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00
#999화
내가 막 사회 초년생으로서 헌터 생활을 시작했을 때, 짬밥 좀 먹었다는 고참 헌터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다시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사람 인연이라고.
그러니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끊을 때는 늘 신중하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뒤탈이 없다고.
현재에 이르러 돌이켜보니 이것만큼 뼈와 살이 되는 조언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나 같은 놈에게는 그런 조언이 쥐뿔도 안 먹힌다는 것이다.
“이거 오타 난 것 같은데…….”
대(大) 종남파(終南派).
화려한 비단에 수놓아진 네 글자를 읽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한 마디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도사 한 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게 도우(道友), 지금 뭐라고 했나?”
“아, 그냥 혼잣말.”
“혼잣말?”
“응.”
“말이 짧군.”
“응이요.”
말문이 막힌 듯, 순간 멍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중년의 도사가 숨을 고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나한테 도우라며. 친구니까 말 놨지. 그렇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말 놓길래.”
“보아하니 같은 무림인 같은데, 나이도 한참 젊어 보이는 친구가 못 하는 말이 없군.”
“그래도 될걸. 나이만 새파랗지 배분은 노인네라서.”
“뭐……라고?”
이쯤 되면 왠지 모를 수상함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
예상을 뒤엎는 내 대답에 중년 도사는 물론,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와 화룡각 대원들을 주시하던 종남파의 문인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술렁임이 번지던 그때였다.
“사실이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좌우로 갈라지는 인의 파도.
그 너머로 또렷하게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을 향해,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두 분 모두.”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삼 장 밖에서 불현듯 걸음을 멈춘 두 명의 노도사(老道士)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기체후일, 일…… 야, 이다음이 뭐였지?”
갑작스러운 내 질문을 받은 혁무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일도양단이요.”
“기체후일도양단. 좀 이상한데. 확실해?”
“아뇨.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거라.”
“미친 새낀가. 너 때문에 더 헷갈리잖아.”
“죄송합니다.”
“됐고, 이거 아는 사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번쩍 손을 든 주화란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일향만강.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이요.”
“오. 역시 주 소저. 그리핀용봉표국에 십 점.”
“헤헤.”
뭔지도 모르고 쑥스럽게 웃는 주화란에게 엄지를 척 치켜세워 준 나는 두 노도사를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아무튼, 예. 두 분 모두 기체후일도양단 하셨습니까.”
“……!”
“……!”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분위기.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말실수 맞다.
“아이 씨, 헷갈렸네. 혁무진.”
“예?”
“대가리 박아.”
“아, 예.”
혁무진이 말안장 위에서 머리를 박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여전하군. 그 방자하기 짝이 없는 태도는.”
두 명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풍성한 백염(白髥)을 지닌 노도사였다.
배꼽까지 늘어트린 새하얀 수염은 그를 마치 현세에 머무르는 신선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눈앞의 노도사, 아니 태을무정검(太乙無情劍) 황보엄이 신선과는 제법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것을.
‘멀어도 한참 멀지. 겉모습과 속내가 절반이라도 일치했다면 그런 파렴치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종남파와 태을무정검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깝겠지만, 내 기억력은 붕어가 아니다.
저들이 주화란이 이끌던 용봉표국에게 귀하디귀한 천년설삼(千年雪蔘)의 운반을 맡긴 뒤, 뒤로 홀랑 빼내어 배상금을 요구하는 보험 사기 수법으로 용봉표국을 한입에 삼키려던 일은 앞으로도 평생 잊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전적이 화려하기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을무정검의 옆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는 저 영감도 만만치 않았지만.
“누구 찾으시는 분 있습니까?”
“……뭐?”
“누구 찾으시는 분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송일 대협.”
웃음기 어린 내 질문에, 노호검객(怒號劍客) 송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하고도 수개월 전, 초절정의 무위와 종남파 장로라는 휘황찬란한 배경을 앞세워 태원진가의 잔칫상을 엎으려 했다가 바로 초상집의 주인공이 될 뻔한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훑고 있었다.
종남파고 나발이고, 수틀리면 귀싸대기는 기본이요 쪼인트도 옵션으로 까댈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런 노호검객을 향해, 나는 상냥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찾으시는 분은 지금 이곳에 안 계시니까.”
“……!”
“어, 혹시 제가 잘못 짚은 겁니까? 다른 사람 찾고 계셨어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보던 노호검객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네놈이 감히…….”
“감히, 뭐?”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다음 순간, 텅 빈 허공에서 뚝 떨어진 적천강의 모습에 노호검객이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이 어찌!”
“뭐라? 당신?”
“그, 그게 아니고.”
말을 더듬은 노호검객이 뒷걸음질쳤다.
매끈한 민머리에서 어느덧 까슬까슬하게 자라난 적색 머리카락과 중년의 용모.
