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01
#1000화
아마도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이 그 시점에서 띠꺼운 티를 냈다면, 혹은 근질거리는 손을 참지 못하고 검파(劍把)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면 심각한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나야 둘째 치더라도, 당장 적천강은 그런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위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종남파의 장문인인 풍운검군 공필. 아니, 공일중 역시 이와 같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 이보게, 진 도우. 이대로 보고만 있을 셈인가?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전음(傳音).
동시에 소리의 파동을 감지한 적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희가 어찌해야…… 용서하시겠습니까.”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이유?
간단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노호검객 송일. 그다.
자존심이 강한 것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저 노도사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어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게다가 노호검객이 앞서 언급한 ‘저희’라는 대명사에는, 또 다른 한 사람 역시 포함된 것이었다.
“지난 몇 달간 수없이 생각했다. 지금껏 빈도가 저질렀던 과오(過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태을무정검 황보엄.
노호검객과 함께 풍운검군의 둘밖에 없는 사형이자, 현 종남파의 최고 배분인 그가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빈도의 잘못이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침잠하게 가라앉는 눈빛.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신 그 말씀, 진심입니까?”
“빈도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크게 숨을 삼킨 내가 덧붙였다.
“믿습니다. 동시에 저 역시 지난날의 좋지 않은 기억을 잊겠습니다. 그날 벌어졌던 분란에 제 잘못 역시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침착한 대답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특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그 놀라움이 특히 더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그러나 동시에 새어 나간 또 다른 목소리는 달랐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모두의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진심이었으니까.
― 못 믿겠습니다. 아니, 안 믿습니다.
― ……!
― 만약 황보 대협께서 진심으로 반성하셨다면, 조금 전까지 보였던 모습들이 설명이 안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두 분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전음을 흘려보낸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을 바라보았다.
말 몇 마디에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던 그들의 모습을 잊기에는 촌각이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저들이 지금의 이 자리에 두 발로 서 있기까지 걸린 시간은, 실로 길고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앙금이 남아 있겠지. 분명히.’
마음속의 그 앙금을 완전히 지우고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도, 저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은 서로 간의 악연을 덮고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었고,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이냐.
― 진심을 원합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 온전하고도 진실 된 생각을.
― ……!
― 이해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상대와의 간극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두 분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침묵이 길어지면 주위의 의심을 사는 법.
찰나의 고요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두 노도사는 우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나 송일, 과거 태원진가에 저지른 무례를 고개 숙여 사죄하겠소.”
“잠시 도사의 본분을 잊고 용봉표국을 위험에 빠트린 점, 부디 용서해 주길 바라오. 향후 빈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재차 사과하고 보상할 것을 약속하지.”
노호검객은 나에게, 태을무정검은 주화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본 종남파의 제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으며, 사문의 존장(尊丈)들이 외부인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모른 척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는 이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몰랐을 것이다.
오랫동안 다른 이에게 굽히지 않았던 탓에 뻣뻣하기 그지없는 그 고갯짓이, 미세하게 달싹이는 입술을 감추었음을.
― 그래, 그 말이 옳다. 한 번 이어진 악연은 그리 쉽게 지울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너 또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느니라.
― 하나 지금은 힘을 모아 대적(大敵)과 맞서 싸워야 할 때. 그렇기에 빈도들은 대 종남파의 일원으로서, 무림의 명숙으로서 천하를 위해 싸우고자 하니 단지 그뿐이다.
동시에 양쪽 귓가로 전해져 오는 전음.
그리고 이것이 저들의 온전한 진심이라면, 나로서는 거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저벅.
종남파와 맞닥트린 직후, 처음으로 말안장에서 내린 내 눈짓을 따라 주화란 역시 땅을 밟고 섰다.
그 후?
우리는 두 노도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공손하게.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적천강이 풍운검군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안 그런가? 풍운검군 공일중.”
부드럽게 마무리된 상황 속, 십 년 감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풍운검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중. 공필중라고 제가 벌써 몇 번을 말씀드렸…….”
“공필중? 공일중 아니었나?”
“……?”
“……?”
“아.”
