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98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78)
겨우 다시 형태를 갖춘 모닥불 곁에 녀석이 누웠다.
모래가 넘쳐나는 폐허와 마을의 경계, 그 벽과 벽 사이에 돋아난 검불을 끌어모으고 모래 먼지 위에서 꺼져 가는 불씨의 먹이로 삼는 녀석의 모습은 잘 모르는 완드를 내밀며 위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익숙함이 가득했다.
‘정말 여기 사네?’
투란은 어이없어서 잠시 더 지켜봤다.
함께 패거리를 이뤘던 애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자는 척하던 녀석이 나직하게, 들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생각은 없는, 그저 자신의 신세에 대해 억울하고 분함을 표현할 뿐인 욕설이었다.
하지만 몰래 엿듣는 투란은 그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인 욕설 속에 담긴 이야기의 파편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쁜 년…… 은화 열 닢으로 속이다니…… 금화도 줄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갖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던 게…… 나도 로젠베람의 혈통인데…… 불의 고리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지? 고리야? 응? 고리야?”
이쯤에서 투란은 녀석이 뭘 찾는가 알아차렸고, 슬그머니 누운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몰래 다가갔고 이 녀석의 귀로는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움직였다. 덕분에 녀석은 자신의 등 뒤로 누가 쪼그리고 앉아 지켜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로 모닥불을 향해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왜? 오늘은 말 못 해? 오늘 내가 한 짓…… 너도 한심해서 대꾸하기 싫어? 너까지 그러지 마!”
뿌득, 이까지 가는 소리가 섞인 채였다.
가만히 그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투란으로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답한 적은 있냐?”
“우께에으어? 헙!”
비명을 꽤 힘차게 지르면서 뒹굴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 입을 투란의 한 손이 냉큼 움켜쥐어 막으며 내리눌렀기에 그냥 파닥대며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으로 끝났다. 너무 놀라서 눈가를 푸들푸들하며 떠는 꼴을 보다가 투란이 한숨과 함께 말한다.
“안 죽여. 죽일 거면 완드 받을 때 죽였잖겠냐? 그러니까…… 정말 저 불 속에 있던 고리가 너한테 말을 했냐고.”
녀석이 덜덜 떠는 사이 드라고니아가 먼저 대꾸하고 있었다.
―투란, 그 고리…….
“읍, 으픕! 으읍!”
입이 막힌 녀석이 악악거리려는 시도가 투란의 손바닥에 눌린 채로 흘러나왔다.
“음, 미안.”
살짝 손을 떼면서 투란이 전혀 미안하지 않고 사납게 협박하는 표정을 꾸미면서 눈을 부라렸다.
딴소리 말고 얼른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압박!
꼴깍, 침을 삼키면서 당황하며 눈동자부터 굴리면서 달아날 길부터 찾느라고 녀석의 대답이 좀 늦어지는 사이에 드라고니아가 말을 잇는다.
―언어를 통한 직접적인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담겨 있는 정령의 자취가 감성적으로 이 꼬마에게 반응했을 수는 있다.
‘어? 뭐? 정령?’
―자취. 정령이 깃들었던 마도구가 마력을 잃고 부서지는 와중에 간혹 그 자취로 가까이 있는 주인…… 사용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이 꼬마는 그걸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로, 멋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였을 것이고.
‘아…… 그런 얘기구나.’
투란이 납득했다.
드라고니아는 그 납득을 곧바로 의심했다.
―너, 뭔가 아주 뒤틀린 채로 이해한 것 같다만?
뇌리에 울리는 말을 살짝 옆으로 치워 놓고 도망칠 구멍을 찾아 꿈틀거리는 녀석의 어깨를 찰싹 치면서 투란이 대답을 재촉한다.
“잔머리 굴리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 대답을! 정말로 이 고리랑 얘기한 적이 있어?”
말과 함께 투란이 다른 손을 펼치면서 모닥불에서 끌어낸 고리를 드러내 보였다.
그제서야 눈알 굴리던 녀석이 당황해서 놀란 소리를 낸다.
“앗? 그, 그걸 어떻게 꺼냈…….”
투란이 기대한 말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꺼내 본 적도 없어? 대체 너 이 고리에 대해서 뭘 아는 거냐?”
움찔움찔하면서도 탐욕스러운 눈길로 고리를 보는 녀석은 역시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대신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물음에 냉큼 대답했다.
