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2
#1021화
사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났겠나.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는 이 바닥에서 괜히 어느 한쪽의 권위를 내세워 봤자 반감을 사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하지만 동시에, 권위라는 것은 적재적소에 내세웠을 때 제법 큰 효력을 발휘하고는 한다.
바로 지금처럼.
“상산후(上山后)…….”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지막한 침음성이 찰나의 침묵을 깨트린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 내 손에 들린 호패를 크게 뜨인 눈으로 응시하던 사마공이 입을 연 것 또한 그때였다.
“권유가 아닌, 명령이라.”
모래알처럼 건조한 음성에 이어, 차갑게 식은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재미있군. 참으로 재미있어.”
말과는 달리 입꼬리가 경직된 사마공의 모습에,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으셨다니 저도 기쁘긴 한데, 소감보다는 대답을 듣고 싶네요. 아시다시피 현재로서는 일각이 여삼추라.”
“지금 그 대답을, 조금 전 자네가 했던 말이 전부 진심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나?”
“어라, 혹시 아직도 이해 못 하셨습니까? 희한하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한 것 같은데.”
“……!”
“뭐, 정 그러시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기련산에 짱박아 놓은 병력들,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대설산에 집결시키세요. 이건 상산후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수뇌부들 사이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흑야왕 사마공이 누구인가.
공동파와 함께 감숙성을 양분하는,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독보적인 입지를 확보한 일대의 패자다.
아직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대로 모든 사태가 수습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극심한 타격을 입은 공동파는 흑룡마문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사마공을 위시한 수뇌부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동자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막중한 책임과 목숨을 짊어진 일파의 영수(領袖)들이 아니라 단순한 도박 중독자와 같았다.
수만 명의 목숨을 건 거대한 도박판에서, 손에 든 골패나 만지작거리는 얼간이들.
권위는 이럴 때 써야 한다.
비록 그것이 극심한 반발과 분란을 초래하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뇌부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갈수록 도를 지나치는 언행이구려.”
누군가 해서 봤더니 제법 눈에 익은 얼굴이다.
이백여 명 정도의 문도를 거느린, 감숙성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중견 문파의 문주.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사마공의 지척에 있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욱 낯익은 자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측근이라고나 할까.
“한 말씀 드리자면, 본인은 석 문주의 말에 동의하는 바요.”
“진 소, 아니 대협께서 지금껏 보여 주신 의협심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지 않겠소이까?”
“비록 작금의 대국 황실이 암천이라는 대적에 맞서 함께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 한들 무림의 일에 열후(列侯)라는 직위까지 앞세워 이리 강압적으로 나오는 것은 좀.”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눈치를 보며 한 마디씩을 얹는 이웃사촌들의 응원 덕분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별다른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적천강의 모습 덕분일까.
석씨 성을 쓰는 문주는 한층 용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마치 주인의 기분을 살피는 충견처럼,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마공을 힐끗 바라보며.
“보시오. 다들 같은 생각이지 않소. 또한 여기 계신 사마 문주께서도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끝에…….”
이쯤 되면 무슨 헛소리를 더 하려고 하는지 자못 궁금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그리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어지려는 말을 가로막은 내가 조용히 덧붙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예의 문주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있다면, 어쩌시겠소?”
“참으세요.”
“지금…… 뭐라고 했소?”
“더럽고 치사해도 참으시라고. 막말로 기분이 더럽다고 한들 뭐 어쩔 겁니까. 천자, 아니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친히 임명하신 열후가 개좆으로 보여요?”
“그,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니면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으시든지. 내가 폐하께는 비밀로 해 드릴게. 이제야 겨우 무림맹이랑 손잡고 으쌰으쌰 하고 있는데 이런 일 생기면 괜히 서로 안 좋잖아. 응, 안 그래요?”
지금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눈앞의 문주를 향하고 있지만, 시선은 아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사마공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다.
“인상 깊은 말이로군.”
우두머리가 나서자 삽시간에 쥐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좌중.
마침내 입을 연 사마공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말이 맞네. 나 역시 대국에 속한 백성 중 한 사람. 황제께서 임명한 열후의 명을 따라야겠지.”
“……!”
“……!”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마 그들은 사마공이 이토록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물론, 나로서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 말씀은, 제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겠네. 이번에 한해서만큼은 내 한 걸음 양보하지.”
“두 번은 없다는 뜻이군요.”
