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3
#1022화
물경 오천을 아우르는 인마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한 근이라도 무게를 가볍게 하고자 최소한으로 지니고 있던 식량과 물자도 버렸고, 말들의 체력 안배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채찍을 휘둘렀다.
혹여 말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두 발로 뛰었고, 모든 공력을 쏟아부어 경신법을 펼쳤다.
제법 수련을 쌓은 무인이라 할지라도, 극도의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강행군.
특히 감숙 무림인들과는 달리, 두어 번의 짧은 휴식이 고작이었던 종남파와 화룡각 대원들에게는 마지막 한나절 동안의 시간이 마치 십 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한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짧은 강행군 덕분에, 우리는 등 뒤에서 비쳐오는 서광(曙光)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설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설산(大雪山).’
명칭에 담긴 의미 그대로, 새벽의 여명을 받아 빛나는 눈 덮인 산맥은 눈이 부시도록 희었고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이질적인 것은 이 변덕스러운 기후일지도 몰랐다.
‘분명히 한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위가 온통 사막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눈을 펑펑 쏟아내는 하늘을 힐끗 바라본 나는 이내 다시 대설산을 바라보았다.
구름과 맞닿은 수십여 개의 높은 봉우리와 굽이진 산맥.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어둠에 잠겨 있는 거대한 자연의 장벽은 고요했고,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가까워지는 오천의 인마 사이로는 경계와 불안감이 감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나절 전, 공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돈황(敦煌)의 최전선이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소식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물론 거리와 시간을 따져봤을 때, 대설산이 이미 암천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가능성은 적지만…….’
전쟁은 확률로 수식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괴물이다.
단순히 사술(邪術)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면 더더욱.
‘아무리 그래도 공동파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지만.’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공동파의 전력은 구파일방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장문인을 필두로 무려 세 명의 초절정 고수를 보유했고,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본산 제자들의 무공 역시 출중하다는 것이 호사가들의 평가.
그런데도 며칠은커녕 불과 한나절도 버티지 못했다니, 이미 암천과 여러 번에 걸쳐 충돌했던 나조차도 놈들의 전력을 쉽사리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분명 사전의 방비도, 전력도 충분했을 텐데.’
공동파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세 명의 초절정 고수와 일천의 제자들.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결집한 물경 일만의 아군.
마중걸이 가져온 정보 덕분에 암천의 대군세가 최소 삼만에 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성(守城)과 공성(攻城)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나는 암천이 그 정도의 격차를 뛰어넘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아군을 짓뭉갰다는 소식에, 문득 한 가지 짐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놈들 중에 최소 세 명 이상의 초절정 고수가 존재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엄청난 고수가 있겠지. 그것도 압도적인 무위로 전장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무림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무림인이 아니듯, 이른바 초인(超人)이라 불리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니까.
산 밑에 있는 이들은 모른다.
저 거대한 산자락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얼마나 가파른 협곡이 존재하는지.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엇비슷하게만 느껴지는 수십여 개의 산봉우리들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얼마나 제각각의 높낮이를 지녔는지.
공동파를 포함하여 일만에 달하는 아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초인들의 격차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 역시 엄청난 전력이지만, 과연 암천이 이 사실을 모르고 감숙성에 수만의 대군을 쏟아부었을까?’
나와 적천강. 종남파의 세 노도사와 흑야왕 사마공까지.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초절정 고수만 무려 여섯이고, 감숙 일대를 가로지르는 수천의 인마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기 마련.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놈들이 감숙으로 진격한 이유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네 명의 마군과 마후를 잃었음에도 그토록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림혈사 이후 종적을 감추었던 혈주(血主)?
아니면 지금껏 암천이 드러내지 않았던 또 다른 전력?
그것도 아니라면…….
‘천주(天主)?’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그 두 글자에, 본능처럼 등골이 서늘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불현듯 울려 퍼진 날카로운 파공성.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자, 대설산의 깊은 산자락에서 차례대로 솟구치는 불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펑, 펑, 퍼벙!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지막 세 번.
짧은 시간 차를 두고 연달아 허공을 물들이는 폭죽과 함께, 새하얀 옷을 뒤집어쓰고 있던 산자락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저건.’
신호다.
대설산을 점령한 아군이 폭죽과 횃불을 통해 보내는 신호.
그와 동시에 한껏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뽑아 들 것처럼 검파에 손을 얹고 있던 혁무진과 송일섬,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주화란과 남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그건 한나절 전부터 다시 화룡각에 합류한 사마표였다.
‘……저 녀석.’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다.
왜 줄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지.
