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10
#1009화
만약 마중걸이 조금이라도 수상쩍거나 시시껄렁한 이유를 댔다면, 즉각 성문 밖으로 쫓겨났거나 혹은 성안 어딘가에 있을 뇌옥에 처박혀 고문 기술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껏 낮춰진 마중걸의 목소리에는 생각보다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었다.
“암천(暗天). 놈들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
그리고 그 한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나를 포함한 모든 수뇌부는 눈앞의 불청객들이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귀한 손님들을 너무 오랫동안 밖에 세워 뒀군. 안에서 차라도 한잔 들지 않겠나?”
은근한 사마공의 물음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어깨를 편 마중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말씀 드리자면, 저와 제 아우들은 차 중에서도 곡차(穀茶)를 제일로 칩니다.”
“백마방의 일곱 의형제가 알아주는 주당들이라더니, 듣던 대로 아주 호쾌하군. 그럼 어서 안으로 들지.”
중요한 이야기는 지켜보는 이목이 적을수록 좋은 법.
그렇게 때아닌 불청객에서 귀빈으로 단숨에 위치가 격상된 마중걸과 여섯 사내. 아니 백마칠종(白馬七宗)이 대회의실에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촌각이 흐른 직후였다.
“크어어어. 좋다.”
마중걸을 시작으로 작은 술동이 하나를 단번에 비워 낸 그의 의형제들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어후, 진짜 끝내주네.”
“이거 무슨 술입니까? 혀끝에 닿자마자 아주 사르르 녹는데요.”
“그러게. 미쳤다.”
“……아니, 술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오? 사르르 녹기는 개뿔이. 이러니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지.”
“갈. 넷째 네 이놈. 형제들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어후, 숨통 좀 트였다고 다시 목소리 커진 거 봐. 내 진짜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술동이로 뒤통수를 그냥.”
물론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머리통과 술동이가 부딪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곱 빛깔 마적 레인저, 아니 백마칠종을 말없이 바라보던 적천강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술 처먹으러 왔느냐?”
“……!”
“……!”
“이제 목도 축였으니 어디 한번 씨부려 보거라.”
적천강에게서 흘러나오는 험악한 기세에 순간 움찔한 마중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우, 우선은 녕하 일대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충은 들었지. 너희 같은 마적 놈들 때문에 말판 촌각 전까지 갔다가 근 몇 년 동안은 잠잠해졌다고. 맞느냐?”
“저희는 더 이상 마적이 아니지만, 예. 적 대협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 봤자 노부가 보기에는 아직도 마적 나부랭이지만, 일단은 계속해라.”
“그간 사소한 분란이 몇 번 일어나긴 했지만, 이제는 제법 살기 좋은 땅이 됐습니다. 뭔가 켕길 만한 짓거리를 한 번이라도 했던 놈들은 진즉 떠났고, 남은 놈들은 저나 제 아우들처럼 완전히 개심하여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여기 계신 사마 문주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사마공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녕하성이 안정되면서 여러 상단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들을 통해 여러 정보를 들었지. 백마방에 관한 이야기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소.”
사마공의 지원사격을 받은 마중걸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사마 문주께서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저희 백마방의 규모는 녕하성에서도 단연코 으뜸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녕하성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상로(商路)까지 개척하고 있지요.”
“잠깐. 자네가 말한 새로운 상로라는 것이 혹시……?”
“아마 짐작하시는 그곳이 맞을 겁니다.”
마중걸의 대답을 들은 사마공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번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이 있었다.
“서쪽. 서쪽이군요.”
“……!”
내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주위를 휩쓸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말한 서쪽은, 감숙도 청해도 아니었으니까.
“신강(新疆)…….”
신음과도 같은 음성이 풍운검군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마중걸을 지켜보고 있던 태을무정검과 노호검객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신강이라. 허.”
“나 참.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언제까지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있을 거요?”
굳이 인정해 주긴 싫지만, 저 두 사람의 반응이야말로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신강이 어떤 곳인가.
멸지(滅智)로까지 불리는 땅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마도천하(魔道天下)를 부르짖는 악귀들이 득실거리는 저주받은 땅.
그런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도 아닌, 일개 마방 따위가 신강으로 상로를 개척한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는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었다.
태을무정검과 노호검객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이 자리는 투자를 권유하는 자리도, 사업설명회도 아니라는 것을.
마중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서두가 길었군. 그렇지 않으냐?”
착 가라앉은 적천강의 물음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고, 크게 심호흡한 마중걸이 재차 입을 열었다.
“비록 안정을 되찾았다 한들, 녕하성의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땅은 척박하고 경계가 맞닿아 있는 대초원의 유목민들은 추수철만 되면 약탈을 자행했지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해서, 사막을 넘어 상로를 뚫고자 했다?”
“그랬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단순한 희망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못 배운 놈이어도 그렇지 어디 저희 같은 놈들이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한데…….”
