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12
#1011화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은 썩 긍정적인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전시(戰時) 상황에서의 의심은 곧 신중함이다.
계속해서, 깊게 들여다볼수록 그 실체가 뚜렷해지고 승리를 향해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것이 마중걸을 비롯한 백마칠종(白馬七宗)이 일행에 합류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끄는 화룡각에.
‘물론 내가 앞장서서 자처한 거긴 하지만.’
본래는 사마공의 감시하에 놓일 예정이었으나, 내가 적지 않은 병력을 통솔해야 하는 그의 상황을 이야기하자 결론은 금세 나왔다.
화룡각에 배속되는 것으로.
워낙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더 이상의 반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백마칠종의 처우에 관한 결론이 내려졌던 그 순간, 한층 깊게 가라앉은 사마공의 눈빛을.
‘기분 탓인가. 아니면…….’
내심 말꼬리를 흐린 나는 마중걸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시한다며 투덜거리던 그는 어느샌가 조용해진 상태였다.
아니, 겉보기에만 그랬다.
두두두!
힘차게 내달리는 말발굽과 그에 따라 전신을 휘감으며 스쳐 지나가는 거센 바람.
그리고…….
우우웅.
그 사이로 은밀하게 전해지는 미세한 파동.
‘이건.’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절한 경지에 다다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의 흐름이라는 것을.
더불어 크고 작은 여러 소음에 파묻혀 전해져오는 저 미세한 파동 속에는, 지금껏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스아아아.
그건 이성적인 판단을 통한 계산이 아니었다. 잠시 잊고 있던 본능이었다.
나는 이제야 막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처럼, 마중걸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파동을 향해 기를 흘려보냈다.
닿고, 뒤섞이고, 이내 하나가 되었다.
파동의 주인인 마중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것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같은 종류의 파동을 주고받던 그의 여섯 의형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제까지 이대로 끌려가야 합니까?
그렇게 미세하던 파동, 아니 전음(傳音)이 비로소 내 귓가에 또렷이 울려 퍼진 그 순간이었다.
띠링.
– 숨겨진 업적, [내 귀에 도청 장치]를 달성하셨습니다!
– 이제부터 주위의 [전음]을 감지하고 엿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는 위대한 경지에 도달한 이에게 허락된 또 하나의 공능, 그러나 너무 기뻐하지는 마십시오. 대상과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 엿들을 수 있는 [전음]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게 되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것도 잠시, 나는 귓가로 전해지는 전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디, 무슨 작당 모의를 하나 들어나 보자.
* * *
– 나 참, 언제까지 이대로 끌려가야 합니까?
– 맞습니다. 이건 뭐 숫제 인질도 아니고.
– 후, 아버지.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 어? 형님 아버지는 이십 년도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더 보고 싶지.
– 아.
불만 가득한 아우들의 전음에, 마중걸은 준엄한 어조로 대꾸했다.
– 어허, 뭘 그리 투덜거리느냐. 애초부터 예상했던 일이거늘.
비상시에는 누구보다 먼저 도망치지만, 평소에는 대형을 하늘처럼 섬기는 둘째 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갈! 대형 말씀이 백번 천번 옳으니 모두 그만해라.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이런 사지(死地)에 끌고 오셨겠느냐?
역시 둘째다.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때맞춰 다른 아우들을 조곤조곤 타이르는 난쟁이의 모습에 마중걸이 흐뭇하게 미소지은 그때였다.
– 아까 대형이 했던 말 못 들었소?
사사건건 다리를 거는 셋째가 불쑥 던진 한마디에, 둘째가 눈을 끔뻑거렸다.
– 아까? 아까 언제?
– 출발 직전에 말이오. 멀쩡한 말안장을 점검한답시고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쥐똥만 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있길래 들어 봤더니…….
– 들어 봤더니?
– 아니, 들을 필요 없다.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라.
반 시진 전의 일이 생각난 마중걸이 황급히 가로막았지만, 셋째 아우의 전음은 이미 바람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 좆 됐다. 이제 어떡하지. 그러고 있더이다.
– ……!
– ……!
