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07
#1006화
촤르륵.
두툼한 짐승의 가죽이 커다란 탁자를 뒤덮는다.
사람의 손길을 거쳐 무두질 된 가죽의 표면에는 각각의 지형을 묘사한 그림과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건 본문에서 제작한 지도요. 오랜 세월에 걸쳐 감숙(甘肅)의 모든 지형지물을 상세히 기록, 변동된 부분까지 일일이 수정하며 완성했지.”
지도에 대해 설명하는 사마공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들 중 저 지도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말이 쉬워 성(省)이지, 천하의 크고 작은 조각이나 다름없는 각 성의 면적은 아무리 작더라도 한 나라에 버금간다.
그렇다고 드론이 있나, 인공위성이 있길 하나.
당장의 현실이 이러니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물과 인적 자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이토록 거대하고 상세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사마공이 이끄는 흑룡마문(黑龍魔門)이 감숙 일대에서 어느 정도의 장악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더불어 사마공이 가진 정보력도 함께.
“공깨나 들였겠군. 그래서, 이 근방은 네놈이 꽉 잡고 있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우회하는 방법 따위는 모르는 적천강의 직진 화법에, 사마공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중원의 대들보 중 하나인 공동파가 있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어투는 겸손하지만 사마공과 흑룡마문이 감숙성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지녔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중요한 회의인데, 바로 그 대들보가 빠져 있네요.”
맞다.
정작 지금 이 자리에는 공동파가 빠져 있다.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내 한마디에도, 사마공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여전했다.
“괜한 걱정할 필요 없네. 대들보는 지금 다른 곳에서 곧 쏟아질 폭우를 막기 위해 준비 중이니까.”
“공동파가 이미 전선(戰線)에 투입되었다는 뜻이구려.”
불쑥 끼어든 풍운검군을 향해 사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의 짐작대로요. 돈황(敦煌)과 대설산(大雪山), 그리고 기련산(甘肅省)에 걸쳐 삼중에 달하는 전선을 구축해 놓았소.”
“삼중이라, 병력이 너무 분산된 것 아니오?”
풍운검군의 우려에 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암천의 대군이 이곳 감숙으로 진군한다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운명이 갈릴 대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주위의 그런 반응에도 사마공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곤륜(崑崙)만큼은 아니나, 대설산과 기련산 역시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험산. 게다가 적들에게는 이동진이라 불리는 기괴한 사술이 있으니, 돈황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소.”
“사마 문주의 의견에는 빈도 역시 동의하오만, 문제는 세 개나 되는 전선을 유지할 만한 전력이 있냐는 거요.”
사실상 수적열세야말로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적들은 물경 십만을 아우르는 대군세.
설령 놈들이 병력을 분산시켜 세 개의 성을 동시에 노린다고 하더라도,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삼만이 넘는 머릿수가 개떼처럼 몰려올 것이다.
‘그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곳에 집결해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싸워야만 승산이 있어.’
실제로 얼마 전 산서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그러했고, 행운과 투지가 겹쳐 승리를 얻어냈다.
그리고 이는 굳이 군사 전략에 조예가 없더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런데 일개 촌부도 아닌, 흑룡마문이라는 거대 방파를 일구어낸 흑야왕 사마공이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모를까?
‘말도 안 되지.’
나는 담담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는 사마공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감을 읽어 냈다.
“이미 충분하군요. 감숙의 전력은.”
그 순간, 사마공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달포 전, 감숙 무림 전체에 비상을 내렸네. 본문과 공동파는 물론, 일대의 모든 무림 방파가 주위를 경계한 지 오래였던지라 금세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지.”
“그렇다는 건…….”
“삼만. 지금까지 결집한 병력일세. 감숙 무림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지.”
“……!”
“……!”
수뇌부들의 눈이 부릅떠졌고, 이는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만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대병력이다.
지난날 팔천협을 틀어막고 대초원의 군세와 맞섰던 산서성의 병력이 만오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사마공이 ‘감숙 무림’이라는 사족을 덧붙였다는 것은, 저 삼만이라는 머릿수가 전부 무림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했다.
총병력의 절반 이상이 관병으로 구성되었던 산서성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
물론 항산검문과의 분쟁에 이어 대장로의 배신으로 이미 한차례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산서 무림이지만, 그것까지 감안하더라도 삼만이라는 대병력은 언강생심이나 다름없다.
“도, 도대체 그 많은 병력을 어디에서……?”
아마도 이 자리의 모두가 품었을 의문을 대신하여 풍운검군이 말을 꺼낸 그때,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지켜보던 적천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파(邪派) 놈들은 머릿수 빼면 시체지. 그렇지 않느냐?”
사마공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삼만이라는 머릿수는 설령 중원(中原)의 구파일방이라 할지라도 불가능에 가까울 터.”
