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1
#100화
사람은 저마다의 취미를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이다. 임춘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팀장이 길드장실에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문을 향해 굴러오는 골프공이었다.
데구르르. 툭.
홀(Hole)을 한참이나 벗어난 공은 1팀장의 신발에 부딪힌 후에야 멈췄다. 허리를 숙여 공을 주우려는 그에게 임춘수가 손짓했다.
“됐어. 와서 차나 한잔해.”
“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차를 음미하던 임춘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향 좋지?”
“아, 예. 좋은 차인가 봅니다.”
“이게 용정차라는 건데, 선물로 받았는데 사실 뭔지 잘 모르겠어. 가격만 더럽게 비싸고.”
“예?”
“뭘 그렇게 놀라?”
“차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전혀. 그냥 있어 보이고 싶어서 음미하는 흉내만 내는 거야. 집에서는 믹스 커피 마셔.”
1팀장은 실소를 흘렸다. 길드 간부들 사이에서 임춘수의 차(茶) 사랑은 유명했다. 누가 더 좋은 차를 길드장에게 선물하는지 경쟁이 붙을 정도다.
“놀랄 사람들이 몇 있겠군요.”
“예를 들자면?”
“3팀장이죠. 이번에 중국 출장 가서 명차를 구해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닙니다.”
“그놈 잘라. 일은 안 하고 풀떼기 구할 생각에 넋이 나갔구먼.”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농담이지. 나는 농담도 못 하나?”
두 사람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남은 찻물을 냉수처럼 쭉 들이켠 임춘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언제 말할 건가?”
“예?”
“새로 가져온 소식 있잖아. 말하기 힘들어서 우물쭈물하는 놈한테 큰맘 먹고 비밀까지 얘기해 줬는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앞으로는 들어오기 전에 거울 보고 와.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모르나.”
1팀장이 힘겹게 말문을 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전에 내리신 평화 길드 조사…… 실패했습니다.”
“둘 다?”
“예. 죄송합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신중하게 접근해 봤지만 평화 길드장과 팀장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답니다.”
“그건 어느 정도 예상했어. 내가 직접 청탁을 넣었어야 했는데. 뭐, 결국 쓸데없는 체면 때문에 안 나선 거니까 내 탓도 있는 거지.”
“아닙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고. 락 걸린 놈들은 몰라도 진태경인가 하는 C급 헌터는 성공했어야지.”
임춘수가 냉엄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도대체 왜 실패한 건가? 외부에서 고용한 패밀리어 마법사에 길드 보안팀도 붙여 줬잖아.”
“저, 그게…….”
머뭇거리던 1팀장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어렵사리 토해 냈다.
“연락이 끊겼습니다.”
“응? 홍우진 그놈?”
“홍우진은 문자 한 통 남기고 잠적했고 연락이 끊긴 건 보안팀입니다.”
“보안팀이 왜? 주기적으로 상황 보고하지 않나?”
“네. 두 시간에 한 번씩 보고가 들어오는데…… 네 시간 전이 마지막입니다.”
“지금 보안팀이 단체 이탈이라도 했다는 소리야?”
“아닙니다. 정황상 진태경에게 당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뭐?”
이게 무슨 말인가.
황당해하는 임춘수에게 1팀장이 프린트해 온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 자 보고입니다.”
특정 부분만 붉은 글씨로 칠해진 걸 보니 정기 보고서가 아니라 긴급 보고서다.
임춘수의 눈동자가 빠르게 활자 위를 누볐다.
표적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으며 대화 내용과 취한 행동 모두 수상하다. 보고를 빠짐없이 읽은 그가 한숨을 토해 냈다.
“허,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네. 그래서 이다음은?”
“보안팀장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급하게 표적을 쫓아야 하니 선 조치 후 보고 하겠다고요.”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임춘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톡. 고개를 들었을 때는 고급 원목 탁자가 꽁꽁 언 상태였다.
“진태경이랑 통화한 놈은 누구야? 이름 석 자 정도는 알아 왔으니까 이걸 보여 준 거겠지.”
“성진호. 부천 사는 30세 고시생입니다.”
“……1팀장아. 내가 잘못 들은 거냐? 헌터가 아니라 고시생?”
“저도 재차 확인해 봤지만 틀림없습니다. 진태경이 사는 고시원 총무더군요. 의형제 같은 사이랍니다.”
“허, 참. 오늘 여러 번 놀라게 만드는군.”
