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04
#1003화
마침내 감숙성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묘한 긴장감이 좌중 사이로 감돌기 시작했다.
새삼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그리고 바로 이 땅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이중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나는 조용히 입안으로 삼켰다.
곧 코앞에 들이닥칠 대전투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냐의 차이일 뿐 반드시 무수한 죽음과 핏물이 온 사방으로 흘러넘칠 것이다.
감숙이 아니라면 청해. 청해도 아니라면 서장과 사천.
‘혹은 여러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겠지.’
은영각이 입수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사막 너머에서 가까워지고 있을 암천의 병력은 과거의 십만마도(十萬魔徒)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
그 정도의 머릿수라면 비단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노리지 않아도 될만한, 실로 어마어마한 대군세다.
‘십만마도만큼이나 많고, 그보다 더욱 위험하며, 거기에 더해 이동진(以東陳)까지 가지고 있으니…… 결코 좋은 흐름이 아냐.’
물론 대국까지 합류했으니 아군의 전력 역시 엄청난 수준이지만, 적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어렴풋이나마 품고 있는 짐작이 맞다면, 암천은 고작 사술(邪術)과 광신(狂信)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닐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무림맹 수뇌부도 암천의 저력을 모르지 않을 테니 믿음을 가져 보는 수밖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항상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 수위의 강적들을 쓰러트렸으며, 더 큰 위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나를 믿어 주었듯이, 나 역시 그들을 믿어야 한다.
화약의 불씨를 당기는 것은 한 사람의 손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폭발의 여파를 잠재우는 데에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잠시 뇌리를 감돌던 상념은 산길과 함께 끝을 맺었다.
섬서와 감숙 사이를 잇는 험준한 산맥을 완전히 넘어서자, 마치 위장막을 한 겹 벗겨 내듯 전혀 다른 풍경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높은 고지대와 그로 인하여 비롯된 차가운 공기.
그리고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허허벌판의 중심지에 우뚝 선 황토색 성벽까지.
모래바람과 함께 나타난 저 도시가, 감숙성의 동쪽 끄트머리이자 섬서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천수(天水)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거, 분위기 한 번 끝내주네요.”
어쩌면 혁무진의 저 떨떠름한 한 마디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터였다.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꼈을 감숙성의 첫인상이었다.
“어우, 날씨는 또 왜 이래.”
흙먼지를 동반한 서늘한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떤 혁무진이 옷깃을 여몄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고강한 초절정의 무위를 바탕으로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그보다는 못 하지만 공력으로 추위를 밀어낼 수 있는 절정 고수들이라든지.
혹은…….
“태산이. 시원해서 좋다!”
그래, 애초에 이곳이 고향인 놈도 있다.
정확히는 ‘놈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오랜만이겠네. 안 그래?”
내가 불쑥 던진 한마디에,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사마표가 입을 열었다.
“글쎄. 좀 이상한 기분이긴 하군. 고작 일 년 남짓 떠나 있었을 뿐인데…… 마치 십 년은 흐른 것 같아.”
일 년 남짓이라.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마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림맹이 새롭게 재탄생되던 그 무렵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룡각의 일원으로서 함께 겪어 왔던 그 위기의 순간들을 그러모아 꾹꾹 눌러 담기에는, 일 년 남짓에 불과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으니까.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온 사마표와 태산이 그렇듯,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나 역시 묘한 감흥에 젖었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며칠 동안 쉼 없이 떠들어 대도 부족할 만큼 길고도 복잡한 사건들이.
그리고 그 치열했던 순간마다, 저 두 녀석은 늘 우리의 곁에 있었다.
아니, 그 자체로 ‘우리’였다.
화룡각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동료이자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날의 감회에 젖어 그윽해진 내 시선에, 사마표 역시 격동을 느낀 듯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각주. 한마디만 해도 되겠나?”
“그럼. 뭐든지.”
“나는 남색(男色)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
“물론 이 부분은 각주도 아닐 거라 믿고 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말하는 것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럼 이만.”
“……!”
격동은 개뿔이.
서둘러 대답한 뒤 말을 몰아 앞질러 나가는 사마표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요, 뭐 할 말 있어요?”
불쑥 던진 날 선 음성에, 줄곧 옆에서 야무지게 따라오던 하오문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 아니 사실 있긴 합니다만 나중에 하겠습니다요.”
“…….”
“…….”
“제발 지금 해요. 미루니까 더 수상해 보이잖아.”
“그, 그래도 될는지.”
“아니, 미치겠네.”
뒤통수를 벅벅 긁는 내 모습에 움찔한 하오문도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게 하달된 임무는 여기까지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지요.”
“여기까지라는 건…….”
