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6
#1025화
불과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그들이 수만의 적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띌 수 있었던 것은, 총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들어 올린 백기.
둘째. 그런 백기와 상반되는 새카만 갈기를 휘날리며 맹렬하게 달려가는 거대한 흑마(黑馬).
그리고 마지막 셋째. 무리의 선두를 차지한 세 명의 노인.
‘저 늙은이들은 누구지?’
기감으로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세.
내가 말없이 미간을 좁히던 그때, 어느덧 산 밑자락에 다다른 그들 사이에서 깊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무림맹의 개들은 듣거라!”
심후한 공력과 함께 산맥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음성.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상의가 피범벅으로 물들어 있는 한 노인의 외침에, 적천강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거참, 희한하군. 지금 노부가 이상한 환청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닐걸요.”
“뭐라? 그럼 저 미친놈이 정말 엎드려 부복하라고 했단 말이더냐? 다른 사람도 아닌 노부에게?”
“그 정도까지 콕 집어서 말한 건 아니지만, 뭐 당장은 무림맹 소속이시잖아요.”
“그렇지. 일단은.”
“무림맹의 개라고 했으니까, 그럼 맞네요. 일단은.”
“그래, 노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이거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나 묻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개뼈다귀 같은 놈들이 하늘과도 같은 스승을 모욕할 때, 하나뿐인 제자, 아니 뭐 그 비슷한 녀석은 어찌 행동해야겠느냐?”
“…….”
제자면 제자지. 그 비슷한 녀석은 또 뭐야.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적천강의 모습에,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쉭, 탁.
“어, 어어?”
순식간에 빈손이 되어 어리둥절해하는 무인을 뒤로한 채, 나는 그에게서 빌린 창을 한껏 뒤로 젖혔다.
아니, 빌렸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나는 이 창을 돌려주지 못할 테니까.
스윽.
활처럼 휘어지는 허리와 수축하는 근육. 부드럽게 이완되는 관절이 이어져 하나의 동선을 그린다.
그리고 창날이 겨누어진 방향의 끝에는, 저 멀리 백기를 든 채 외침을 이어 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지금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면……!”
화아악!
마침내 손을 떠난 창이 대기를 찢어발긴다.
맹렬한 파공성마저 앞질러 나아간 그것이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표적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퍼엉!
선홍빛 핏물이 터져 나왔다.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 몸뚱어리가 터져 나간 흑마가 썩은 고목처럼 허물어지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힘차게 이어 가던 노인이 표횰한 움직임으로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초절정 고수.’
험준한 산맥을 타고 전해질 만큼 심후한 공력을 선보였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노인 역시 초인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한 자였다.
비록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가 실린 창을 그리 어렵지 않게 피해 냈으니까.
그리고 저 무리 중 이와 같은 무위를 지닌 것은, 비단 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환영 인사가 제법 거칠구나, 아해(兒孩)야.”
“백기를 든 상대에게 선제공격이라니, 네놈들이 그토록 지껄여 대던 강호의 도리는 땅에 떨어졌느냐?”
나직하면서도 선명한 음성.
잎사귀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수많은 나뭇가지 사이로, 다른 두 명의 노인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너로군. 말로만 듣던 그 어린놈이.”
“열화신룡 진태경. 맞느냐?”
나 역시 공력을 실어 대답했다.
“아닌데?”
“……?”
“……?”
“농담이야. 사실 맞아.”
“……!”
“……!”
언제 봤다고 알은척부터 했던 두 노인은 물론, 앞서 쏘아 보낸 투창에 교통수단을 잃어버린 예의 노인까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이 어린놈의 새끼가 뭘 잘못 먹었는지 초장부터 헛소리를 지껄여서.
둘째. 그 어린놈의 새끼가, 뭘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헛소리에 담긴 공력이 엄청나서.
그리고 나는 저 노망난 늙은이들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경험치를 처먹었는지 일일이 설명해 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다만 이 엄청난 전력을 바탕으로 돈황마저 깨부수고 온 마당에 항복을 권유하는 놈들의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전에,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는 알아야겠지만.
“나도 말해 줬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로 통성명은 해야지? 댁들이 말한 강호의 도리라는 게 있는데.”
세 명 중 중심에 선, 얼굴이 곰보 자국으로 뒤덮인 노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핏덩이 주제에 혓바닥이 짧군. 좋다, 노부들은 천산삼노(天山三老)라 한다.”
순간, 나는 눈을 부릅떴다.
“천산삼노……!”
두 번째, 뚱뚱한 배불뚝이 노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들어 본 모양이군.”
“세상에, 당신들이 바로 그 천산삼노라니.”
내 탄성에 마지막 세 번째, 서열상 막내임이 분명한 고봉밥 정수리 노인이 피식 웃었다.
“정마대전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을 터,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할 마음이 드나?”
내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뭐?”
“아니라고. 별호도 오늘 처음 들었는데, 무슨. 그리고 노는 좀.”
“뭐라?”
“그냥 이러면 알아서 씨부릴 것 같아서 놀란 척해 봤지. 아, 혹시 천산삼노라고 들어 보셨어요?”
고개를 돌려 살아 있는 무림 대백과 사전, 적무위키를 바라보자 머지않아 대답이 흘러나왔다.
“천산에 떠돌이 개 세 마리가 어슬렁거린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지.”
“아하.”