“그 또한 맞지요. 언제 허리춤에 찬 칼을 거꾸로 휘두를지 모르는 파락호들이 이리 많다면, 대국(大國)에서 가만히 두고 보았겠습니까.”
비록 천자가 암천을 역적으로 규정한 이후부터 유명무실해진 표현이긴 하지만,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이는 무림의 탄생과 함께 자연스럽게 맺어진 암묵적인 규칙이다.
모난 돌은 언제고 반드시 정을 맞게 되는 법.
광활한 천하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림 방파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상호간의 견제와 합의를 반복해 왔고, 대국은 나라의 근간이 위협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들의 존재를 묵인해 주었다.
오죽하면 왕조(王朝)가 바뀌어도 무림(武林)은 남아 있다는 말이 나왔겠나.
그런데 현재의 감숙 무림은 바로 그 암묵적인 규칙을 넘어섰다.
중원도 아닌 변방에서 삼만을 아우르는 무림인들을 결집시켰고, 이는 감숙성의 모든 무림 방파를 뒤집어 탈탈 털어도 나올 수 없는 대병력이었다.
‘그렇다는 건.’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대부분이 어느 특정한 문파에 적(籍)을 두지 않은 채, 오직 필요와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인간군상들.
“흑도(黑徒)까지 긁어 모으다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로군.”
흑도.
아득한 세월 동안 불편한 공존을 이어 가고 있던 그들의 정체에 몇몇 사람들, 특히 풍운검군의 눈빛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사마 문주. 적 대협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오?”
사마공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들 중 일부가 흑도인 것은 맞소만, 혹여 무슨 문제라도?”
“……그건.”
“인정하리다. 본인은 부정할 수 없는 사파인이오. 장강수로맹과 녹림맹 또한 뿌리부터 흑도지. 아, 저기 있는 내 아들놈 역시 마찬가지올시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지목에, 줄곧 침묵하고 있던 사마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차 흘러나오는 사마공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무엇인지 아시오?”
안다. 이 자리의 모두가.
하지만 사람들은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무림맹을 위해 싸웠고, 또한 무림맹을 위해 싸우고 있지.”
적천강이다.
화왕(火王)이라는 별호를 증명하듯,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에 사마공의 모습이 비쳤다.
“사파건, 흑도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개뼉다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가 암천을 향하고 있다면야.”
사마공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 또한 필시 그럴 것입니다.”
“네 녀석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변방까지 흘러들어올 정도의 흑도라면 어지간히 썩어빠진 놈들일 터.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제 목을 걸지요.”
그때였다.
말없이 사마공을 응시하던 적천강이, 불현듯 고개를 돌려 좌중을 쓸어본 것은.
“너희의 의중은 어떠하냐?”
지금 이 자리에는 사마공과 함께 우리를 마중 나온 감숙 무림의 명숙(名宿)들이 있었지만, 적천강의 물음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온 종남파의 중진들.
그들 중 중심에 선 풍운검군이 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의 사형들인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러더군요.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라고.”
“빈도가 아는 사마 문주는 사파인이기 이전에 함께 전란을 헤쳐 나온 전우이자 협객(俠客)입니다. 그런 이가 목숨까지 걸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실로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는 두 노도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적천강의 시선이 문득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래서, 꿀은 다 처먹었느냐?”
왜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짐짓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예, 뭐. 달달하던데요.”
“귀한 꿀을 그리 오랫동안 머금고 있었으니, 이제 할 말이 있을 터.”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입니까?”
“어림도 없지. 네깟놈이 뭐라고.”
실소를 흘린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름도, 별호도 잘 모르는 낯선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흑룡마문의 중진들과 저마다 크고 작은 방파를 이끄는 감숙 무림의 영수(領袖)들.
그 중심에 사마공이 있었다.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이 모든 것을 문주께서 홀로 결정하셨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맞습니까?”
“당연한 말을. 이 자리에 계신 여러 문주들과 공동파 또한 동의했네.”
“그럼 만약 암천이 노리는 것이 감숙이 아니라면…….”
“일부 병력을 남겨놓고 즉각 청해로 향할 걸세. 하지만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어째서입니까?”
“조짐이 심상치 않네. 마교에서 암천이 되었을 뿐, 우리에게 있어 사막 너머의 적들은 늘 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고 이는 정마대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
“조짐이라면.”
“아직 확실치 않아 당장 입에 담을 수는 없네. 이미 믿을 만한 이들을 선별하여 사막 너머로 정찰을 보냈으니 돌아오면 확실해지겠지. 그러니…….”
사마공의 시선이 나에게서 적천강을 향해 움직였다.
“감숙의 방비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노선배께서는 청해로 가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화산파를 비롯한 지원군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 시급을 다투는 쪽은 아무래도 청해성이 아니겠습니까.”
“청해, 청해라.”
적천강이 신음하듯 낮게 읊조린 그 순간이었다.
“무, 문주님!”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