“인근의 주민들과 행인들을 피신시킨 뒤, 진 대협께 최근에 있었던 상황을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지요. 다행히도 별다른 일 없이 감숙성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돌아간다면, 어디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본문과 개방의 문도들이 서방 일대를 주시하고 있으니, 소인은 지부장님께 최대한 빨리 이 소식을 전할 생각입니다.”
눈앞의 하오문도는 섬서지부 소속이고, 하오문 섬서지부장은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다.
산서성 홍화루(紅花樓)의 주인이자,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무림인.
“월화, 아니 지부장님께 안부 전해 주세요.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그렇지 않아도 지부장님 역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본래 섬서 땅을 지나실 때 직접 오시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어…….”
말꼬리를 흐린 하오문도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건?”
“지부장님께서 진 대협께 직접 전하라 하시더군요. 꼭! 반드시!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얼마나 신신당부하시던지.”
단단히 밀봉된 죽통(竹筒)을 내민 하오문도가 은근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합니다.”
“……갑자기?”
“갑자기는 아닌 것 같은뎁쇼.”
뒤룩뒤룩 굴러가는 하오문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어째서인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주화란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죽통을 침잠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그녀가.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 이내 나와 시선을 마주친 주화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금 내가 봤던 게 사실이었나 싶을 정도.
‘도대체 뭐였지?’
눈을 깜빡거리던 내가 그제야 죽통을 받아 들자, 그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를 끝마친 하오문도가 말고삐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했다.
“그럼 전 이만. 부디 무운(武運)을 빌겠습니다.”
포권지례를 취한 그가 말머리를 돌려 떠나려던 그때, 문득 해결하지 못한 일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쳤다.
“아, 잠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시라면 어떤……?”
“청해와 감숙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조짐이라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전달해 주신다면 좋겠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무림맹의 정보망이 가동된 지 오래이니, 비상령이 떨어진 인근의 모든 문파에 속속들이 정보가 전달되고 있을 겁니다.”
나 역시 노파심에 덧붙였을 뿐,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애당초 은영각이 멸지(滅地)라고까지 불리는 사막 너머의 정황을 파악한 것부터, 아군의 정보망이 넓고 촘촘하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 정보망에, 녕하성 역시 포함됩니까?”
“예의 마적단이 우려되시는 모양이군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
당연한 일이다.
십여 년 전의 어느 날 미국 서부 시대 뺨치는 무법천지에 갑작스러운 평화가 찾아왔고,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정체 모를 초절정 고수가 있다고 했으니.
만약 그가 암천이 천하 곳곳에 심어둔 또 하나의 복검(覆劍)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말머리를 돌리는 것부터 고민해 볼 일이었다.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놈들을 막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양면 전선이 형성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야.’
하지만 그런 내 우려와는 반대로, 하오문도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거, 소인의 설명이 부족한 탓에 괜히 진 대협의 우려만 키운 모양입니다.”
“그 말씀은.”
“비록 변방이라고는 해도 천하의 일부. 이미 저희 하오문을 비롯한 여러 정보 단체들은 오래전부터 녕하성을 주시해 왔습니다. 정체불명의 고수에 의해 분란이 종결되자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지요.”
“아.”
잠시 간과했다.
정보는 곧 돈이고, 이는 비단 현대에만 국한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오히려 이런 세상이기에 쓸모있는 정보가 더더욱 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오문은 비슷한 결로 평가받는 개방보다도 훨씬 무림 방파로서의 색채가 옅은, 말 그대로 철저한 정보 상인들.
그런 자들이 녕하성에 벌어진 대사건을 나 몰라라 하고 있었을 리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진 하오문도의 음성은 내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담담했다.
“녕하성의 마적단들은 이미 해산된 지 오래입니다. 가장 악명을 떨쳤던 두목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저항할 엄두조차 못 냈죠. 그 당시의 과정을 주도면밀히 재분석한 결과, 별다른 의문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 인근에서 나타났다는 그 마적들은……?”
“마방(馬房)입니다. 정확히는 ‘한때 마적이었던’ 마방들이라고 해야겠군요.”
마방.
말과 별을 벗 삼아 천하 곳곳을 떠돈다는 자들이다.
상인인 동시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마방들은 각 지역의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해산된 마적들이 마방이 된 거군요.”
하오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적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더러는 마방이 되었고, 더러는 상단이나 표국을 꾸렸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체질을 바꾼 셈이죠.”
“그럼 마적단들을 평정했다는 그 초절정 고수는……?”
“그게 유일한 의문점입니다. 그 후로 줄곧 녕하성에 머무르고 있다고는 하는데, 마두가 아니라는 것 빼고는 누구도 정체를 모릅니다. 본문에서 내로라하는 정보원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요.”
마두가 아니라면 심산유곡의 기인이라는 셈인데.
확실하지는 않아도 우선은 한시름 놓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 직후 내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놓은 하오문도는 곧장 길을 떠났고, 천수에 도착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를 맞닥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