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0
#1029화
툭. 투두둑.
뜨겁고, 축축하다.
분수처럼 높게 솟구쳤던 핏물이 정수리를 적시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목이 잘린 시체가 된 누군가는, 앞으로 영영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 [Lv.135 고궁보]를 처치했습니다!
– 대량의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철퍽!
뒤늦게 중심을 잃은 신형이 고여 있던 피 웅덩이 위로 허물어졌다.
앞서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노(二老)의 머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형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제 이승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의형제를.
“이제 한 놈, 아니. 둘.”
때맞춰 들려온 적천강의 한마디가 삼노의 최후를 알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썩은 통나무처럼 엎어진 놈의 뒤통수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은빛 날붙이가 보였다.
푸슉.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점점이 떨어지는 핏물.
숨이 끊어진 삼노의 미간 사이에 박혀 있던 비수를 회수하던 사마표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혹시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내가 대답했다.
“그래.”
“각주 몫이었다면 미안하군. 살려두면 화근이 될 것 같…….”
“그거 말고.”
사마표의 시선에 의문이 깃든 그때, 나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손쉽게 죽이지는 말았어야지.”
경험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손에 죽느냐도 마찬가지다.
놈은 더욱 큰 고통을 느꼈어야 했다.
이렇게 편하게, 한순간에 이승을 떠나선 안 됐다.
가장 먼저 쇄골이 뜯겨 나가고, 곧이어 한쪽 팔이 잘리고, 결국은 몸 안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이 갈기갈기 찢어진 후에야 목이 잘려 나간 이노가 그랬던 것처럼.
“더는 나서지 마. 단 한 걸음도.”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선, 황량한 목소리.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다만 침잠하게 굳은 사마표와 적천강의 표정이, 그리고 악귀를 마주한 듯이 얼어붙어 있는 일노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그 사실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괴, 괴물…….”
파르르 떨리는 신형과 음성.
나는 눈 깜짝할 새에 평생을 동고동락한 두 의제(義弟)를 잃은 늙은 마두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와 그보다 더욱 짙고 깊은 두려움을 보았다.
철벅.
느릿하게 나아가는 걸음.
어느덧 지면을 축축하게 적신 핏물 때문일까,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 걸음 소리에 일노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두 팔을 지지대 삼아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이미 양쪽 무릎이 산산이 부서진 놈으로서는, 오직 그것만이 나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다!”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일노가 팔을 흩뿌렸다.
퍼엉!
파공성이 들리기도 전에 고개를 틀었다. 유형화된 장력(掌力)이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공간을 터트린다.
비록 이미 반병신이 되었지만, 놈의 몸 안 깊숙이 흐르는 강대한 공력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더 해봐.”
내 눈에 비친 그 움직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투박하고, 형편없이 느렸으며, 그랬기에 모든 것이 곧 허점투성이였다.
“으아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외침.
펑! 펑! 퍼엉!
혼비백산한 일노가 뻗어 낸 장력에 압축된 공기가 연달아 터져 나간다.
맹렬하게 쏘아지는 장력의 여파에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옷깃과 함께 피부가 찢겨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일노가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발악이었다.
덥석, 우두둑!
번개처럼 놈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꺾었다.
이건 복잡한 묘리가 스며든 금나수(禁拿囚)도, 공력이 담겨 있는 한 수도 아니다.
순수한 근력과 민첩성.
인간에게 부여된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그 힘과 속도는, 나약한 뼈와 살을 우습게 짓뭉개 버렸다.
“크……헉!”
엄청난 격통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억눌린 신음.
하지만 나는 안다.
눈앞의 늙은 마두가 이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인물이었다면, 천산삼노라는 별호는 이미 오래전에 잊혔으리라는 것을.
슈확! 쾅!
갈고리처럼 휘어진 다섯 개의 손가락이 섬광처럼 지면을 찍었다.
단 한 걸음.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보다 앞서 물러난 나는,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치고 지면 깊숙이 틀어박힌 일노의 손등을 발로 짓밟았다.
콰드득!
천근의 무게가 실린 발바닥을 타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전해진다.
상상치도 못한 격통과 두려움으로 부릅떠진 일노의 눈동자에, 담담한 표정을 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퍽.
정확히 턱을 가격당한 놈의 고개가 돌아간다. 핏물과 함께 싯누런 이빨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퍽.
한 번 더.
“지금 당장.”
퍽.
다시 한번 더.
“죽이고 싶어지잖아.”
뻑!
찐득한 핏물이 주먹에 달라붙었다.
나는 이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일노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채,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안 그래?”
이건 일노를 향한 말이 아니다.
상기 어린 얼굴로 십여 장 밖에서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던,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천 명의 목을 떨어트린 괴물에게 건네는 말이다.
짝. 짝. 짝.
느릿한 박수 소리와 함께, 혈검마군이 경탄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멋지군. 아니, 아름다워.”
그 대답을 듣자 몸 안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극도의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한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의 반응은 예상했던 기준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그래, 무림인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잔인하고 철저하게 짓밟아야 그게 진짜 싸움이지. 안 그런가?”
혈검마군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중요한 전력이자 자신의 수족인 천산삼노 중 둘이 죽고, 하나가 불구가 되었음에도 그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즐거워 보였다.