마중걸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해 움직였다.
“얼마 전,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지요. 대초원 서쪽을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유목민이 갑작스럽게 대이동을 시작한 겁니다.”
“……자무카.”
반사적으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한 사람의 이름.
나는 그제야 마중걸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그가 앞서 언급했던,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서부 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자무카의 대군세.
놈들은 거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산서성으로 진군했고, 그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곧 백마방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초원을 통해 신강을 넘으려고 한 겁니까?”
내 물음과 함께 곳곳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맞다.
어느 순간 당연해졌고, 그렇기에 모두가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선택지.
중원인들의 시선으로는 지금껏 신강과 더불어 또 하나의 금지(禁地)로 여겨졌던 대초원이야말로, 사막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집중된 시선 속에서, 마중걸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기마술에 능한 수하들을 선별해서 쉬지 않고 말을 몰았습니다. 그렇게 꼬박 열흘을 미친 듯이 내달리고 나니, 어느 순간 저 멀리에서 싯누런 땅이 보이더군요. 마침내 사막에 도착한 겁니다.”
그때, 마중걸의 뒤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여섯 의형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이고, 진짜 난리도 아니었지. 솔직히 그때는 대형이고 나발이고 죄다 엎어 버리고 돌아가고 싶었소.”
“한데 뭘 어쩌겠수. 거기까지 간 마당에. 기왕 온 거, 모래라도 좀 밟고 돌아가자 했던 거지.”
“그렇게 또 한 열흘쯤 갔었죠, 아마?”
“말도 마라. 지금도 그 염병할 사막만 떠올리면 오금이 저린다.”
“갈. 이런 나약한 놈들을 보았나. 나는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대형을 믿고 따랐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난쟁이 중년인의 준엄한 일갈에, 주먹코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말발굽이 삐뚤어져도 고삐는 바로 잡으랬다고, 제발 말은 똑바로 합시다. 열흘째 되던 날 그 시커먼 놈들이 나타나자마자 둘째 형님은 어찌했소?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도망칠 준비부터 했잖아.”
“갈……!”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른 난쟁이가 주먹코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보다 내가 훨씬 빨랐다.
덥석.
손아귀 안에 정확히 안착하는 아담한 크기의 주먹.
허무하리만치 쉽게 난쟁이의 일권을 잡아챈 나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먹코를 응시했다.
“다시.”
“뭐, 뭐요?”
“방금 말했잖습니까. 사막에 들어선 지 열흘째 되던 날, 시커먼 놈들이 나타났다고.”
빠르게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들음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짐작은, 이내 확신으로 변했다.
“암천(暗天)이었습니다.”
주먹코 대신 입을 연 마중걸이 말을 이었다.
“머릿수는 수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틀림없습니다. 제 목을 걸지요.”
사마공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놈들의 뒤를 밟았습니다.”
“뭣이?”
“딱 하루하고도 반나절.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달이 유난히도 밝았던 그 날, 족히 일천에 달하는 천막이 사구(砂丘)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
“서쪽 사막에서 그 정도의 대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한 곳밖에 없지요. 암천. 그렇지 않습니까?”
대답 대신 싸늘한 침묵만이 회의실 안을 감돌았다.
일천. 사람도 아니고 천막의 개수가 무려 일천이라고 했다.
게다가 마중걸이 사막을 횡단한 경로는 명백하게 청해보다 감숙에 가깝다.
이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 수천, 혹은 수만에 달하는 적들이 감숙성을 노리고 있다는 뜻.
‘심지어 그마저도 전부가 아닐 수 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와는 반대로 속도를 더해 가던 심장 박동은 어느덧 천둥처럼 귓가에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물론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해소해야 할 의문이 있었으니까.
“용케도 살아 돌아왔군.”
사마공의 나직한 음성이 찰나의 침묵을 깨트린다.
심유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빛에, 마중걸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슬아슬했습니다. 심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지요.”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백 리. 딱 백 리의 간격을 두고 뒤쫓았습니다. 처음에만 고생했지, 그 후로는 시시각각 머릿수가 불어난 덕분에 훨씬 수월하더군요.”
“일개 마방들이 암천의 눈을 피해 추격한다라, 그게 가능한가?”
“부끄럽지만, 저희가 평범한 마방은 아니지 않습니까. 변발만 안 했지, 기마술이나 눈 밝은 것으로는 유목민들과 다를 것도 없습니다.”
“놈들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돌아올 수도 있었을 터, 왜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쫓았지?”
“그, 그것은…….”
잠시 머뭇거리던 마중걸이, 사마공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하를 위해 공을 세운다면,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보상을 생각했다?”
“예.”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소수의 인원이었던 데다, 잔뼈 굵은 마적 출신이라 가능했던 일.
게다가 그 이유 역시 명백하다.
잠깐의 고민을 끝마친 나는, 적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확실해졌네요. 저희가 머물러야 할 전장이 어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