최소 A급 헌터는 될 줄 알았는데, 뭐? 민간인 고시생?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임춘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 이거 아주 제대로 당했네. 달랑 다섯 명 있는 길드가 뭐 이리 숨기는 게 많아?”
“어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어쩌긴 뭘 어째. 슬슬 밥시간인데 저녁이나 한 끼 하러 가야지.”
“……네?”
어리둥절한 1팀장을 본 임춘수가 혀를 찼다.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오늘 저녁은 일산에서 먹을 생각이다.
* * *
6대1의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애초에 나와 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은 최병일 한 명뿐인데다가,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뭐, 당연한 거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 같다.
양 발목이 부러진 최병일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A급 헌터? 정체를 숨긴 건가?”
“아닌데. 정체 숨긴 적 없는데.”
“진짜 소속을 밝혀라! 혹시 아레스 길드에서 우리 상동 길드를…….”
“나 평화 길드야. 그리고 아레스 길드는 당신네 길드에 관심도 없을걸. 체급부터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전화를 한 상대는 누구지?”
“고시원 총무 형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성진호라고 하면 당신이 알아?”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결국 아가리 봉인술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옷을 찢어 입을 틀어막은 뒤 그를 포함해 남은 부상자들을 모두 치료했다.
아, 물론 내가 스토어에서 샀던 포션은 아니다.
“이야, 상동 길드 지원 빵빵하네.”
당장 놈들이 들고 온 것만 털었는데도 장비며 소모품의 질과 양이 제법이다. 그중 일부를 치료에 쓰고 나머지는…….
“이건 일단 내가 압수. 혹시 불만 있는 사람?”
당연하게도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압도적인 내 무력에 질렸는지 상처가 치료됐음에도 감히 다시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당히 똑똑한 놈들이다.
“자, 이제 나한테 너희들의 임무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 줄 사람?”
이번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서 직접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아주 쉬웠다.
“너.”
“저, 저요?”
“응, 너.”
패밀리어 마법사, 김준수는 움찔하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저는 보안팀 소속입니다. 길드의 기밀 사항을 외부인에게 함부로 유출할 수 없습니다.”
“오.”
나는 감탄했고, 그것과 동시에 녀석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어디선가 테이프 뜯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리고 가발이 훌렁 벗겨졌다. 그러자 그 아래 감춰져 있던 빛나는 정수리가 드러난다.
“이게 무슨!”
“자, 지금부터 하는 질문에 거짓말이나 모르쇠로 일관할 시 머리털을 한 움큼씩 뽑도록 하겠다.”
“……!”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어떻게 해서든 머리를 지키고 싶은 탈모인의 입에서 온갖 정보가 흘러나왔다.
“홍우진?”
“네, 1팀장님이 외부에서 고용한 B급 마법사입니다. 저처럼 패밀리어 마법이 주특기고요.”
“그래?”
아깝다. 그놈도 잡아서 족쳤어야 했는데.
‘언젠가 만날 일이 오겠지. 오래 걸리면 내가 찾아내도 되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계속해서 정보를 뽑아냈다. 김준수가 멈칫한다 싶으면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끝입니다, 진짜 끝. 아무리 제가 보안팀이라지만 더 이상은 몰라요. 그러니 제발 머리카락만큼은…….”
억울함과 진심이 묻어 나오는 말투다. 특히 마지막 말이 내 심금을 울렸다.
‘이 정도면 얼추 마무리됐겠지.’
배후는 예상대로 상동 길드, 정확히 말하면 임춘수였다.
가뜩이나 흥청망청 사는 아들내미가 수입 억을 삥 뜯긴 걸 보고 그 직후부터 우리 길드를 털기 시작한 거다.
뭐, 결국 나한테 역으로 털렸지만.
“길드장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약한 놈들 전용 멘트, 뭐 그런 거라도 있나? 길드장 운운하지 말고 본인이 싼 똥이나 치울 생각해.”
“……큭.”
내 일침에 최병일은 분한 듯 고개를 떨궜지만 저 인간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상동 길드장이 알면 열 좀 받겠네.’
감시하라고 부하들을 보냈더니 오히려 역으로 털리고 붙잡히는 신세까지 됐다. 길드장은 물론이고 길드 전체 입장에서 봐도 이런 개망신이 또 없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그쪽에서도 조용히 덮고 넘어가 주길 바랄 뿐이다.
‘최 팀장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스마트폰을 들고 고민하던 찰나였다.
[010-xxxx-xxxx]처음 보는 번호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뭐지?
