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8
#1027화
그런 이들이 있다.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온 송곳처럼,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선 암초처럼, 황야의 들꽃처럼 단연 눈에 띄는 이들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경치를 감상하듯 여유로운 기색으로 가까워지는 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나아가는 말발굽을 따라 흔들리는 잿빛 머리카락.
그리 준수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이목구비를 지닌 중년인의 동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중년인을 유독 돋보이게 만드는 특색이 있다면, 그것은 화염보다도 붉고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섬뜩한 핏빛 안광(眼光)이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로군. 반갑소, 적 선배.”
선배라는 정중한 호칭과 웃음기가 스며 있는 목소리.
바로 그때였다.
십여 장 밖에서 멈춰 선 중년인을, 정확히는 파충류의 그것과도 같은 동공을 본 적천강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 오른 것은.
“네놈은 설마…….”
“일전에는 서로 갈 길이 바빠 만나지 못했었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만약 선배가 그곳에 있었다면, 구양천 그자도 지금쯤 멀쩡히 살아 있었을 테니. 안 그렇소?”
구양천.
언젠가 적천강에게 들었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다.
한때 오대세가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쳤다는 구양세가의 가주, 아니 마지막 생존자.
마교에 의해 멸문지화를 겪고 복수귀로 거듭난 구양천을 세상은 창왕(槍王)이라 불렀고, 그 위대한 무인은 정마대전의 끝자락에 다다른 어느 날 이름 없는 들녘에서 발견되었다.
일평생 분신처럼 여겼던 한 자루의 창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서.
백 명도, 천 명도 아닌 단 한 사람에 의해.
마교의 그 누구보다 피를 갈구하던 어느 살인귀에 의해.
“혈검마군(血劍魔君)…….”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침음성에 중년인, 혈검마군이 활짝 웃었다.
* * *
노환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다.
늦은 밤 그림자에 숨어 은밀히 찾아온 도둑처럼 머릿속의 기억을 하나둘씩 빼앗아 가니까.
그렇기에 구화산에 머무를 당시, 나는 적천강에게 의도적으로 옛 기억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렇게라도 그의 노환을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해서. 세월의 저주를 일각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제법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간 대화 상대가 없었던 독거노인은 수없이 오가는 말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고, 독거노인의 말벗이 된 젊은 놈은 장장 일백 년을 넘게 살아온 노강호의 기억 속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얻은 정보 중에는, 지금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어느 살귀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 기쁜데. 자네가 날 알고 있다니.”
내가 지닌 시스템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능까지는 없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혈검마군은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수함.
끔찍한 혈겁(血劫)을 쌓아 온 살인마가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감정이었기에,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하긴, 내가 예전에는 한 끗발 날렸었지. 여기 있는 이 친구들도 제법 유명했지만, 뭐 그래봤자 마교 입장에서는 쓸 만한 빈객(賓客) 수준이었으니까.”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혈검마군의 모습에 모욕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와 함께 다시 돌아온 천산삼노는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배, 백번 천번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마군(魔軍)께 범접할 수 있겠나이까.”
“한없이 부족함에도 마군을 모실 수 있게 된 것이, 일생의 영광일 따름입니다.”
때맞춰 혈검마군의 똥꼬를 빨아 재끼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이, 이런 식이면 도대체 하루 몇 번 양치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천산삼노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자지존(强者至尊).
그 누구보다 노골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소위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저들이고, 혈검마군은 천산삼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마두(大魔頭)였으니까.
당연히 천산삼노 역시 세간의 인식으로는 대마두가 맞았다.
일신의 무위도, 정마대전으로 쌓은 흉명도 그리 불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한 식경 전 적천강이 직접 저들의 면전에 대고 말했듯이 그들은 태생이 떠돌이 개와 같았다.
그저 다른 개들보다 훨씬 더 흉폭하고, 날카롭고 강한 이빨을 지녔을 뿐.
하지만 장장 일천여 년에 걸쳐 천하 무림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미친 광신도 집단에서도 유독 미쳐 있던 광견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그 미친개는 이제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 같지만.
“마교라, 당신은 신교(神敎)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내가 불쑥 던진 한마디에, 조금 전 천산삼노를 두고 마교의 빈객 운운했던 혈검마군이 빙긋 웃었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 알면서 묻는군. 새삼스럽게.”
“그래서, 목줄 갈아 끼우니까 밥은 제때 잘 나오고?”
“허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뜬 혈검마군이 적천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 선배. 이거 제자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겁니까? 아무리 가는 길이 달라도 서로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오? 나처럼.”
적천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애미 애비보다는 잘 시켰으니 걱정 말거라.”
멍하니 적천강을 바라보던 혈검마군이 이내 껄껄 웃었다.
“이런. 역시 소문대로구려.”
“네놈은 소문보다 더하구나. 노부가 진즉 잡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
“선배의 불같은 성정이야 내 잘 알고 있지, 전장에 나타났다 하면 쓸만한 놈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죽어 나빠지니, 교주가 진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오.”
“덕분에 네놈도 고생깨나 했겠군. 네놈이야말로 천마가 가장 가까이에 두고 아끼던 충견이 아니었느냐.”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딱히 고생하진 않았소. 죽어 나가는 만큼 죽여 오면 됐거든.”