북풍 설한보다 싸늘한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순간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 속, 사정없이 뒤통수를 후벼 파는 여섯 개의 시선에 마중걸의 눈동자가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 대형…….
– 셋째 형님 말이 사실이오?
– 아닐 겁니다. 아니죠? 그렇죠?
– 이게 사실이면 진짜…….
– 가, 갈. 대형께서 그러실 리 없다.
– 뭘 그럴 리가 없어 없기는. 내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할 말을 잃은 마중걸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무심코 흘러나온 혼잣말을, 그것도 하필이면 셋째가 듣고 있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 그게, 그러니까…….
계속 침묵할 수도 없어 더듬더듬 흘려보낸 전음.
동시에 눈치 빠른 여섯 아우는 탄식을 내뱉었다.
– 맞네.
– 진짜네.
– 아, 어머니. 오늘따라 미치도록 뵙고 싶습니다.
– 그럴 때가 있죠.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더욱더 사무치게 그리운.
– 미친놈인가. 아직 정정하신 분을 왜 죽여.
– 아.
– 갈……!
– 대형, 그래서 이제 진짜 어쩔 겁니까. 이대로라면 쭉 전선까지 끌려가서 칼받이 되는 거 아니오?
혼돈에 빠진 다른 이들과 달리, 그나마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셋째 아우의 물음에 마중걸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걱정할 것 없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간, 아주 조금 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는 있지만 셋째의 말처럼 칼받이로 쓰이진 않을 테니.
– 칼받이가 아니면 화살받이로 쓰겠지. 고맙소. 대형 덕분에 우리 전부 인생 종 쳤소.
– 어허, 그럴 일 없대도!
– 아니, 대형은 뭘 믿고 그리 장담하는 게요? 막말로 당장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우리 처지 아니오?
– 그건…….
– 주위를 좀 둘러보시오. 살면서 한번 보기도 어려운 초절정 고수만 벌써 몇 명인지. 저런 괴물들이 등 쿡쿡 찌르면서 눈치라도 주면, 우리 같은 놈들은 뭐 빠지게 달려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요.
울분을 토해 내는 듯한 셋째 아우의 전음을 시작으로, 다른 의형제들의 토로가 빗발쳤다.
– 우리를 완전 도적놈들 취급하는 종남파 말코 도사들에, 바로 그 흑야왕에, 말로만 듣던 화왕과 반쯤 미친 것 같은 젊은 제자 놈까지 있지.
– 특히 대형 코앞에 있는 저 진태경이라는 놈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성문 지나기도 전에 삼도천 건널 뻔했던 거 잊었습니까?
– 염병, 이러려고 마적단 때려치웠나. 솔직히 말해서 저희의 과거가 썩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탈 한번 해 보기도 전에 때려치우지 않았습니까? 주야장천 칼만 벼리다가 막상 뽑아 보지도 못했구먼.
– 갈! 생각해 보니까 더럽게 억울하네. 우리가 지금껏 약탈을 했어, 무고한 양민들을 죽이길 했어, 이제 좀 마음 잡고 한탕 해 보자 할 때 대인(大人)을 만나 개심한 거 아니오? 좀 착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데 진짜 너무하네.
– 둘째 형님 말이 맞소. 우리가 상판이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렇지, 다른 놈들처럼 흉악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고 다녔으면 대인께서 가만히 놔뒀겠냐고. 안 그렇소?
서러움이 한가득 담긴 전음들을 듣고 있자니, 마중걸 역시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울려올 지경이었다.
맞다.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가.
물론 전직 마적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하늘을 우러러 맹세코 벌 받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고 이런 취급을 받았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나 않지.’
양민을 상대로 약탈?
굳게 마음을 먹어도 막상 쳐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했다.
이미 다른 마적단에 의해 싸그리 털린 그들에게서 무엇을 뜯어낼 수 있겠나. 배가 고파 울지도 못하는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일가족을 위해 되려 식량을 내어준 적도 부기지수였다.
뿐인가.
겉보기에만 흉신악살(凶神惡殺)이지, 마중걸은 포함한 일곱 의형제는 천성부터가 겁이 많았다.