“천성이 개라 그런지, 정마대전 때는 마교에 붙어 중원에서 온갖 개지랄을 떨었다. 노부도 한번 손 봐주려고 벼렸었고.”
“그래서요?”
“그래서는 뭔 놈의 그래서. 노부가 작심했는데도 저놈들이 아직까지 숨통이 붙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전장에서 마주치진 못했군요.”
“타고난 개새끼들이라 코 하나는 좋더군. 기가 막히게 내빼는 통에 그림자도 구경 못 해 봤다.”
“아.”
짧은 대화를 통해 결론을 도출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공력을 실어서.
“좆밥이었구나.”
“……!”
“……!”
“……!”
주위의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노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산 밑의 적들과 달리,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진을 친 아군들의 반응은 달랐다.
천산삼노가 누구인가.
정마대전의 한 자락을 장식한 전대의 초절정 고수이자 모두가 두려워 마지않았던 대마두들이다.
한데 그런 그들을 굽어보며 적천강과 나는 말했다.
그저 한낱 개새끼들이라고. 좆밥이라고.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폭언과 기행은, 아군에게 있어 놀라움과 동시에 안도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그게 내가 노렸던 거고.’
치열한 혈투를 앞둔 지금.
나는 말 몇 마디만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군의 사기까지 끌어 올렸다.
고작 이 정도로 불리한 전세가 단번에 뒤집히지는 않겠지만, 기세(氣勢)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만약 이 자리에 천주(天主)가 와 있다면, 기세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십만마도의 새로운 하늘.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을 지닌 악(惡), 그 자체.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말아 올린 입꼬리와는 달리, 단 한번도 대면한 적 없던 절대자의 존재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천산삼노를 한낱 사자(使者)로 부릴 정도라면, 놈들을 이끄는 건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마치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문을 읽은 듯, 무시무시한 안광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천산삼노 중 첫째로 짐작되는 곰보 노인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긴말은 필요 없겠군. 마군(魔軍)께서 너희를 보고자 하신다.”
“……뭐?”
마군이라니.
순간 눈살을 찌푸린 나는 적천강을 비롯한 수뇌부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마군이라 불릴 만한 자들은 이미 모조리 죽었다.
각각 동, 서, 북을 상징하는 세 명의 마군과 남만야수궁에서 끝끝내 죽음을 맞이한 남천마후까지.
‘그런데, 또 한 명의 마군이 남아 있다고?’
이 새끼들이 설마 치사하고 멋대가리 없게 동서마군, 서북마후 뭐 이딴 거라도 만들었나 생각하던 그때.
문득 한 사람에게 생각이 미쳤다.
‘혹시, 혈주(血主)?’
근무 중 사망처리 된 직장 동료의 빈자리를 놈이 채우기라도 한 걸까.
적들을 이끄는 총사령관의 존재를 두고 수뇌부들 사이에 낮은 속삭임이 오가려던 찰나, 산 밑에서 재차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마군께서 이르시길, 안전은 보장할 테니 이 제의에 응하라 하셨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암천이 안전을 보장한다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수뇌부 전체는 물론, 나 역시도 저 터무니 없는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다음 순간, 천산삼노의 손짓에 그를 따르던 암천의 무인 하나가 말안장에 매달린 무언가를 꺼내 건네기 전까지는.
후우웅, 툭.
높게 솟구쳐 산 중턱에 떨어진 그것은 아군을 통해 곧장 수뇌부에게 전해졌고, 나는 피범벅이 된 그 커다란 보따리를 열어 보기도 전에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우리 모두가.
쿵. 쿠궁.
“흡……!”
제법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는 수십여 개의 수급(首級)에 곳곳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온 것도 잠시, 그중 낯익은 얼굴을 알아본 사마공이 낮게 중얼거렸다.
“공동검룡(崆峒劍龍)이로군.”
본 적은 없으나, 그 별호는 들어 봤다.
공동파 장문인의 직계 제자이자 중원에는 십봉룡(十鳳龍)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
그리고…… 스승인 장문인과 함께 살아남아 돈황을 탈출했다던 바로 그였다.
“자, 장로이신 두 진인(眞人)도 여기 계십니다.”
“호법원주께서도 유명을 달리하셨군. 도대체 어찌하여…….”
이미 사망이 확실시 된 이들은 물론, 살아남았다고 알려진 자들까지 한낱 수급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공동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핵심 수뇌부가.
“그렇다면 설마.”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문 나를 향해, 풍운검군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도 장문인께서는 놈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모양일세.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돈황에서의 전투가 끝이 아니었다.
끈질긴 추적이 있었고, 끔찍한 살육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마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를 보고자 한다.
단순한 위협이 아닌, 천산삼노를 보내어 협박을 곁들이면서까지.
“아쉽군. 거리가 더 가까웠으면 네놈들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하던 세 늙은이는,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작 이 정도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적천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과거의 두려움이 떠올라서일까, 적천강의 존재감에 잠시 움찔한 천산삼노가 이내 더욱 힘을 실은 음성으로 답했다.
“일천. 아직 일천의 포로가 더 남아 있다.”
“……!”
“네놈들이 앞서 했던 제의를 승낙한다면, 놈들 중 일부를 돌려보내줄 용의가 있지.”
입 안이 텁텁하다. 나는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물었다.
“거절한다면?”
세 마리의 개새끼가 소리내어 웃었다.
“해보겠느냐?”
빌어먹을.
그것으로, 내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