왠지 모르게 드는 묘한 긴장감 속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내려오게. 밑에서 기다리고 있네.
“네?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 진태경. 맞지?
“아니, 맞긴 한데…… 누구세요?”
– 나 임춘수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쪽이 우리 애들을 몇 명 데리고 있다고 해서.
“…….”
– 듣고 있나?
듣고는 있다. 말을 못 할 뿐이지.
중견 길드의 길드장이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그것도 성질 더럽다는 임춘수가.
– 내려와, 오해도 풀 겸 밥이나 한 끼 하게.
굳이 오해를 풀 만한 일은 없지만 ‘싫어요.’라고 했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이미 위치까지 파악하고 온 양반 아닌가?
결국 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 * *
임춘수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생각보다 젊었고 눈빛은 온화한 듯하면서도 뜨거웠다.
‘불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저것이 얼음 마법의 대가를 만나서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임춘수라고 하네.”
뜨거운 눈빛과는 달리 목소리는 차갑다. 이제야 프로즌(frozen)이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보고서 사진으로만 보던 얼굴을 이렇게 보니까 좀 신기하군.”
뒤를 캤다는 걸 이렇게 직설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우리 애들은?”
“위에 있습니다.”
“사망자가 있나?”
“설마요. 범죄자 되는 건 딱 질색입니다.”
“그거 고맙군.”
임춘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우리 애들이 조급함에 실수를 저질렀네. 이해해 줄 텐가?”
“적당한 보상이 있다면요.”
내 대답에 임춘수는 피식 웃었고, 팀장처럼 보이는 옆의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친구가 예의가 없군.”
“제가 좀 그런 편이긴 한데…… 감시까지 붙인 분들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임창수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1팀장은 위에 가서 애들이나 풀어 줘.”
“……예. 길드장님.”
김 집사가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면 그는 거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같은 마법사라 그런 걸까? 어쩐지 모르게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네는 나랑 좀 걷지.”
임창수가 앞장섰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혹시 그거 알고 있나?”
한동안 거침없이 걸어가던 임춘수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난 일단 원한 관계가 맺어지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해.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그런 성격이지.”
무림 스타일인데?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 아저씨의 혈관에도 무림 터프가이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지금의 상동 길드는 그렇게 쌓아 올린 거야. 무너트린 걸 밟고 건져 내서 더 높게.”
“그렇군요.”
“평화 길드는 어떤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근 10년은 무료했지. 인근 길드와는 전부 동맹 관계고 우리에게 더 이상 적수가 없었어. 그런데 자네들이 나타난 거야.”
호기심과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는 듯한 그의 눈을 보며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거 위험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임춘수의 말은 이어졌다.
“길드장과 팀장은 나로서도 정보를 쉽게 열람할 수 없는 인물들이고…… 무엇보다 자네의 존재가 날 자극시켰어.”
우리는 이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임춘수는 숨이 차는 것 같지 않았다.
“자네는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나?”
“절 보기 위해서겠죠.”
“절반만 맞췄어.”
임춘수의 발걸음이 멎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전신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Lv.75 임춘수]“내 나이에는 시간이 금이야. 얼굴만 보려고 여기까지 올 만큼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닐세.”
프로즌. 대격변을 온몸으로 헤쳐 나간 노련한 A급 마법사가 나를 향해 손을 펼친 순간.
츠츠츠.
아무것도 없던 머리 위 허공에서 십여 개의 얼음송곳이 생겨났다. 한여름의 공기가 얼어붙고 뜨겁게 달궈진 흙길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된통 걸렸군.’
제법 경우를 아는 노인네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다짜고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자네라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저는 고작 C급인데요.”
“그래, 그 C급 헌터 실력 좀 보자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임춘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린 냉기를 뿜어내는 얼음송곳들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그러나 얼음송곳은 내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솟구쳐라. 파이어 월(Fire Wall).”
또렷한 음성과 함께 대기에 스며든 마나가 요동친다. 임춘수의 마법으로 서리가 끼어 있던 바닥이 녹고 불꽃이 솟구쳤다.
화륵, 화아악!
그건 말 그대로 불의 장벽이었다. 푸른 화염은 얼음송곳을 집어삼키고 나와 임춘수의 사이를 갈랐다.
일렁이는 불꽃 너머, 임춘수가 경악에 찬 음성을 토해 냈다.
“이건……!”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임춘수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 등산로 입구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춘수, 자네도.”
[Lv.80 김화종]김화종. 김 집사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