모두가 긴장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던 와중에도,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당연하게 신색을 유지할 수 있는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의기소침한 태산과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달리는 사마표의 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나는, 이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들었던 적천강의 물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사마표와 태산. 그 두 녀석이 사마공의 밀명으로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리고 그 밀명이 암천과 연관이 있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글쎄. 어찌해야 할까.
아직도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마음속 의문과 함께, 나는 조용히 말고삐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눈앞의 현실과 달리, 동쪽에서 번져오는 여명은 대설산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커……헉.”
울컥, 검붉은 핏물을 토해 낸 사내는 입술을 떨었다.
눈처럼 새하얗던 도포(道袍)는 피와 먼지로 더럽혀 진지 오래였고,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는 시야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듬직하던 대사형도, 호랑이 같았던 사백도, 조카나 다름없이 생각했던 어린 사매도 이제는 곁에 없다.
죽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 모두가.
목이 잘려서. 심장이 관통당해서. 혹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서.
그렇기에 일어나야 했다. 복수해야 했다.
으득.
온 힘을 다해 악문 잇새 사이로 핏물이 터졌다.
감각이 마비된 탓에 비릿한 혈향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
사내는 자신의 핏물을 생명수처럼 받아 마셨다.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애써 일으켜 세우고 과거 스승으로부터, 사문(師門)으로부터 하사받은 애검을 눈앞의 적을 향해 휘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한 기세로.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힘조차 쥐어 짜내어.
“으. 으아아아!!!”
목의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맹렬한 기합과 함께 검을 내리그은 그 순간. 사내는 불현듯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스륵.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도, 어디선가 불어오던 바람도, 그리고 사내의 손끝을 따라 내리그어지는 검신도.
모든 것이 느려졌고, 동시에 선명했다.
‘이건.’
사내는 전율했다.
삼십여 년의 짧지 않은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 느껴 보았던 감각.
뼈를 깎는 수련 끝에 마침내 절정의 경지에 오르던 그 날,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자신이 그랬다.
무아(無我).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잠시나마 스스로의 존재마저 잊은 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깨달음의 순간.
‘아. 아아.’
사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느덧 되돌아온 초점과 함께 또렷해진 시야 너머로, 느려진 시간 속에 갇혀 버린 한 중년인이 보였다.
아니, 단신으로 일백이 넘는 사문의 식구들을 몰살시켜 버린 괴물이.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빨랐던 괴물은 지금 이 순간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사내의 검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놈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죽어라.’
사내는 확신했다.
지금의 깨달음으로 자신의 무위가 눈부실 정도로 진일보했다는 것을.
오랫동안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어트리고, 마침내 팔성(八成)의 경지에 오른 복마검(伏魔劍)이 눈앞의 괴물을 베어 가르리라는 것을.
그리고 다음 순간.
쐐액! 턱.
빛살처럼 손을 뻗어 검신을 움켜잡은 괴물의 모습에, 사내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느려진 것은 시간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것을.
콰드득!
산산조각이 난 애검과 함께 사내를 둘러싼 비몽(悲夢)이 깨져 나간다. 넋 나간 그의 눈동자에 웃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비쳤다.
“혼자서 허우적대는 꼴이 제법 볼만하던데. 어때,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사내는 멍하니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괴물의 얼굴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너무나도 평범한 중년인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미 그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음에도,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애써 목소리를 쥐어 짜낸 것은.
“왜, 왜 이런 짓을…….”
“뭐?”
괴물, 아니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런 짓을 하냐니. 그런 한심한 질문이 어디 있나? 차라리 어부에게 왜 물고기를 잡냐고 물어보는 게 낫겠군.”
“……!”
“그리고 이건 모두 자네들이 자초한 거야. 얌전히 투항하면 지금 당장은 살려 준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꼭…… 하여간 말코 도사 새끼들은 피를 봐야 말을 듣는다니까.”
한숨을 푹 내쉰 중년인이 딱하다는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자네에게도 원하는 대답을 듣기에는 글러먹은 것 같군.”
이미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문턱에 접어든 사내가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 천벌을 받을 것이다.”
“뭐? 천벌? 지금 천벌이라고 했나?”
눈을 동그랗게 뜬 중년인이 돌연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릿해진 그의 손이 사내의 가슴을 관통했다.
콰직!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격통에 활처럼 휘는 허리. 사내는 조금씩 까맣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각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과 함께.
“보이나? 새로운 하늘이.”
“……!”
콰드득, 털썩!
뽑혀져 나오는 손과 함께 허물어지는 신형.
공동파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공동검룡(崆峒劍龍)의 시체를 짓밟은 중년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펼쳐진 거대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대설산.
곧 무수한 핏물로 붉게 물들 그곳은,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자, 어디 한번 한바탕 놀아 볼까.”
빙긋 미소 짓는 중년인의 등 뒤로, 거대한 울림이 대지를 떨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