―정령의 자취로 봐서는, 마도구의 마법 각인을 움직이는 것이 보통의 마력이 아니라 정령의 힘인 것으로 보인다. 정령이 마도구를 작동시키는 것이니 정령의 계약자가 아니면 못 쓰겠지. 아마 이전의 사용자가 로젠베람의 혈통으로 정령과 계약했거나 남아 있는 자취가 그 혈통을 기억하고 반응했을 거야.
‘얘가 그런 걸 아는 걸로 보이냐?’
투란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투란의 손에 들린, 손바닥 안에 얌전히 놓인 고리를 보며 탐욕스러워하지만 녀석은 투란의 칼부림을 아직 기억하는지 차마 손을 내밀거나 달아나기 위한 몸부림은 못 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투란은 한숨과 쓴웃음을 섞어 묻는 바를 바꿨다.
“너, 이름이 뭐냐?”
―응?
이 물음에 드라고니아가 의아해할 때, 녀석은 간신히 자신이 아는 바가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처럼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카, 칼라드…….”
“카칼라드?”
“칼라드!”
“그래, 칼라드. 너, 여기가 집이냐? 혼자 살아?”
다그치는 투란의 말은 나직했다.
칼라드는 그런 투란의 미묘한 몸짓에 움찔움찔하면서도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어딘가 겁은 잔뜩 먹은 채이면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하는 듯한 묘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투란의 쓴웃음이 살짝 짙어졌다.
‘역시 이 녀석, 로잭이랑 하는 짓이 비슷하네.’
―너랑 함께 마을에서 자랐다는 인간?
‘응, 로잭도 거의 혼자였지만 이 녀석처럼 마을 애들 두목 노릇을 했어.’
마음속으로 대꾸하면서 투란은 칼라드를 향해 여전히 눈을 부라렸고, 한편으로는 손에 든 고리를 살폈다. 그 안에 담긴 정령의 자취, 그것이 원래 정령이 스며들었던 흔적이라 한다면…….
“파이로.”
모닥불 속에 있었다는 점과 함께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불의 ‘정서’를 느끼면서 투란이 소리 내 중얼거렸다.
순간 투란의 손등부터 불꽃이 부드럽게 맴돌며 치솟아 흘렀다.
손이 불의 장갑이라도 낀 듯한 모양이 될 때, 고리 안으로 파이로의 불길이 당연하다는 듯이 스며들었다.
찰캉, 찰칵.
고리가 오그라들면서 금속성을 냈다.
반지 크기로 오그라든 고리 안에서 정교한 마법의 힘이 느껴졌다.
그 광경에 칼라드가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린다.
“정령……? 정령! 지, 진짜 정령!”
투란은 그런 칼라드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봤다.
‘헤에, 마법이라 않고 정령이라고 바로 말하네?’
―신기한 일이냐?
‘응, 아주 신기하지. 온갖 마법이 다 있는데 정령이라고 콕 짚어 냈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얘 보기보다는…… 음?’
갸웃하는 드라고니아에게 뭐라 한마디 더 하려던 투란이었다.
하지만 반지가 된 고리에서 소리에 이어 나는 현상이 바로 투란의 관심을, 칼라드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뭔가 있다면 찾아내라고 파이로에게 마음을 전하기는 했는데, 오래된 유물이 곧바로 반응을 해 온 셈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제대로 된 마법을 드러내고 있었고, 투란을 중심으로…… 고리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의 영역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투란이 그 결과에 대해 드라고니아의 예측을 들어 보려 하는데, 칼라드가 먼저 외치고 있었다.
“어, 어째서! 어째서 바로 문이……!”
“문?”
의아함에 짤막하게 투란이 중얼거리는 순간, 마력이 투란과 칼라드를 비롯해 모닥불까지 감싸는 원형의 장막을 형성했다. 흡사 바닥에서 불의 고리가 그대로 치솟아 장막이 되어 주변을 감싼 듯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바닥이 꺼지듯 사라졌다.
“……열리냐고! 으아앗!”
칼라드가 비명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투란은 부드러운 마법이 몸을 받쳐 주기는 하지만 아래로 떨구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야, 이건 꼭……?’
―승강기 노릇을 하는 마법이야. 간단하지만, 난도는 꽤 높군.
몇 미터 아래로 하강하면서 투란이 바로 위를 보니 모래를 부스스 떨구면서도 불의 고리가 오그라들며 열렸던 구멍, 문을 다시 닫고 있었다.
“으캭!”
칼라드가 괴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데굴거리며 굴렀다.
반쯤은 당황한 탓이지만 반쯤은 어떻게든 투란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몸짓이었다.
그 꼴에 피식 웃기만 하고 투란은 주변을 먼저 둘러봤다.
벽감이 진열장처럼 자리 잡은 원형의 방이었다.
