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9
#1028화
그 순간, 혈검마군은 웃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 눈매에 담긴 것은 순수한 즐거움과 흥분이었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의 떨림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한 청년에 대한 기대감.
‘그래, 그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다.’
경악과 분노로 눈을 부릅뜬 진태경을 바라보며, 혈검마군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손짓 한 번으로 일천의 생명을 지워 버렸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태경에게 모든 감각을 기울였다.
죽은 이들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미안함도 없었다.
마교에서 태어나 마교에서 자란 그다.
어미의 배 속에서부터 타고난 잔인한 성정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익힌 마공(魔功)을 만나 꽃을 피웠고, 이는 천마가 거느린 이십사 인의 거마(巨魔) 중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이제 그의 관심사는 오직 진태경뿐이었다.
자신의 주인이 예의주시하는 중원 무림의 신룡이자 기린아(麒麟兒).
혈검마군은 저 어린놈의 모든 것을 보고 싶었다.
손끝에서 펼쳐지는 무위를, 토해 내는 감정을, 그 안에 숨겨진 특별함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내게 보여다오. 어서!’
그리고 혈검마군이 마음속으로 애타게 부르짖은 그때.
화아아악!
거대한 미증유의 기운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솟아올랐다.
“누구부터 죽여 줄까.”
진태경.
차가운 불길이 쏟아지는 청년의 눈빛에, 순간 혈검마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 * *
천산삼노(天山三老)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감정은 의심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한 자루의 창이 진태경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어떻게?’
비록 이제는 물거품이 되어 버린 약속이지만, 만남의 조건 중 하나는 무장 해제였고 진태경 측은 그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하여 그들 모두는 빈손으로 이곳에 왔고, 그 점은 천산삼노에게 있어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화왕이라는 무시무시한 노괴(老怪)만 감당할 수 있다면, 무기도 없는 핏덩이 두 놈쯤이야 어려울 것이 없을 테니까.
비록 그중 하나가 그 대단하다는 열화신룡 진태경이라 할지라도, 그들 세 사람은 천산을 넘어 중원에까지 악명을 떨친 전대의 대마두.
그렇기에 천산삼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최소한 진태경의 손에 창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리고 만년한철로 이루어져 있음이 분명한 저 신병이기(神兵利器)에,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힘이 덧씌워지기 전까지는.
우우웅.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창날이 흔들린다.
아니, 주변의 공기가 잘게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고작 수년 전 약관을 넘긴 청년의 몸에 담기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정순한 기운이 창날을 휘감으며 솟아올랐다.
츠츠츠츠.
호사가들이 강기(罡氣)라 부르는 그것은 더 이상 눈부신 청백색이 아니었다.
‘이건.’
세 늙은이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 힘을, 이것을 도대체 뭐라 정의해야 할까.
창날에 깃든 강기는 마치 깊은 바닷속 심해처럼 거무스름했고, 한편으로는 극에 달한 불꽃처럼 푸르게 타올랐으며, 또한 벽력(霹靂)과도 같은 번뜩임이 있었다.
‘다르다.’
천산삼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기운은 자신들이 일평생 쌓아 온 기운과는 종류가, 궤가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천산삼노로서는 그 정확한 실체를 알 도리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전해지는 왠지 모를 익숙함이 진태경이 천력마(天力魔)로부터 넘겨받은 공력 때문이라는 것도.
마공으로부터 비롯된 저 불길한 힘이, 열화문의 겁화(劫火)와 하북팽가의 벽력으로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저 검푸른 빛줄기에 담긴 힘이, 얼마나 거대하면서도 예리한지도.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은, 지금 진태경의 곁에 있었다.
‘허.’
화왕 적천강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태경을 응시했다.
짐작은 했다. 다만 직접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등봉조극(登峰造極).
하늘과 맞닿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청년은, 이제 나이와 관록 따위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다른 누군가가 거쳐 갔던 것이 아닌, 오직 그만의 길을 개척해 낸 위대한 무인.
적천강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네 녀석이 이룬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느냐고.
또한 말해 주고 싶었다.
중원 무림을 통틀어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른 그들을, 사람들은 모든 경의를 담아 이렇게 부른다고.
십왕(十王).
광활하기 그지없는 하늘과 세 개의 별.
그 아래에 우뚝 서 있던 열 명의 거인.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진태경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로 열한 번째 거인임을.
하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적들이 휘두르는 시퍼런 날붙이에 피를 뿌리며 허물어진 과거의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영웅임을.
일천 명의 생명이 사그라진 이 전장에서,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실로, 눈부시구나.’
적천강은 등골을 찌르르 울리는 전율을 느꼈다.
동시에 넋 나간 얼굴로 진태경을 바라보는 천산삼노의 모습에서, 서서히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노야.”
나직한 음성.
무수한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괴로움과 그로 인한 분노가 들끓는 부름에 적천강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결심한 대로 행하거라.”
천산삼노는 알지 못했다.
이 뜻 모를 한 마디가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는 제자에게 건네는 스승의 신뢰와 격려임을.
그리고 그 짧은 대화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음을.
슈확!
그 순간, 한 줄기의 예리한 바람이 불었다.
화염인지, 파도인지, 벽력인지 알 수 없는 검푸른 섬광이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들이닥쳤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속하고, 거대한 힘을 실은 채.
