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7
#1026화
놈들의 제안은 이랬다.
첫째. 지금으로부터 한 식경 후, 무장을 해제한 채 중간 지점에서 만날 것.
둘째. 참석 인원은 세 명으로 제한할 것.
그리고 마지막 셋째.
‘그 세 명 중, 반드시 열화신룡 진태경을 포함할 것.’
내가 조금 전 들었던 요구 조건을 떠올리며, 말을 몰아 멀어져 가는 천산삼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네 녀석은 빠지거라.”
단호한 음성과 함께, 적천강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만큼은 안 된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다르긴 한데, 통했네요.”
“무엇이 말이냐.”
“저도 그 말씀 드리려고 했거든요. 이번만큼은 가야 할 것 같다고.”
“……!”
그럴 수밖에 없다.
무려 천 명.
놈들은 일천의 목숨을 망설임 없이 이 도박판에 밀어 넣었고, 이건 결코 우리를 대설산 밑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저 멀리 낭패한 몰골을 한 포로들이 줄줄이 묶여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돈황에서 사로잡혔거나, 패주하여 추격당한 이들일 것이 분명했다.
“보이시죠?”
내 물음에 적천강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열 명도, 백 명도 아니고 천 명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일평생을 무법자로 살아온 세 마리의 개새끼들은, 떠나기 전 자신들이 재판장의 판사라도 되는 것처럼 엄중하게 경고했다.
만약 요구 조건을 하나라도 어긴다면, 저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그리고 나는 저들에게 죽음이 선고되길 바라지 않는다.
“솔직히 저도 좀 후달리긴 하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일평생 동안 잠 설치지 않으려면 가 봐야죠.”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다.
도대체 언제쯤 악몽을 꾸지 않게 될까.
불현듯 드는 생각을 뒤로한 채 짐짓 웃으며 말을 건네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적천강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에헤이, 갑자기 왜 이러셔. 저 말고 저 새끼들을 욕하셔야죠. 양심 없는 새끼들, 크게 이겨 놓고 추격까지 열심히 했네.”
“괜히 밝은 척하지 마라. 하나도 안 어울린다.”
“티 나요?”
“천하의 그 누구보다 뻔뻔한 주제에, 거짓말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것이 네놈 아니더냐.”
“……그런가.”
“만약 사로잡힌 포로가 만 명, 천 명이 아니라 열 명뿐이었어도 갔겠지. 노부가 알고 있는 너라면.”
과연 그럴까.
모르겠다.
벌어지지도 않은 상황에 대해 확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적천강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실 거죠? 제가 말려도.”
“말릴 생각이었느냐?”
“아뇨.”
내가 정색하며 덧붙였다.
“까딱하면 훅 갈 수도 있는데, 노야라도 옆에 있어 주셔야죠.”
그제야 적천강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죽어도 같이 죽자?”
“무슨 그런 살벌한 말씀을 살아도 같이 살자는 얘깁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다르죠.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계속 그러시면 저 섭섭해요. 노야를 향한 믿음, 소망, 사랑. 뭐 그런 거 안 느껴지세요?”
“하여간 혓바닥 놀릴 때만큼은 아주 청산유수가 따로 없구나. 한데…….”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흘린 적천강이, 일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이 말하는 그 믿음이, 저놈들에게도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나는 대답 대신 적천강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그곳에는 논의를 끝마치고 다가오는 ‘저놈들’, 아니 수뇌부가 있었다.
철벅. 철벅.
눈과 비에 젖어 진창이 된 지면 위를 뒤덮는 수십여 개의 발자국.
그 선두이자 중심에, 한 사람이 있었다.
흑야왕 사마공.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렸나?”
아주 잠시, 나는 곧장 본론부터 꺼내 드는 사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저는 이미 결정한 지 오랩니다. 여기 계신 노, 아니 스승님도 마찬가지고요.”