아담하다기보다는 조금 넓고 큰 꼴이 마치…….
―창고인 모양이다. 고대 어떤 저택의 창고겠지.
‘역시 그래?’
투란도 드라고니아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먼지가 가득한 진열장의 대부분은 비어 있었고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그나마 먼지와 거미줄에 얽혔어도 남아 있던 몇 가지가 있기는 했는데…….
빈자리 중에 두어 곳은 거미줄이 걷히고 먼지가 덜어진 모양을 보니, 완드라든가 원형 동판이 원래 있던 곳이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흐음, 파이어 엣지의 검이 두어 자루 더 있다. 큰 활도 있고, 팔뚝에 거는 쇠뇌도 있는걸?
먼지와 거미줄이 엉긴 몇 가지가 바로 투란의 시야에 표시되었다.
‘이 꼬마, 왜 저런 걸 그냥 뒀지?’
욕심꾸러기라서 남에게 해코지하려 들 지경이었잖은가.
투란이 갸웃하면서 몇 걸음 도망갔지만 더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멈춘 듯한…… 그러면서도 뭔가 투란을 향해 묻고 싶어 하는 낌새는 얼굴 가득히 드러낸 칼라드를 흘깃했다.
―잠금 마법이 걸려 있어. 빈 곳의 마법은 마력이 소실되고 보호 장치도 삭아서 부서졌다만, 남은 것들은 마법과 장치가 아직 유효하거든. 그 고리, 수납 기능 말고도 여기 열쇠 노릇도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걸로 해제 가능할 거야.
‘엉? 호오…….’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은 재빨리 으쓱거리는 표정을 꾸미고 시야에 표시된 검을 향해 다가갔다.
칼라드가 그런 투란의 손 위에서 몇 센티를 둥실거리며 뜬 채로 불꽃을 머금고 있는 고리, 반지를 탐욕스럽게 노려봤다. 그 모습은 자신이 결코 얻지 못했던, 얻을 생각도 못 했던 것이 눈앞에 있는데 덤벼들 생각보다는 궁금한 뭔가가 더 커서 참는 듯이 보였다.
화르르.
완연히 반지라 불러야 하는 고리에서 불길이 번지며 먼지와 거미줄을 날려 버렸다.
검이 오래 파묻혀 있던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간, 진열장 한구석에서 달캉 하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연이어 검이 진열된 자리가 잠깐 키릭거렸지만 다른 일은 없었다.
―음, 망가졌네. 원래 앞으로 밀려 나와 잡기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만.
씁쓸한 듯이 드라고니아가 중얼거렸다.
투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집어 올렸다.
그 동작 사이에 투란의 손등으로 불꽃이 일렁이는 반지가 옮겨졌지만 바닥에 떨궈지지는 않았다. 마치 얇은 불길이 끈인 것처럼, 반지는 결코 투란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듯했다.
차링.
칼날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흘러나왔다.
투란이 허공에 대고 칼날을 그으니, 곧바로 불이 붙었다.
라카샤의 오빠가 사용하던 검과 똑같았다.
찰캉.
검을 다시 수납해 넣고 대충 허리에 꽂아 넣은 다음에 투란은 옆으로 가서 다시 불붙은 반지를 휘둘렀다.
불길이 청소부처럼, 바람처럼 먼지와 거미줄을 휩쓸었다.
담담하면서도 화려한 장식이 된 활이 진열장이 끼릭끼릭 소리와 함께 그 형태를 드러냈다.
칼라드의 외침이 터진 것은 투란이 막 활을 집어 올렸을 때였다.
“어, 어떻게 하는 거야!”
티잉, 티팅.
활줄을 손끝으로 튕기면서 투란은 칼라드를 바라봤다.
덩치가 제법 크고 소년티를 벗어 내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아직은 애라고 할 수밖에 없어 꼬마라 부르기 적당한 모습…… 그 눈빛은 그런 모습과 다르게 한 사람의 의지를 품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먼지 털고 거미줄 털고 꺼냈다만?”
―뭔 소리야? 그런 거 묻는 게 아닌 것 같은데.
혀를 차는 시늉을 하는 드라고니아였다.
칼라드는 억울하다는 표정과 함께 원형의 공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다시 묻고 있었다.
“정령! 어떻게 정령을 다루는 거냐고!”
“그냥 잘?”
“정령술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그게 그냥 잘해서 될 리가 없잖아!”
“그럼, 아주 잘?”
넉살 좋게 대꾸하는 투란에게 칼라드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성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작작 좀 해!
드라고니아는 애를 놓고 뭔 짓이냐고 핀잔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