“미친……놈.”
“내가? 아니면 자네가?”
“뭐?”
“아니, 그렇잖은가.”
나를 향해 눈을 깜빡이던 혈검마군이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빙그르 돌았다.
“내 모습을 보게. 복색이 영 칙칙해서 그렇지, 지금 자네에 비하면 아주 점잖아 보이지 않나?”
“……!”
“아, 오해하지는 말게. 보기 흉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니까.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꽤 친숙하기도 하고…… 뭐, 여러모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네.”
흡족하게 웃고 있는 혈검마군의 모습에, 나는 문득 숨이 막혔다.
친숙하다고 했다. 보기 좋다고 했다.
다름 아닌 혈검마군이. 늙고 악랄한 대마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지금의 내 모습을.
단순한 복수가 아닌, 더욱 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에 미쳐 있던 조금 전의 나를.
“이건. 이건 그러니까…….”
“그만.”
더없이 익숙한, 동시에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뒷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하면 됐다.”
성큼 앞으로 나선 적천강을 향해, 나는 불현듯 묻고 싶어졌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아니면 혈검마군에게?
그도 아니면 둘 모두에게?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차마 조금 전의 내 모습이, 피와 복수에 미친 마두(魔頭)와 닮아 있었느냐 묻기에는 순간 겁이 났으니까.
그러나 나도 모르게 경직되어 버린 몸과 마음을 다시 다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마두 덕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맥을 끊다니, 선배도 너무 하시는구려. 나름 뜻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혈검마군을 향해, 적천강이 가래를 탁 뱉었다.
“좆이나 까거라. 노부는 네놈 같은 후배 둔 적 없으니.”
“그건 나도 알고 있소만, 오랫동안 선배를 흠모해 온 터라 어쩔 수 없소. 짝사랑으로라도 만족해야지.”
“산 채로 숯덩이가 되어야 그 주둥이를 닥치겠느냐?”
“아마도 그럴 거요.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살짝 실망하긴 했소. 최소한 저 셋 중 한 놈은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
짐짓 한숨을 내쉰 혈검마군이 말을 이었다.
“오래전, 구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내가 어찌나 설레었는지 모를 거요. 말로만 들었던 열화문의 후예라니! 감히 선배를 건드린 그 멍청한 것들이 죄다 잿가루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뭐라?”
“그렇지 않소? 산 채로 타들어 갔으니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그만큼 확실하고 처절한 보복이 어디 있겠소?”
“……!”
“주위의 모두가 미친 늙은이라며 치를 떨었지만, 나만큼은 아니었소. 그날부터 줄곧 선배를 흠모하게 되었지.”
샛별처럼 눈을 반짝이는 놈의 모습에 적천강도, 나도,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사마표마저도 말문이 막힌 듯했다.
마두.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혈검마군은 마두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미친놈이었다.
혈(血)이라는 글자가 왜 별호에 들어갔는지 가장 확실하게 이해가 되는.
그리고 그런 혈검마군에게 있어, 천산삼노의 존재는 그저 곁에 두고 기르던 가축에 지나지 않았다.
“저 머저리들도 마찬가지지. 정마대전 때만 해도 조금만 전세가 기울어지면 도망치기 바쁘다가, 오늘은 제 주제들도 모르고 나섰으니 응당 죽어 마땅……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놈은 살아 있군.”
쌔액, 쌕.
“마, 마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채로, 얕은 숨결을 내뱉고 있는 일노를 힐끗 바라본 혈검마군이 나를 향해 물었다.
“이건 노파심에 묻는 건데, 자네 혹시 그놈 살려 둘 생각인가?”
“그건 왜 묻는 거지?”
“아까부터 계속 거슬려서. 이건 뭐,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나.”
“……!”
“죽일 거면 빨리 죽이고, 포로로 쓸 거면 옆에 있는 젊은 친구 시켜서 돌려보내게. 물론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아서 딱히 별다른 쓸모도 없겠지만.”
사마표를 가리키며 말한 혈검마군이 문득 입맛을 다셨다.
“아, 이제는 그럴 시간도 부족하려나?”
둥, 둥, 두웅.
갈수록 그 크기와 울림을 더해 가는 전고(戰鼓)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혈검마군과 우리.
각각 등 뒤로 수많은 군세가 토해내는 기세가 사방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직감했다.
대설산 일대를 피로 물들인 혈전이, 피할 수 없는 대전투가 드디어 첫걸음을 떼었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끝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혈검마군이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와 적천강만 있다면 충분하다.
천산삼노라는 핵심 전력이 소멸한 지금, 이 전투의 무게추는 아군을 향해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분명.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런데 왜…….’
혈검마군은 왜 지켜만 보았던 것일까.
그토록 중요한 전력을, 세 명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의 존재를 가축 취급했던 것일까.
‘이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 순간.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화아아악.
어느샌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대설산이 지니고 있던 것보다 더한, 얼음과도 같은 냉기가 바람을 얼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거무스름한 안개처럼 들이닥치는 한 무리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스아아아아.
거센 말발굽 소리조차 없이, 유령과 같은 움직임으로 쇄도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떠올렸다.
이곳에, 무림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이계의 존재들을.
“데스 나이트(Death Knight)……?”