혈검마군이 웃음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독(天毒), 그 멍청한 늙은이가 뒈졌을 때는 해남파(海南波) 장문인으로도 부족해서 창왕의 수급까지 가져와야 했지만, 뭐 어쩌겠소. 나도 좋아서 했던 일인데.”
“천독? 천독마군을 말하는 것이냐?”
“글쎄, 그 외에 다른 천독이 있던가?”
천독마군은 나 역시도 아는 별호다.
천마의 뒤를 이은 마교의 이 인자이자, 이제는 죽고 없는 사천당가의 태상가주, 독왕(毒王) 당사독조차 넘을 수 없었다던 벽.
그랬던 그는 어느 날 화산파의 제자들과 전장에서 맞닥트렸고, 바로 그날 최후를 맞이했다.
노을을 짓누를 만큼 찬란한 자줏빛 검강을 뿜어내는 누군가에 의해.
“검성(劍星), 아니 이제 맹주라고 불러야 하나? 여하튼 매종학에게는 내심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소. 천독 그 늙은이, 평소에 나를 보던 시선이 영 심상치 않았거든. 다행히도 늦지 않게 죽어준 덕분에 일이 잘 풀렸지.”
신이 난 얼굴로 떠들어 대는 혈검마군을 말없이 지켜보던 나는, 놈이 마지막에 덧붙인 한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고?’
고수의 상실은 곧 전력의 공백.
그런 의미에서 천독마군의 죽음은 마교에 있어 엄청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한다는 건…….
“그때부터였군. 목줄을 바꿔 낀 것이.”
내가 불쑥 던진 말에 혈검마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목줄을 바꿨다는 표현은 좀 그렇긴 하지만…… 뭐, 편한 대로 생각하게.”
정마대전이 종결되기도 전에 암천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태원진가의 대장로, 남만아수궁의 백상과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동천마군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암천은 정마대전의 초기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정마대전의 시작이, 암천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도 있다.’
순간 서늘해지는 등골을 느끼며, 나는 혈검마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지?”
“언제부터냐니,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너희들이, 천주(天主)가 나타난 것이.”
그 순간.
화아아악!
바람이, 강렬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지면을 뒤덮고 있던 새하얀 눈이, 서리가, 그 안에 숨어 있던 흙과 모래가 사방으로 휘날리다 빠르게 가라앉았다.
파스슥.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자연의 부산물, 그 아래에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혈검마군이 있었다.
“예의가 없군. 확실히.”
웃음기가 사라진 입가와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
얼핏 들으면 침착해 보이는 놈의 음성 안에는, 차가운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참으로 희한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그분께서는 굳이 왜…….”
문득 말꼬리를 흐린 혈검마군이, 이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뭐,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언제나 그렇듯이.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일세.”
무엇을, 이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다음 순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혈검마군이 말을 이어갔으니까.
“열화신룡 진태경. 자네는 강해. 내가 피 튀기는 혈전(血戰)을 마다할 만큼. 그리하여 혹 그분께 패배라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을까 우려될 만큼.”
보인다. 들린다.
나를 향한 혈검마군의 눈빛과 목소리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 안에 담긴 순수한 경탄(敬歎)이.
그리고…….
그 안에 미세하게 숨어 있는 살기(殺氣)가.
“자네의 그 무한한 잠재력과 의협심에 감복했네. 이것만큼은 진심이야.”
“……!”
“……!”
“……!”
그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적천강. 마지막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사마표까지.
우리가 지면을 박차고 쇄도하는 순서와 시간의 흐름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아마도 그 안에 담긴 간절함만큼은 같았을 것이다.
드득.
발끝을 따라 흙이 파인다. 모래가 부서진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한껏 수축한 하체의 근육으로 흘러 들어가고, 이내 폭발했다.
콰아앙!
느려진 세상 속, 풍경이 뒤바뀌었다.
십여 장의 공간을 지우며 우리는 쏘아졌다.
지금 이 순간 적천강과 나는 두 줄기의 맹렬한 불꽃이었고, 사마표는 소리 없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불꽃과 바람을 가로막는 세 개의 벽이 솟아올랐다.
“갈(喝)-!”
목소리는 셋이요, 외침은 하나다.
천산삼노.
한낱 떠돌이 개 취급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지닌 천산의 세 마두가 참고 있던 분노와 기운을 터트렸다.
아득한 세월 동안 서로가 서로를 위해 맞춰 왔던 자연스러운 합격술(合格術)이, 세 개의 벽을 뭉쳐 하나의 거대한 벽으로 탈바꿈시켰다.
콰앙!
천지를 떨어 울리는 일합(一合)의 격돌.
그리고 찰나를 쪼개고 쪼갠 짧은 시간을 가득 메운 그 거대한 굉음과 힘의 파동 속에서, 하늘을 향했던 혈검마군의 손이 마침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언덕 위에서 오직 하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무수한 칼날들과 같이.
“참(斬)!”
서걱! 푸푸푹!
일천여 개의 목이 굴러떨어지던 그 순간, 혈검마군과 눈이 마주친 나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놈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