“매우 위험한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조심하게. 고작 일천 명의 포로로 대마(大馬)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놈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결과일 테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적천강과 나는 암천으로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일 순위 경계 대상이니까.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이 놈들에게 준 타격을 생각한다면,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작, 고작 일천 명이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많은 숫자와 생명에 담긴 어마어마한 무게를, 당신은 어떻게 이리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암천이 바라는 그 결과와 당신이 그리는 그림은 얼마나 서로를 닮아 있으며, 조심하라는 경고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이 들어가 있을까.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삼킨 나는, 문득 기억 속에서 떠오른 네 글자를 불쑥 내뱉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렇군. 자네와 노 선배라면 설령 함정이더라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지.”
오래된 바둑 격언을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사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노 선배의 뜻은 잘 알겠네.”
우리의 뜻을 전했으니, 이제 저들의 뜻을 전해 들을 차례다.
“그럼 다른 한 분은 누구십니까?”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총 셋.
나와 적천강은 결정되었지만 다른 한 명이 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내가 내심 예상하고 있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일세. 흑룡마문의 문주로서 기꺼이…….”
“아니오. 빈도가 가겠소.”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 두 줄기의 목소리.
마치 술집에서 자기가 계산하겠답시고 아웅다웅하는 아저씨들처럼, 사마공과 풍운검군은 서로를 만류했다.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오. 장문인께서는 이곳에 남아 계시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겠구려. 그런 측면에서 판단하자면 사마 문주보다는 빈도가 더 적임자일 테니.”
풍운검군의 반박처럼, 그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
사마공은 단순히 일문의 문주가 아니니까.
그는 흑룡마문의 시작과 끝이며, 감숙 무림의 중심이자 핵이다.
만약 불상사가 일어나 사마공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흑룡마문이, 아니 현재 아군 병력 중 과반수를 차지한 감숙 무림 전체가 흔들린다.
그에 반해 풍운검군은 종남파의 장문인이지만, 그의 빈자리를 채울 두 사형이 있다.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은 사람 됨됨이를 떠나, 종남파 내에서 지닌 영향력은 충분한 이들.
그러니 이는 자리의 중요성과 위험함에 있어, 최소한의 리스크를 계산해서 내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남아 있는 사람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아군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옳은 판단이라고 해도,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왜 여기에 있겠나.
세상은 종종 극소수의 미친놈들에 의해 변화한다.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리고 어떤 미친놈은 나와 적천강, 풍운검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후방을 장악할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에 기대어 반박할 여지도,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없어.’
약속했던 한 식경의 중, 이미 절반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러간 상황.
적천강과 조용히 시선을 마주친 나는,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이대로 둘이 가는 게 낫다. 사마공은 어디에 있더라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고, 그렇기에 풍운검군은 더더욱 남아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의견을 모두에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바로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이 불현듯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저벅.
“외람되지만, 감히 제가 두 분께 양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
그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선 아들의 모습에, 깊게 가라앉는 아버지의 눈빛을.
“마지막 한 자리는, 제게 기회를 주시지요.”
또렷한 음성으로, 사마표가 모두를 향해 재차 되뇌었다.
“가겠습니다. 제가.”
* * *
왜일까.
어째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적천강과 사마표의 사이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참아 내기에는, 내 인내심이 아주 조금 모자랐다.
“왜 그랬냐.”
고개는 일부러 돌리지 않았다.
정면을 주시하며 툭 내뱉은 한 마디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왜 자원했냐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정해진 마당에.”
“정해지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겠지. 그렇지 않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사지(死地)에 제 발로 가고 싶은 사람은 없지. 그것이 설령 의기로 드높은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라 하더라도.”
사마표가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장문인을 사지로 보내야 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상황을 막고 싶었을 테고. 그렇지 않나, 각주?”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나 짐작이 아니라, 불과 촌각 전의 상황을 그대로 말로 풀어놓았을 뿐이니까.