그렇기에 양민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고, 간혹 드물게 녕하성으로 상행을 온 배짱 넘치는 상단과 마주치더라도 통행료만 받고 보내줬다.
이유?
간단했다.
‘무서우니까.’
이 흉흉한 세상에 제대로 된 호위 병력도 없이 녕하성 같은 무법지대를 드나들 리가 있나.
어느 표국이나 상단이건 최소 수십의 칼잡이를 대동하는 것이 당연했고, 서로가 대치한 그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마중걸은 흉악한 상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면 됐다.
‘결국, 피를 볼 셈인가?’
마두 뺨치는 인상과 준엄하기 그지없는 어조가 합쳐지면 훌륭한 대화 수단이 된다.
그 상대가 표국이든, 상단이든, 혹은 살인에 도가 트다 못해 우화등선을 목전에 둔 마적단이든.
당시만 하더라도 무공이 일천했던 마중걸과 여섯 의형제들은 그렇게 하나의 마적단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인’이라 불리는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리고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대인의 존재를, 마중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굳게 믿고 있었다.
– 모두 그만!
일순간 마중걸이 힘주어 흘려보낸 전음에, 등 뒤에서 빗발치던 의형제들의 토로가 뚝 끊겼다.
그리고 마중걸은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하니 대인께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겠느냐?
– 음.
– 그건 그렇군.
– 대형이면 몰라도 대인이라면 다르긴 하죠.
– 그렇지. 대형은 못 믿어도 대인은 믿지.
– 듣고 보니 그러네.
– 웬일로 맞는 말을 하는구려.
뭔가 곱씹을수록 기분이 묘해지는 답변들이었지만, 마중걸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전음을 이어갔다.
– 녕하에 소식을 전한다는 빌미로 애들 몇 명 돌려보냈으니 필시 대인께도 이 소식이 전해질 터. 그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때, 셋째인 주먹코가 불쑥 끼어들었다.
– 그런데, 그것도 대인께서 멀쩡하실 때 이야기 아닙니까?
– 뭐?
– 아니, 그렇잖아요. 대형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그분이 워낙에 좀…… 오락가락하시니까.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마중걸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 괘,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굳이 마중걸의 자신 없는 대답이 아니더라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다른 의형제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하, 씨. 셋째 형님 말 듣고 나니까 좀 쎄한데.
– 하지만 최근에는 그나마 멀쩡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같은 것도 이것저것 알려 주셨던 거죠.
– 그랬지. 그랬는데…… 언제 훼까닥할 지 모르는 게 그분 아니냐.
– 대인이야 처음 뵀을 때부터 이상했지. 머리는 온통 봉두난발에, 며칠을 안 씻었는지 얼굴도 새카매서는 완전히 거지꼴이 따로 없었잖소.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 이거 큰일인데. 지금 대인께서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면 애들이 찾아가도 무용지물일 것 아니오?
깊어지는 의형제들이 근심 속,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머리를 굴리던 마중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어쩔 수 없군. 우리 중 하나가 직접 가는 것이 좋겠다. 그나마 자주 보던 얼굴들을 마주하신다면 하루라도 빨리 정신을 차리실지 모르니.
– 우리 중 하나라면, 누구?
– 글쎄. 지금부터 정해 봐야지.
– 정한 다음에는, 어떻게 보내려고? 지금 상황에서는 어려울 텐데?
– 그건 대형인 내가 잘 알아서 해결할 일이니까 걱정 말…… 아니 잠깐만.
문득 전음을 멈춘 마중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 그런데 아까부터 영 말이 짧은 게, 혓바닥이 반 토막이라도 났나. 어느 싸가지 없는 놈이냐? 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육성이 마중걸의 귓가를 파고든 것은.
“난데.”
“……?”
“나라고.”
설마. 아니겠지.
내심 중얼거린 마중걸은, 달싹이는 입술을 가리기 위해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살벌하게 웃고 있는, 그 싸가지 없는 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어어.”
귀신에라도 씐 것처럼 부르르 떠는 마중걸을 향해, 진태경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한테 해 줘야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