“뭐가 문제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풍운검군이, 이내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험악했던 분위기는 처음 잠시뿐이었다.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일단락되자, 적천강의 현란한 개명신공에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풍운검군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어디로 향하시던 중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적천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안 되지.”
“예?”
“노부가 아니라 다른 놈에게 묻게. 지금의 나는 단순히 동행을 자처한 빈객일 뿐이지, 좌장(座長)은 따로 있어.”
적천강이 누군가. 바로 그 화왕이다.
무림맹과 함께 새롭게 창설된 오왕전(五王殿)의 수장이기도 한 그가 단지 빈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풍운검군은 내게 다가왔다.
적천강이 그렇다면 그런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종남파라는 거대 방파의 수장인 만큼, 그는 적천강의 대답을 제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한 스승의 깊은 마음으로 해석했다.
물론 내 생각은 달랐지만.
“적 대협께서 자네를 많이 아끼시는군.”
“많이 귀찮으셨나 보네요.”
“……?”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자꾸 말 걸면 싫어하십니다. 앞으로 반나절 동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계세요.”
“……!”
“괜히 오해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 이거 농담 아닙니다.”
이게 실화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와 적천강을 번갈아 보던 풍운검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친절한 조언 고맙군.”
“별말씀을요.”
“더불어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차마 공개적으로 말은 못 하겠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하네.”
다른 문제라.
실로 모호한 표현이었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분명 두 사형과의 분란을 원만하게 마무리한 것에 대한 나름의 감사 표현일 것이다.
“굳이 저한테까지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두 분께서 먼저 말을 꺼내서 해결된 부분도 있고요.”
만약 노호검객이나 태을무정검이 아주 미세한 살기라도 흘렸다면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엄청난 유혈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나나 적천강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암천의 칼날이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해도,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비수를 좌시할 수는 없으니까.
“뭐, 덕분에 당장은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니 다행입니다.”
“음. 그건 나로서도 의외였지. 비록 두 분 사형께서 아직 완전히 마음을 푸신 것은 아니겠지만.”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풍운검군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왜, 빈도가 모를 줄 알았나?”
“아닙니다. 그냥…….”
“열두 살에 종남에 입문하여 같은 스승님을 모시고, 지금까지 물경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했네. 사형들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아. 사제로서, 장문인으로서 더 이상의 말은 아껴야겠지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사형들이 싸질러 놓은 똥을 한두 번 치운 게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지원군이 제대로 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까?”
“……날카로운 질문이군.”
“단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요.”
물러섬 없는 내 눈빛에 풍운검군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닐세. 당장 빈도만 하더라도 본파의 핵심 주력을 대거 파견할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그 말씀은.”
“종남의 안위를 염려하여 내린 결정일세. 그로 인해 자네와 태원진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때로는 직설적이고 담백한 대답이 정답일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잠시 생각하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가?”
“충분히 알아들었고,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럼…….”
“도움을 받는 처지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지원군은 굳이 종남이 아니어도 충분했고, 그 이유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것으로 된 건가?”
“물론입니다.”
일단은, 이라는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정마대전 당시 종남파와 남만야수궁 사이에 얽힌 악연의 고리도 구태여 더듬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지금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숲을 보아야 할 때, 굳이 종남파와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건 없었다.
‘서쪽을 위협하는 암천의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종남파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초절정 고수만 무려 셋.
게다가 저들이 이끄는 종남파의 제자들은 얼핏 보기에도 본산(本山)의 정예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저들 역시 곧 벌어질 대전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
지난날의 악연은 기억하되, 계속해서 되새기지 않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판단이, 모두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했다.
그래야만 며칠 내내 이어진 강행군 속, 짧은 휴식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룡각 대원들을 멀쩡하게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저 중에 두 명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지.’
내가 잠시 상념에 빠져 사마표와 태산을 바라보던 그때.
풍운검군이 입을 열었다.
“하여,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이미 우리를 앞질러 간 화산파가 그랬듯이 청해? 아니면…….”
“감숙. 감숙으로 갑니다.”
뒤이어 종남파가 어디로 향할지 물어보려던 나는,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연히 밝아진 풍운검군의 낯빛은, 그들의 행선지가 우리와 같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