사마표가 때맞춰 나서자 종남파 제자들은 반색하며 자신들의 장문인을 극구 만류했고, 감숙 무림의 영수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사마공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이대로 다 가 버리면 유사시에 지휘는 누가 하냐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많은 사람은 어쩔 거냐고.
게다가 사마표는 흑룡마문의 소문주 겸, 화룡각의 일원.
만류하는 명분도, 나설 만한 자격도 충분했고 그래서인지 다들 젊은 놈의 돌발행동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현대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상황이 제법 괜찮게 와꾸가 짜여진 거다.
어느 쪽 대가리가 남아 있는 총대를 메느냐로 눈치 싸움을 하던 와중에, 사마표가 나섬으로써 그들의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으니까.
‘우리 쪽 사람들이야 뭐, 애초에 말려 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고.’
뒤에 남게 된 다른 화룡각 대원들은 별다른 만류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만 인사로 건넸을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모두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아니, 단 한 사람만큼은 예외일지도 모른다.
‘사마공.’
갑작스럽게 나선 아들을 보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순간 깊게 가라앉았던 눈빛은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당황으로 인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걸까.’
왜 그랬냐는 내 물음에, 사마표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 대신 지금 이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쑥 내뱉고 있었다.
“그나저나, 바둑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군.”
“뭐?”
“조금 전에 각주가 말하지 않았나. 대마불사라고.”
말을 돌리는 건가. 아니면 뭔가를 말하고 싶은 건가.
쉽게 예측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예는 무슨. 나는 바둑 같은 거 잘 몰라. 그냥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전부지.”
“어릴 때부터라면…….”
“아버지. 바둑 좋아하셨거든.”
“그렇군. 가주이신 산서괴협(山西怪俠)에 관한 이야기는 얼핏 들어 알고 있지.”
“못 뵌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사마공은 까맣게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는 이 두 번째 세상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은 형들을 얻고, 새로운 동료와 친구들. 또 스승을 만났지만 아버지만큼은 늘 한 분뿐이었다.
인터넷 바둑에서 매번 패배할 때마다 짱깨 새끼들이 치팅 프로그램을 썼다며 정신 승리를 얻어내고, 국내의 모 대기업 전자 종목에 주식을 몰빵하며 대마불사를 외치셨던.
그런 분이었다.
‘아빠, 컴퓨터 화면이 왜 다 파래?’
‘아들아, 하늘은 무슨 색이지?’
‘빨간색.’
‘아니야. 지금은 노을 때문에 그래. 하늘은 원래 파란색이야. 아빠의 주식도 잠깐 그런 것뿐이란다.’
‘구래? 그럼 곧 빨개져?’
‘물론이지. 이 종목은 그러니까, 대마거든.’
‘대마? 그거 안 좋은 거자나. 기분 좋아지는 거.’
‘너 도대체 유치원에서 뭘 하고 다니…… 아니다. 여하튼 이건 그 대마가 아니야. 엄청 큰, 쎄고 뭐 그런 거야. 그리고 이렇게 쎄고 큰 건 쉽게 죽지 않는단다. 바둑에서는 대마불사라고 하지.’
‘아하.’
‘아마 조만간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선이 위로 쑥쑥 솟구칠 거야. 하늘 높이, 노을 진 것처럼 빨갛게.’
‘우음. 그렇구나. 근데 아빠.’
‘응?’
‘지금 엄마 얼굴 봐, 엄청 빨개!’
‘……여보, 언제 왔어?’
피식.
불현듯 터져 나온 실소에 사마표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그냥, 그냥…… 예전에 좋았던 기억이 생각나서.”
“아버지와의 좋았던 기억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마표가 나를 따라 웃었다.
“그렇군.”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릿하고, 씁쓸한 미소.
그런 녀석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 그때, 어느 새인가부터 묵묵히 앞장서서 걷던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둘 다 실컷 웃고 떠들었으면, 이제 불청객을 맞이해야겠지?”
그 순간.
다그닥. 다그닥.
느릿하게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침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