적천강이 다시 한 번 위대한 경지를 개척하며 젊음을 되찾았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고, 이는 종남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화, 화왕(火王) 적천강……!”
누군가 반사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에, 보이지 않는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말로만 듣던 화왕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에 한번, 갑자기 나타난 새파란 놈의 정체가 바로 그 열화신룡 진태경이라는 것에 또 다시 한 번.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적천강을 번갈아 바라보는 노호검객을 향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짠! 거짓말이었습니다!”
“……!”
“어때요. 깜짝 놀라셨죠?”
간만에 만났는데 이 정도 서프라이즈는 애교지.
헛숨을 삼킨 채 몸까지 파르르 떠는 노호검객의 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히 깜짝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인 것 같지만.
하지만 노호검객은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맞춰 적절하게 한 사람이 끼어들었으니까.
“종남파의 공 모(某)가, 적 대협을 뵙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염소수염을 기른 반백의 도사.
다급한 와중에도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리는 종남파 장문인의 모습에, 노호검객을 더 갈구지 못한 적천강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그래, 오랜만이로군. 자네 이름이 뭐였지? 공필중?”
“필중이 아니라 일중. 공일중입니다, 적 대협.”
“아아, 그래. 기억나는군. 풍운전신 공일중.”
“……풍운검군(風雲劍君)입니다.”
“이것 참. 오늘따라 말이 헛나오는군. 미안하네, 풍운검군 공필중.”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풍운검군 공일중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반쯤 체념한 그의 눈빛에는 반드시 해결하고 싶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 혹시, 지금 이거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건가?
눈빛은 때때로 아주 좋은 대화 수단이다. 나 역시 눈빛으로 대답했다.
– 아뇨. 그냥 원래 그런 분인데요.
이것만큼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솔직히 나도, 적천강도 풍운검군한테는 별다른 악감정이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의 사형들인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에게는 심히 유감스러운 감정이 남아 있지만, 성라대연과 무림맹 창설 당시에나 두어 번 마주쳤던 풍운검군은 그럴 건덕지도 없었다.
당장 노호검객을 한 대 쥐어박을 것 같은 적천강이, 풍운검군한테만큼은 자네라고 칭해 주는 게 그 증거다.
‘뭐, 종남파 장문인에 대한 세간의 평도 썩 나쁘지는 않고.’
괜히 의도치 않게 꼽을 준 것 같아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젓자, 풍운검군의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놀랐습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이하 동문일세.”
망설임 없이 대답한 적천강이 숲길을 가득 메운 종남파 제자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감숙이든 청해든, 이미 어디로든 가 있을 줄 알았거든.”
“…….”
“섬서라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왜 이런 곳에서 자빠져서 쉬고 있었나?”
묵직한 팩트 폭격 보소.
종남파의 명치를 시원하게 들쑤시는 적천강의 한 마디에, 풍운검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것이…….”
차마 말은 잇지 못하지만, 본능적으로 움직인 시선의 끝에는 정답이 담겨 있다.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
침잠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대강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배 째고 있었구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저 늙은이들이 종남파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비교적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까 딱 저 새끼들만 안 왔지.’
얼마 전 산서성에서 혈겁이 벌어졌을 당시, 하북팽가는 물론 화산파와 무림맹 총단에서까지 지원군을 파견했고 때맞춰 도착한 그들 덕분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종남파?
엄밀히 따지자면, 오긴 왔다.
전투가 끝난 지 하루가 지난 후에야.
물론 딴에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군을 파견해 줬으니 고마운 일이지만, 내심 기분이 더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일천의 병력을 파견했다더니 산서성에 도착한 머릿수는 삼백. 그중 절반 이상이 별 볼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 심지어 그마저도 지각.’
이 삼 박자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니, 뱃속 깊숙한 곳에서 좆 같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은 당연지사.
거기에 더해 두 번 다시 마주치기 싫은 얼굴을 둘이나 보고 있자니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아프신 몸을 이끌고 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의기의 표상이십니다.”
정확히 표적을 겨냥한 내 말에,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의 눈살이 찌푸려진 그 순간이었다.
“놈! 입방정 떨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준엄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은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피오줌 질질 싸질러 가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협객이나 다름없다. 이제야 겨우 나잇값 하려는 무림의 대선배들에게 그 무슨 무례한 말버릇이냐!”
“……!”
“……!”
“대관절 저들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느냐! 배경이나 앞세워 힘없는 문파를 봉문(封門) 시키려 했느냐, 아니면 천년설삼을 빼돌려 멀쩡한 표국 하나를 집어삼키려 했느냐!”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혀왕의 잔혹한 손속에 풍운검군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 적 대협. 부디 저와 제 스승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알겠네. 내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럴 필요 없네, 풍운검군 공필중.”
“…….”
아주 살벌하다. 살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