서걱!
일노(一老)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오직 본능에 의지하여 비틀어 낸 몸뚱어리를 따라, 붉은 핏물과 끔찍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커흑!”
섬광이 번뜩였고, 그것이 전부였다.
마지막 순간 흐릿한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면 이미 구천을 떠도는 고혼(孤魂)이 되었을 터.
‘도대체, 도대체 어찌 이런……!’
이를 악물어 고통과 충격을 가까스로 참아낸 일노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길게 베여 나간 가슴팍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와 힘 앞에서 물러난다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든든한 두 의형제가 있었다.
“대형!”
“안 돼!”
이노(二老)와 삼노(三老)가 비명처럼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제각각 한 자루의 도와 검을 쥔 그들의 손이 흐릿해지며 한 방향을 향해 휘둘려졌다.
마치 살수처럼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들이닥친, 진태경을 향해.
콰아아앙!
하나의 창과 두 개의 도검.
수 갑자의 기운이 실린 세 자루의 병장기가 맞닿으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사방을 떨어 울렸다.
뒤집히는 땅거죽과 터져 나가는 공기.
동시에 지금껏 느껴 본 적 없을 만큼 극렬하게 들끓는 힘의 파도 속에서, 두 노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차가운 불길이 쏟아지는 진태경의 눈동자와,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창대를 굳게 움켜쥔 손을.
그리고 그 손은, 하나뿐이었다.
“조……!”
퍼엉!
조심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을 틈도, 그럴 시간도 주지 않은 진태경의 일장(一掌)이 삼노의 가슴을 후려쳤다.
‘아.’
순간 아득해진 시야 속, 삼노는 뼈와 살을 부수고 몸속 깊은 곳으로 침투하는 끔찍한 열기를 느꼈다.
우드득.
뒤늦게 들려온 섬뜩한 파열음이 메아리처럼 멀게 느껴진다.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느끼며 허물어지는 삼노의 귓가에 익숙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노옴!”
“셋째야!”
틀림없다. 형님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두며 개새끼라고 온갖 손가락질을 했어도, 마치 한배에서 나온 친형제처럼 자신을 아껴 주었던 그들이었다.
까득.
삼노는 혀를 깨물며 허물어지려는 신형을 바로잡았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고작 이따위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마군이, 그 힘이 있다.’
삼노는 확신했다.
지금쯤이면 틀림없이 혈검마군이 나섰을 것이라고.
비록 정신이 혼미한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명령 한 마디면 이 극심한 내상과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지?’
시야가 흐릿해진 지금에도 초절정 고수로서의 감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비틀비틀 신형을 바로잡는 삼노의 기감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의 두 의형이 온 힘을 다해 진태경과 격돌하는 이 순간에도, 혈검마군의 기척은 여전히 십여 장이나 떨어진 그곳에 남아 있었다.
“마군, 마군이시여!”
콰드득, 쾅!
창날 끝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삼노의 애탄 부르짖음을 집어삼켰음에도, 그 부름을 듣지 못할 혈검마군이 아니었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사방에서 요동치는 거대한 기운들에 비하면 아주 미세한, 그렇기에 더욱 은밀히 다가온 무언가가.
쐐애액, 푹!
“……!”
순간 덜컥 굳는 신형.
등줄기를 관통한 서늘한 날붙이와, 그 끝에 실린 도기(刀氣)의 존재를 깨달은 삼노는 빛살처럼 돌아서며 팔을 휘둘렀다.
후웅, 펑!
압축된 공기가 폭발했지만,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후려치고 멍하니 굳어 버린 삼노의 시야에, 서서히 선명해지는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칠흑처럼 새카만 흑의와 담담한 눈동자.
이제 겨우 이립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놈의 목소리는,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낮고 침착했다.
“항상 등 뒤를 조심했어야지. 그런 빈틈을 보이면 나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소.”
“네놈……!”
으직.
삼노는 피가 흐를 만큼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화왕 적천강도, 열화신룡 진태경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신경도 쓰지 않았던 어린놈이 언제 숨겨 왔는지 모를 비수를 그의 등줄기에 박아넣었다.
그것도 한순간의 기습으로.
“이러고도, 이러고도 네놈이 정파인이라 할 수 있느냐!”
의미도 명분도 없는 삼노의 공허한 외침에, 사마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괜찮소. 난 사파라.”
“……!”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문득 말을 멈춘 사마표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동시에 무복치고는 풍성한 소매 사이로, 또 하나의 섬광이 번뜩였다.
“비수는 넉넉하게 챙겨 왔소.”
쉭!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뒷말을 지우며 울려 퍼진 예리한 파공성.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그 빛줄기를 바라보며, 삼노는 내심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적어도 앞서 진태경에게 입은 극심한 내상과, 조금 전 등줄기에 틀어박힌 비수로 인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뻐억!
정확히 미간을 관통한 비수와 함께, 삼노는 어두워지는 세상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지켜만 보던 적천강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이제 한 놈. 아니, 둘.”
이미 숨이 끊어진 삼노는 보지 못했다.
그가 최후의 숨결을 내뱉던 그때, 검푸른 강기가 깃든 백염의 창날이 이노의 목줄기를 갈랐다는 것을.
서걱!
솟구치는 피 분수 아래,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일노가 신형을 파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