하는 사이, 라카샤사 갑작스럽게 높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는 것이 분명한데 묘하게 그 눈길은 프로브에게 닿는 듯했다. 이는 드라고니아도 살짝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시각으로 포착한 것은 아닐 텐데…… 순수하게 육감이 강한 경우의 인간이었나. 어쩌면 저 육감이 마법처럼 작용해서 네 영혼의 감각을 교란한 것일 수도 있겠군.
‘응? 영혼의……? 교란? 그런 것도 가능해?’
―난도 높고 오묘한 마법의 영역이지. 내가 문장 속에서 너에게 나를 감추는 마법이 그런 영역에 속한다. 어쩌면…… 그래서 너는 보고 나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영혼의 감각으로 포착하고 있다면, 오감의 영역이 아니라면 내가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니까.
‘호오? 너, 그런 영역이었단 말이지? 흐흠.’
투란은 빈틈이라도 찾은 척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리 없이 음흉한 척 말을 하면서도 투란은 도대체 저 라카샤가 어떤 경우인가 궁금했다. 키유나랑은 또 너무 다른 듯한데, 어쩌면 저 소녀 역시 마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품을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투란의 발걸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브린의 거처를 향해 내디뎌지고 있었다. 호기심은 호기심이고 당장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처럼…….
그 걸음과 함께 가벼운 마법이 흔적 없이 투란의 몸을 감싸며 펼쳐졌다.
두건 달린 망토가 자연스럽게 투란의 어깨를 덮으며 팔과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저편에서 툭탁거리던 차림새가 이편에서는 완전히 감춰진 셈이었다.
완드까지 망토 안쪽으로 숨긴 채로 두어 굽이를 돌아 투란은 브린의 거처, 그 문턱을 넘어섰다. 그 문턱을 지나는 순간.
―하? 어설픈 게으름뱅이 마법사 흉내를 내더니만…… 문턱에 알람을 걸어 놓을 줄은 안다는 건가.
드라고니아가 문턱 아래에서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경보의 마법, 탐지의 주문을 간파해 내며 냉소하듯 말했다.
투란은 마력의 감각이 한껏 오그라들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오러 센스가 발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이었지만 미리 계획한 마법에 대한 대책이었다.
브린이 자신의 거처에 뜻밖의 손님을 원치 않은 것처럼 투란도 갑작스럽게 자신이 간파당하지 않도록 이모저모로 미리 준비해 둔 대책을 발휘한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상식적인 상황에 준비된 계획이 적절히 쓰인 셈이기는 했다.
‘이것 참, 이렇게 통하니까 기분 좋네?’
―원래 통하는 거야! 그동안 너무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것들에게 휘둘렸을 뿐이라고!
소소한 대책이 통한 부분에 투란이 감동했고 드라고니아는 울화를 풀듯이 외쳤다.
투란이 두건 아래로 피식 웃을 때, 브린의 목소리가 조금 높게 귓가에 꽂혀 들었다.
“오랜만에 오신 손님이군. 이 근처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분인 듯한데, 무슨 일로 이 하찮은 마법 상점에 찾아오셨는가?”
가만히 두건을 젖혀 얼굴을 드러내면서 투란이 되묻는다.
“하찮은 마법 상점? 상아탑의 지부 아니었나? 꽤 작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아탑의 신호는 확실히 느꼈는데?”
이에 대해 브린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투란은 자신이 한 말이 브린의 빈틈을 찔렀다고 느꼈다.
“너 몇 살이냐?”
불쑥 튀어나온 브린의 말은 투란의 빈틈을 찌르고 있었다.
“어, 엥? 나 몇 살이냐고요?”
―응? 나이를 왜 묻지?
드라고니아도 뜻밖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가 당혹스러워했다.
브린이 어리둥절해서 어버버거리는 투란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혀를 차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그 차림새로 봐서는 굴하람 쪽은 아닌 것 같고, 켈바스 쪽인가? 그쪽이라면 어린 나이에도 오러 윌더의 역량을 갖추는 일이 종종 있다고 했지. 대삼림의 일족과 엮이면서 오러 마크가 오러 사인의 수준까지 확장되기도 한다고 말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아니, 전할 거면 오러의 기술이나 전할 것이지 말투까지 그 모양일 필요가 있냐? 어린 녀석이 뭔 할배처럼 떠드냐고. 아, 어린 녀석한테 나도 참…….”
투란을 향해 처음 던진 인삿말을 떠올린 듯, 그래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가려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끙끙거리는 태도인 채로 말을 흐리다가 멈추는 브린이었다. 그 둥글게 부푼 몸의 마법사를 보며 투란은 뭐라 말해야 하는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뚱보 아저씨, 대체 뭐라는 거야?’
이런 의문만 한층 더 짙어질 뿐이었다.
살짝 울컥한 투란의 기분과 달리 드라고니아는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브린의 이야기를 분석한 듯이 말한다.
―아무래도 이쪽 풍속과 연관이 있는 모양인데? 투란, 너처럼 어린 경우에는 이곳에서 너 같은 말투를 쓰지 않는다고, 네가 문턱을 넘어서 한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러니까 그 어긋남, 어색함에 대해서 브린이 마법사답게 통찰하고 지목한 것이 아닐까?
‘아냐!’
―그래, 그러니…… 엉? 아냐?
단호한 투란의 말이 예상 밖인지라 드라고니아가 당황했다.
그사이에 투란의 말문이 마침내 열렸다.
“로즈벨의 마법사는 말투를 빌미로 이방인에게서 한몫 챙기시려 하나? 이게 뭔가 내가 문턱을 넘을 때부터 알고 계셨나 본데, 제대로 된 가격을 불러 보시지요?”
“응? 아니, 내가 무슨 악덕 상인…… 이게 뭐야?”
브린이 투란의 냉정한 태도에 다시 뭐라 말하려다가 툭 던져져 오는 완드를 받아 들고는 흠칫했다. 칼자국이 선명한 완드, 뒤틀린 고목의 껍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섬세하게 스며 있는 마법의 각인을 브린은 어렵지 않게 바로 확인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투란의 담담하고 덤덤한 말이 이어진다.
“오는 길에 폐허 속에서 주웠지. 아직 쓸 수 있는가 없는가는 모르겠고, 마법사라면 적당히 값을 쳐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마도구가 맞잖소?”
“자네 정말 멀리서 왔나 보군. 이 근방 애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말투야.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기는 하군. 잠깐 기다려 봐.”
브린은 투란의 말투가 여전히 뭔가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보다는 완드 쪽에 더 흥미가 가는 듯이 한편의 서랍을 열고 뭔가 뒤척이며 끄집어내고 있었다. 얼핏 봐도 뭔가를 가늠하기 위한 마도구를 찾는 모습이었다.
그사이에 투란은 한층 강해진 비컨의 신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