“어쩌겠나. 곧 죽어도 지켜야 할 체면과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으니. 아마 이 정도는 자네나 저기 계신 노 선배께서도 양해해 주시리라 믿네.”
이제는 흐릿하게나마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사마공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빛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이자, 도대체 뭐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아니, 좀처럼 엿볼 틈새를 주지 않는다.
‘일부러 강하게 나갔는데도, 별다른 동요가 없다.’
내가 다짜고짜 열후의 권위를 내세워 찍어 누르려 한 것은, 단순히 지금의 상황이 시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아무리 무거운 만근거암(萬斤巨巖)이라 할지라도 충격을 받으면 흔들리는 법.
나는 사마공의 반응을 통해 그의 의중을 유추하고자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 중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마공과 뜻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하지만 약간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던 후자와 달리, 전자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리고 정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한, 사마공과 나는 한 울타리에 속한 아군이었다.
“앞서 자네가 말했듯이 현재로서는 일각이 여삼추인 듯한데, 뭔가 더 할 말이 남았나?”
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을 통해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없습니다.”
“좋네. 하면 즉각 사람을 보내어 기련산의 모든 병력을 끌어오도록 하지. 종남 역시 이에 동의하시는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사마공을 번갈아 바라보던 풍운검군이 입을 열었다.
“당장 대설산마저 무너지면 감숙은 풍전등화나 다름 없는 상황. 빈도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소.”
“그럼 되었구려. 각 가주와 문주들께서는 휘하의 무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빈틈없이 준비시켜 주시오. 늦어도 한나절 안에는 놈들보다 앞서 대설산에 도착해야 하니.”
눈치를 살피던 감숙 무림의 영수들이 포권지례를 취하자, 서둘러 다시 말안장에 오르려던 사마공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를 잊고 있던 사람처럼, 나직한 탄성과 함께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부탁이라면.”
“잠시 빌려 갔던 내 아들놈을 자네에게 다시 맡길까 하는데, 어떤가?”
그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을 크게 뜬 그때, 사마공이 너털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본 혈육이 반가워 며칠이나마 곁에 두었을 뿐. 지금 같은 전시 상황에서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 하지 않겠나. 흑룡마문의 소문주이기 이전에, 화룡각의 일원이니. 그렇지 않으냐?”
잠시 망설이던 사마표가 이내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과연 무슨 속셈일까.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충분히 사마공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결코 내색해서는 안 된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과 어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안 그래도 언제쯤 돌아오나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럼 우선은 승낙한 것으로 알고 잠시 후에 후미로 돌려보내도록 하겠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부자간의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빙긋 웃어 보이는 사마공의 모습에서, 나는 믿고 싶지 않았던 짐작을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사마표는 화룡각의 일원이기 이전에, 사마공의 피를 이은 혈육이자 흑룡마문의 소문주라는 것을.
지금부터는 동료가 아닌, 첩자로서 함께하리라는 것을.
‘빌어먹을.’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나는 깊게 포권을 취하고 돌아섰다.
* * *
두두두두두!
오천에 달하는 인마(人馬)는 출발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뒤흔들렸고, 굉음과 함께 피어오른 먼지구름은 혹시 모를 이목을 가려 주기에 차고 넘쳤다.
“너를 진태경의 곁에 머무르게 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느냐?”
사마공은 물음과 함께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되돌아온 음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가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짐작하는 그대로다.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
“어려운 임무로군요.”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괜한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되니까요.”
이미 명령을 받아들인 사마표의 대답에, 사마공은 내심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유를 묻지 않고, 의문을 품지 않는 것.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가 아들에게 바랐던, 동시에 되찾기를 바랐던 모습이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궁금하지는 않으냐?”
“그저 명을 따를 뿐입니다. 필시 본문을 위한 일일 테니까요.”
망설임 없는 대답을 들은 사마공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맞다. 전부 우리 일가(一家)와 흑룡마문의 부흥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두 네 것이 될 테지. 그때는 명실상부한 감숙성의 패자요, 중원까지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은…….”
작게 말꼬리를 흐리는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
“……!”
“당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틀어졌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떤 훼방이 있더라도,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직하게 덧붙인 뒷말이 바람에 파묻혀 사라진다. 야망으로 번뜩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들은 공손한 포권지례와 함께 말고삐를 돌렸다.
조금 전, 사마공이 진태경에게 말했던 애틋한 부자간의 인사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